바울은 고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전했다. 사람의 지혜로 신앙의 권위를 세우려는 태도에 맞서,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한다고 설명했다. 이제 지혜라는 말을 다시 사용한다. 그가 말하는 지혜는 십자가와 다른 비밀 교훈이 아니라, 성령이 알리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하는 지혜다.1

6절: 성숙한 사람들에게 말하는 지혜

“우리는 성숙한 사람들 가운데서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지혜나, 없어져 가는 이 시대 통치자들의 지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6절, 필자 번역)2

텔레이오이(τέλειοι)는 성숙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티슬턴은 이를 완벽한 사람보다 어린아이와 대조되는 영적인 어른으로 읽는다. 성숙은 십자가의 지혜를 받아들여 다른 사람을 위하여 책임 있게 사는 관계다.3

콘첼만은 이 단락의 언어에 초보적인 가르침과 높은 지혜를 나누는 틀이 있다고 읽는다. 그는 바울이 이를 문맥 안에서 수정하면서도, 단락 자체의 영적인 언어가 더 높은 신자들의 지혜를 표현한다고 설명한다.4 피는 성령을 받은 신자와 받지 않은 사람의 대조를 우선하며, 특별한 지식을 가진 상위 집단이라는 읽기에 반대한다.5

3:1-3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을 그리스도 안의 어린아이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시기와 다툼이 그 판단의 근거다. 같은 성령을 받았다는 지위와 그에 어울리는 성숙한 삶은 이 논증 안에서 함께 고려된다. 성숙은 다른 복음에 입문하는 자격보다 이미 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살아가는 판단에 관계한다.

7절: 오래전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지혜

“우리는 비밀 가운데 있던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시대들 이전에 그 지혜를 미리 정하셨습니다.” (7절)

감추어져 있던이라는 완료 수동분사는 지혜가 이전에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상태를 표현한다. 비밀은 성숙한 신자들만 별도의 암호로 배우는 가르침보다 하나님의 구원 목적에 관계한다. 피는 그 지혜를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를 통한 구원으로 읽는다.6

그 목적은 우리의 영광이다. 이 시대 통치자들이 누리는 권위와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광이 대조된다.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 뒤에 급히 다른 구원을 마련하신 분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던 그 뜻이 시대들 이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8절: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통치자들

“이 시대 통치자들 가운데 아무도 그 지혜를 알지 못했습니다. 알았다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8절)

통치자들의 정체는 다르게 읽힌다. 콘첼만은 이 시대의 신화적 권세라는 배경에서 악한 영적 권세를 우선한다.7 피는 십자가 처형을 실행한 인간 통치자들과 이 시대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고 읽는다.8 후자의 읽기는 못 박았다는 실제 행위의 주체를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영광의 주님은 그리스도다. 콘첼만은 하나님을 설명하는 영광의 호칭이 여기서 주 예수에게 적용되었다고 설명한다.9 가장 수치스러운 처형을 받은 분이 영광의 주로 불린다. 십자가를 실패로만 판단한 통치자들은 그 사건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다.

9절: 사람이 생각해 내지 못한 하나님의 선물

“기록된 것처럼, 눈이 보지 못하고 귀가 듣지 못하며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것들입니다.” (9절)

이 문장은 이사야 64:4와 65:17의 표현을 떠올리게 하지만, 현재 알려진 구약 본문 하나와 문장 전체가 일치하지는 않는다. 피는 유대교의 묵시적 성경 독해에서 여러 표현이 결합된 문구가 바울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을 우선한다.10

문장의 강조는 하나님의 구원을 인간의 감각과 상상만으로 찾아낼 수 없다는 데 있다. 바울은 다음 절에서 하나님이 그 내용을 성령을 통하여 계시하셨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미래의 영광과 이미 알려진 십자가의 지혜가 같은 구원에 관계한다.

10-11절: 하나님을 아시는 하나님의 영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이 일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살피십니다. 사람의 일을 그 사람 안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10-11절)

SBLGNT는 가르(γάρ), 곧 때문이라는 연결을 택한다. 티슬턴이 주해한 비평본문은 데(δέ)를 택하여 대조를 강조한다.11 SBLGNT의 읽기에서 10절은 인간이 생각해 내지 못한 구원이 어떻게 우리에게 알려졌는지 설명한다. 계시의 주어는 하나님이고 그 매개는 성령이다.

살피신다는 에라우나(ἐραυνᾷ)는 성령에게 깊은 앎을 귀속한다. 티슬턴은 성령이 모르는 것을 발견하려고 조사한다는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알아서 알리시는 활동으로 읽는다.12 11절의 비유가 그 뜻을 설명한다. 자기 생각과 뜻은 그 사람 자신이 알듯이, 하나님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다.

이 비유의 중심은 앎과 계시의 관계다. 티슬턴은 인간 안의 영과 하나님 안의 영을 공간적인 구성 요소로 놓기보다, 자기 안에 숨은 것을 밖의 사람에게 알릴 수 있는 주체의 관계로 읽는다.13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통하여 자신을 알리신다. 성령은 그 일을 모르는 외부의 관찰자로 서술되지 않는다.

피도 이 비유를 하나님은 하나님을 통해 알려진다는 관계로 읽는다.14 사람들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일과, 성령 자신이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아시는 일은 다르다. 전자는 선물로 받은 앎이고 후자는 그 선물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앎이다.

12절: 하나님에게서 오는 영을 받음

“우리가 받은 것은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영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12절)

하나님에게서 오는 영이라는 표현은 성령을 신자의 본래 능력과 구별한다. 티슬턴은 세상의 영과 하나님에게서 오는 영의 대조를, 세상의 가치와 다른 하나님의 선물이 주어지는 관계로 읽는다.15 신자들이 가진 앎은 자신들의 영적인 우수함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피는 이곳의 우리에 바울과 고린도 신자들이 함께 포함된다고 명시한다.16 은혜로 주어진 구원을 아는 성령의 선물은 공동체의 공통 경험이다. 그 선물을 서로 다른 지위를 과시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태도는 그 선물이 설명하는 은혜와 맞지 않는다.

13절: 성령의 가르침으로 말함

“우리는 이 일들을 인간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말하지 않고, 성령이 가르치신 말로 말합니다. 성령에 속한 일들을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해석해 줍니다.” (13절)

말한다는 동사는 6절의 우리가 지혜를 말한다를 이어받는다. 피는 12절의 공통적인 성령 수령에서 13절의 바울의 복음 선포로 초점이 바뀐다고 읽는다.17 성령이 알리신 구원을 성령의 가르침으로 전한다.

마지막 구문은 여러 방식으로 번역된다. 프뉴마티코이스(πνευματικοῖς)는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라는 남성형으로도, 성령에 속한 말이나 일들로라는 중성형으로도 읽을 수 있다. 티슬턴은 사람들을 우선하고, 피는 성령이 가르치신 말로 성령의 일을 설명한다는 읽기를 우선한다.18 위 번역은 다음의 받는 사람에 대한 설명과 연결하여 사람들을 우선했다.

어느 읽기에서도 복음의 내용과 말하는 방식이 성령에게 관계한다. 14절은 듣는 사람이 그 내용을 어떻게 판단하는지 이어서 말한다.

14절: 성령의 일을 어리석다고 여기는 사람

“성령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에 속한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그것들이 어리석게 보이며, 알 수도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 분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4절)

프쉬키코스(ψυχικός)는 인간적인 생명의 조건과 판단 안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티슬턴과 피는 이를 성령에 의해 판단이 형성되는 사람과 대조한다.19 사람이 영혼을 가졌는지 아닌지를 나누는 말이 아니다. 복음의 지혜를 평가하는 관계가 중심이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과 알 수 없다는 말이 함께 나온다. 티슬턴은 십자가가 어리석다고 보이는 판단의 틀이 성령의 활동으로 바뀌어야 구원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20 바울은 어떤 사람의 문법 지식이나 일반적인 지능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받아들이는 앎을 설명한다.

15-16절: 성령의 분별과 그리스도의 마음

“성령을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분별하지만,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서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15-16절)

분별한다는 아나크리노(ἀνακρίνω)는 살피고 평가하는 뜻을 가진다. 티슬턴은 이 문장을 다른 사람의 평가를 받지 않는 영적 우월성의 주장으로 떼어 놓지 않고, 십자가의 지혜를 알아보는 관계로 읽는다.21 피도 모든 것을 구원과 계시의 문맥 안에서 읽으며, 신자들의 무제한적인 앎이나 교회의 교정으로부터 면제되는 권한을 뜻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22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아는가라는 질문은 이사야 40:13을 따른다. 하나님을 가르칠 외부의 조언자는 없다. 이어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다고 말한다. 티슬턴은 주님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마음의 연결이 하나님의 지혜를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관계시킨다고 읽는다.23

그리스도의 마음은 그분의 생각과 판단, 삶의 방향을 아는 관계다. 티슬턴은 이를 사고 능력이라는 도구보다 판단과 행동을 이끄는 생각의 방식으로 읽는다.24 이 마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 바로 앞의 성령의 앎과 같은 본질을 가진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아시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아간다.

피는 16절의 우리가 바울의 선포를 가리키는지 신자들까지 포함하는지 확정하지 않는다.25 어느 경우에도 3:1-3의 시기와 다툼은 그리스도의 마음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 성령의 선물이 공동체의 실제 판단과 삶을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야 한다는 방향은 분명하다.

현대 연구와 교부의 해석

아치 후이는 성령의 지혜와 계시를 유대교의 예언의 영과 비교한다. 동시에 바울에게 그 영은 하나님의 영이면서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현존과 생명을 알리는 분이라는 차이를 강조한다.26 이 비교는 2장의 성령을 인간의 높은 자기 인식으로 설명하는 해석보다 그리스도와 구원의 관계에서 읽는 근거를 보탠다.

크리소스토무스는 『고린도전서 강해』 7.7에서 성령이 살피신다는 말을 무지가 아니라 정확한 앎의 표현으로 읽는다. 로마서 8:27에서 하나님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라고 불린다는 표현을 연결한다. 인간이 자기를 알듯 성령이 하나님을 아시기에 우리를 가르치신다는 논증이다.27

바실리우스는 『성령론』 24.56에서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아시는 성령과 그분에게서 계시를 받는 피조물을 구별한다. 그 차이를 성령이 본성으로 선하고 생명을 주시며, 피조물은 그 선함과 생명을 받는다는 설명에 연결한다.28 그의 결론은 성령이 다른 피조물처럼 선물을 받아야 하나님을 아시는 분이라는 설명을 배제한다.

이 두 교부는 탐구라는 동사가 성령의 앎을 불완전하게 만든다고 읽지 않는다. 크리소스토무스는 같은 동사의 하나님 용례를 들어 의미를 설명하고, 바실리우스는 계시를 주시는 분과 계시를 받는 사람들의 차이에 무게를 둔다. 전자는 어휘와 비유의 해석이고 후자는 그 관계에 본성과 참여의 구별을 적용한 논증이다.

성령의 신적 지위와 동일 본질에 관한 판단

바울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자기 뜻을 알리셨다고 말한다. 그 성령이 하나님의 일을 아시는 근거는 11절에서 하나님의 영이라는 관계로 설명된다.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아는 근거는 12절에서 성령을 받았다는 사건으로 설명된다. 하나님 자신의 앎과 계시를 받아 누리는 인간의 앎이 같은 수준의 지식으로 놓이지 않는다.

성령을 최고 지식을 받은 천사로 설명할 수도 있다는 반론에는 11절의 비유가 답할 근거가 된다. 천사는 하나님이 알려 주신 것을 전달할 수 있지만, 그 전달이 하나님 자신이 자기를 아시는 관계와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 비유는 성령을 하나님 외부에서 정보를 얻는 전달자보다 하나님 자신의 깊은 것을 아시는 영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통하여 자기를 알리신다.

동일 본질의 판단은 이 자기 앎과 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연결한다. 하나님 자신의 깊은 것을 아시는 성령을 다른 신으로 세우지 않고, 나뉘지 않는 하나의 신성 안에서 하나님을 알리시는 분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앎과 생명은 피조된 부분으로 나뉘지 않는다는 신론이 이 결론을 이끈다. 인간의 영에 관한 비유를 하나님 안의 공간이나 몸의 부분으로 적용하는 설명과는 다르다.

그리스도는 영광의 주로 불리고, 성령이 알려 주시는 지혜는 그분의 십자가다. 이사야의 주님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다는 결론에 연결된다. 같은 편지의 8:6은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한 주를 예수 그리스도로 특정하며 만물을 두 분에게 관계시킨다.29 이를 함께 읽으면 아버지의 뜻, 그 뜻을 이루신 그리스도, 그 뜻을 아시고 알리시는 성령은 하나의 구원과 계시에 관계한다.

그 공동 활동만으로 동일 본질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구원의 사명에 신자들도 참여한다. 아들에게는 만물의 창조와 주의 호칭이, 성령에게는 하나님의 자기 앎과 생명 부여가 귀속된다. 이 고유한 신적 관계를 한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함께 설명할 때 동등한 신적 지위와 나뉘지 않는 본질의 논증을 세울 수 있다. 본문의 목적은 그 하나님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을 성령 안에서 알고 살아가는 공동체를 설명하는 데 있다.

각주와 자료

  1. Anthony C. Thiselt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and Rapids: Eerdmans; Carlisle: Paternoster, 2000), 230-232, 252, 259-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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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Michael W. Holmes 편, The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2010), 고전 2:6-16을 따른 필자 번역. 고정 커밋 본문. 10절은 γάρ, 13절은 πνεύματος에 성령을 더하는 이문 없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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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hiselton, First Epistle, 23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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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Hans Conzelmann, 1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trans. James W. Leitch,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5), 56, 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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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Gordon D.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revised edition, NICNT (Grand Rapids: Eerdmans, 2014), 104-110. Perlego의 출판사 인쇄 쪽수 표지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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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Fee, First Epistle, 1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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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Conzelmann, 1 Corinthians, 6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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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Fee, First Epistle, 110-111, 1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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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Conzelmann, 1 Corinthians,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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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Fee, First Epistle, 11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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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Thiselton, First Epistle, 254-255; Fee, First Epistle, 116-117. SBLGNT는 γάρ를 채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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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Thiselton, First Epistle, 256-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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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Thiselton, First Epistle, 257-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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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Fee, First Epistle, 11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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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Thiselton, First Epistle, 260-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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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Fee, First Epistle, 1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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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Fee, First Epistle, 1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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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Thiselton, First Epistle, 264-267; Fee, First Epistle, 1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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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Thiselton, First Epistle, 267-270; Fee, First Epistle, 12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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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Thiselton, First Epistle, 269-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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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Thiselton, First Epistle, 271-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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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Fee, First Epistle, 12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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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Thiselton, First Epistle, 274-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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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Thiselton, First Epistle, 275-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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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Fee, First Epistle, 12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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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Archie Hui, “The Spirit of Prophecy and Pauline Pneumatology,” Tyndale Bulletin 50, no. 1 (1999): 93-115, 여기서는 106, 114-115. 출판사 원문. DOI 10.53751/001c.3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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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크리소스토무스, 『고린도전서 강해』 7.7, 공개 NPNF 영어 번역. 해당 판본은 7번을 두 번 표시하며, 성령이 정확히 아신다는 논의는 두 번째 7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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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바실리우스, 『성령론』 24.56, 공개 NPNF 영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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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SBLGNT, 고전 8:6. 고린도전서 8:4-6 원고의 창조 및 주의 고백과 연결한 필자의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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