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 제물이 놓인 식탁에서

고린도 교인들은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는 문제를 두고 서로 다른 판단을 했다. 신전에 연결된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이 있었고(8:10), 시장에서 고기를 사거나 다른 사람의 식사에 초대받는 일도 있었다(10:25-28). 티슬턴은 우상 제물에 관한 논의를 제사가 진행되는 자리에서 먹는 일에 한정하지 않는다. 고린도의 종교 행사와 사교 모임, 음식의 유통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설명이다.1

어떤 교인들은 우상이 실제 신이 아니라는 지식을 자기 자유의 근거로 삼았다. 바울은 그들의 지식을 다루기 전에 사랑을 말한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세워 줍니다.” (8:1, 필자 번역)

우상에 관한 판단이 옳아도 그 지식을 쓰는 방식이 다른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다. 2절에서는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직 마땅히 알아야 할 만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3절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알려져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그에게 먼저 알려지고 받아들여진 사람이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이 다른 교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묻는 문맥에서 한 하나님과 한 주에 관한 고백을 제시한다.

4절: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상에게 바친 것을 먹는 일에 관하여,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 외에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4절)

그러므로라는 연결은 음식 문제로 돌아간다. 바울은 우상에 관한 지식을 자신과 교인들이 함께 아는 것으로 말한다. 티슬턴은 이 문장을 고린도 교인들이 내세운 말이나 공동체가 공유한 고백의 인용으로 읽는 해석들을 소개한다. 인용의 정확한 시작과 끝에는 의견이 갈리지만, 바울이 한 하나님에 관한 고백을 교인들과 공유한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본다.2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우덴 에이돌론(οὐδὲν εἴδωλον)은 어떤 우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구문으로도 읽힐 수 있다. 티슬턴은 우상이 가리키는 신에게 실재가 없다는 뜻으로 설명한다.3 눈앞에 있는 신상이나 신전 건물이 사라진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이 나타낸다고 하는 신은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한 분 외에는 없다는 말은 그 부정을 뒷받침한다. 교인들이 따르는 하나님은 여러 신 가운데 택한 하나의 신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고백을 인정한다. 다만 그 고백에서 어떤 음식이나 종교적 모임에 참여해도 괜찮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뒤의 7절에서 그는 모든 사람에게 이 지식이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들의 식탁에는 같은 음식을 여전히 우상에게 바친 것으로 받아들이는 교인이 함께 있다.

5절: 신과 주라고 불리는 많은 존재들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이 계십니다.” (5절과 6절 첫 구절)

5절은 4절의 고백과 고린도 사람들이 경험하는 세계 사이에 있는 긴장을 말한다. 신이라 불리는 것들, 레고메노이 테오이(λεγόμενοι θεοί)는 그것들이 신이라는 이름을 가진다는 표현이다. 바울은 하늘과 땅에서 그런 이름으로 섬김을 받는 많은 존재들을 언급한다. 한 하나님에 관한 고백은 그 종교적 현실 가운데 드려진다.

있다고 하더라도로 옮긴 에이페르(εἴπερ)는 논증을 위하여 상대의 가정을 허용하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티슬턴은 많은 신과 주가 있다는 진술을 그런 가정과 함께 설명하면서, 그들이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까지 없다고 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우상을 섬기는 습관은 개종한 교인에게도 계속 영향을 줄 수 있고, 10:20에서는 우상 제사를 귀신들에게 바치는 제사로 설명한다.4

콘첼만은 이 존재들이 세상에서 힘을 행사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아니라고 읽는다. 하늘과 땅에 있다는 말은 그들이 창조된 세계 안에 속한다는 뜻을 담으며, 그 자신들도 피조물이라는 설명이다.5 바울의 고백에서 하나님과 대립하는 권세의 존재와 그 권세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일은 같은 판단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권세를 경험하는 사람이 있어도 신자들의 하나님과 주는 그들에게서 결정되지 않는다.

6절: 만물의 근원이신 아버지와 만물을 매개하시는 그리스도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십니다. 만물은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하여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6절)

우리에게는이라는 헬민(ἡμῖν)은 이 고백이 누구의 믿음과 삶을 말하는지 밝힌다. 5절의 많은 신과 많은 주를 따르는 삶에 맞서, 바울과 교인들은 한 하나님과 한 주에게 속한다. 그들이 아는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시므로, 이 고백의 범위는 고린도 교회 밖의 세상도 포함한다.

한 하나님은 아버지라는 말로 설명된다. 콘첼만은 이 절의 아버지를 먼저 창조주라는 의미로 읽는다. 바로 다음에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왔다는 관계절이 붙기 때문이다.6 같은 편지의 1:9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지만, 8:6은 아들이라는 호칭보다 예수가 주라는 고백과 만물에 대한 역할을 앞세운다.

만물은 그분에게서 나왔다는 엑스 후 타 판타(ἐξ οὗ τὰ πάντα)는 아버지를 만물의 기원으로 밝힌다. 이어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있다는 헤메이스 에이스 아우톤(ἡμεῖς εἰς αὐτόν)은 신자들의 존재가 향하는 목적을 하나님에게 둔다. 티슬턴은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이시며 신자들의 존재의 목적이라는 두 관계를 함께 설명한다.7 한 하나님을 고백하는 사람의 삶은 그에게서 받은 생명과 그를 위한 삶으로 연결된다.

다음에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한다. 그 주를 설명하는 첫 관계절도 같은 만물이라는 타 판타(τὰ πάντα)를 사용한다. 만물은 아버지에게서 나왔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있다. 그리스도를 통한 일은 몇몇 신자들의 개인적 체험에 한정되지 않는다. 바울은 아버지에게 귀속한 만물을 다시 그리스도에게 연결한다.

티슬턴은 만물을 새 창조와 구원의 영역에 집중하여 읽는 머피오코너의 해석을 논하지만, 자신은 창조된 세계와 구원의 선물을 함께 읽는다. 이 문맥에서 먹는 음식도 하나님에게서 나온 창조의 선물이며, 그 세계와 신자들의 구원을 한 주에게 함께 연결한다는 설명이다.8 4절의 세상과 5절의 하늘과 땅에 이어 같은 만물을 두 번 말하는 구조도 그 넓은 범위를 지지한다.

콘첼만은 그리스도가 창조를 매개하시는 분이므로 그의 선재가 전제된다고 읽는다.9 이 읽기에서는 지상에서 살고 죽으신 예수가 창조된 세계의 기원에 관계된 분으로 고백된다. 그의 역할은 이미 존재하는 세계 안에서 말씀을 전한 선지자의 역할보다 넓다.

우리도 그분을 통하여 있다는 마지막 구절은 이 우주적 관계 안에 신자들을 놓는다. 티슬턴은 앞의 만물과 마지막의 우리를 연결하여, 그리스도가 창조와 구원 모두를 매개하신다고 풀이한다.10 신자들은 자기 지식으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아버지에게서 생명을 받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위한 삶을 산다.

쉐마와 창조를 둘러싼 현대 해석

보컴: 한 하나님의 고백에 포함된 예수

보컴은 한 하나님과 한 주라는 표현을 신명기 6:4의 쉐마와 연결한다. 칠십인역에서 주와 하나님, 한 분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한 하나님을 가리킨다. 보컴은 바울이 그 말들을 한 하나님 아버지와 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배치하여, 예수를 한 하나님의 고유한 정체성 안에 포함시켰다고 읽는다. 한 하나님 곁에 별개의 신적 주를 추가하면 쉐마가 요구하는 배타적 충성과 충돌한다는 논증이다.11

그는 창조 진술도 같은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 로마서 11:36에서 만물의 기원과 매개와 목적이 모두 하나님에게 돌려지는데, 고린도전서 8:6은 그 가운데 만물의 매개를 그리스도에게 돌린다. 보컴은 만물을 창조하시는 일이 하나님만의 고유한 일이라는 유대교적 전제 안에서 이를 읽는다.12 호칭의 배치와 창조의 역할이 함께 예수의 지위를 설명한다.

매그래스: 한 하나님과 그가 세우신 한 대리자

매그래스는 쉐마가 이 본문의 배경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바울이 그 고백 옆에 한 주에 관한 진술을 더했다고 읽는다. 쉐마 안에서 주와 하나님은 같은 대상을 가리키지만, 바울은 아버지와 예수에게 서로 다른 관계를 돌린다는 설명이다. 그는 디모데전서 2:5의 한 하나님과 한 중보자라는 표현을 비교하여, 한 하나님과 연결되는 하나의 존재가 언제나 하나님의 정체성 안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라고 논한다.13

창조의 매개에 관해서는 지혜 언어를 검토한다. 매그래스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영원한 계획이 실현되었다는 비유적 읽기를 선호한다. 동시에 실제로 선재한 지혜가 예수가 되었다는 읽기도 가능성으로 남겨 두며, 그런 지혜의 활동도 당시 유대교의 한 하나님 고백 안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14 그의 주장은 선재를 일괄적으로 부정하는 주장보다, 선재와 높은 대리자의 지위를 인정해도 곧 하나님의 정체성을 재정의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개스턴과 페리: 쉐마의 재작성과 동일성 추론에 대한 비판

토머스 개스턴과 앤드루 페리는 한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쉐마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과, 바울이 그 본문을 의도적으로 다시 썼다는 주장을 구별한다. 하나님과 주와 한 분이라는 어휘는 흔히 쓰이며, 쉐마의 어순과 특징적인 도입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여러 주와 한 주의 대조에서 퀴리오스(κύριος)는 호칭으로 쓰였으므로, 여기서 그 단어가 곧 YHWH를 대신한다는 해석에도 반대한다.15

그들은 한 하나님과 한 주라는 두 진술, 그리고 그에게서와 그를 통하여라는 다른 관계절이 두 대상을 구별한다고 논한다. 이를 두 대상을 같은 것으로 등치하는 문장으로 읽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들의 결론은 바울이 한 분의 신적 인격을 가리키는 유일신 고백을 유지하며, 예수를 그 한 하나님과 구별한다는 해석이다.16

이 비판은 한 주라는 호칭이나 몇 개의 공통 어휘에서 예수와 아버지의 동일성을 바로 도출하는 논증을 약화시킨다. 두 분의 구별은 보컴의 해석에서도 유지된다. 쟁점은 그 구별이 한 하나님의 창조 활동 안의 구별인지, 창조주와 별도의 대리자 사이의 구별인지에 있다. 개스턴과 페리의 논문은 쉐마와 동일성 추론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며,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있다는 말에 관한 독자적인 창조 설명은 충분히 발전시키지 않는다.

같은 고백이 식탁에서 요구하는 삶

7절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이 지식이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 우상과 함께 살아온 습관 때문에 어떤 교인은 음식을 여전히 우상에게 바친 것으로 먹고, 그 양심이 더럽혀진다. 10절에서는 지식이 있는 사람이 신전에서 먹는 모습을 보고 다른 교인도 그 음식을 먹도록 부추김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바울은 그 결과를 그리스도와 연결한다.

“그리하여 그대의 지식 때문에 약한 사람, 곧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하여 죽으신 형제가 멸망합니다. 이처럼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11-12절)

6절에서 만물과 우리의 존재를 매개하신 주는 이 약한 형제를 위하여 죽으신 분이다. 신자가 누리는 자유와 다른 교인의 생명이 같은 주에게 속한다. 티슬턴은 만물과 신자들의 존재를 선물로 받는다는 고백이, 약한 교인의 불안을 사랑 없이 무시하는 논증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17 바울은 13절에서 형제를 넘어뜨리는 경우 자신이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한다. 한 하나님과 한 주에 관한 고백은 그 식탁에서 누구를 위하여 자기 권리를 제한할지에 관계된다.

교부들의 해석

이레네우스: 창조주와 다른 신을 갈라놓는 해석에 맞서

이레네우스는 『이단 반박』 3.6.1에서 성경이 참으로 하나님이 아닌 대상을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으로 부르지 않는다고 논한다. 시편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각각 하나님과 주로 불린다는 자료를 모아, 구약의 하나님과 예수의 아버지를 갈라놓는 해석에 답한다.18

3.6.5에서는 고린도전서 8:4-6을 직접 인용한다. 신이라 불리는 우상들과 만물의 근원이신 아버지,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별한다. 하늘과 땅의 신들을 세계를 만든 여러 존재로 읽는 견해에 맞서, 그는 신명기의 우상 금지와 천체 숭배에 관한 말씀을 사용한다.19 이 해석에서 본문은 서로 다른 세계의 창조주를 배정하는 체계를 거부하고, 이스라엘의 창조주와 예수를 한 고백 안에 연결한다.

크리소스토무스: 하나님과 주라는 호칭의 배타성

크리소스토무스는 『고린도전서 강해』 20.5-6에서 만물과 우리를 첫 창조와 믿는 사람이 되는 일에 연결한다. 아버지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을 창조하셨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이 잘못된 섬김에서 진리로 돌아왔다는 설명이다. 한 하나님이라는 말로 아들의 신성을 배제하면, 한 주라는 말로 아버지의 주되심도 배제해야 한다고 반박한다.20

그의 논증은 다른 성경 구절에서 아버지도 주이시며 아들도 하나님으로 불린다는 판단에 의존한다. 8:6의 호칭 배치는 두 분을 서로 구별하면서 많은 신과 많은 주의 섬김을 거부하는 고백으로 설명된다. 20.7에서 성령의 생략도 청중에게 여러 신을 말하는 것으로 들리지 않도록 한 표현으로 읽으며, 고린도전서 12장과 고린도후서의 축복문에서는 성령이 두 분과 함께 언급된다고 지적한다.21 청중의 약함 때문에 성령을 생략했다는 이유는 그의 수용사적 설명이다. 바울이 이 절에서 직접 밝힌 이유는 아니다.

바실리우스: 전치사로 본성을 나누는 논증에 대한 반박

바실리우스는 『성령론』 2.4에서 아에티오스의 편지에 나오는 논증을 소개한다. 그에게서와 그를 통하여가 다른 말이므로 아버지와 아들의 본성도 다르다는 주장이다. 그 해석에서는 아버지가 창조의 근원이며 아들은 종속된 도구가 된다.22

바실리우스는 5.7-10에서 성경의 다른 용례로 그 고정된 배정을 반박한다. 로마서 11:36의 그에게서, 그를 통하여, 그를 향하여는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 그는 그 대상을 성자로 읽지만, 상대가 성부로 읽어도 그를 통하여가 성부에게 쓰였다는 사실은 남는다. 고린도전서 1:9에서도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신자들을 아들의 교제로 부르신 분이다. 따라서 그를 통하여라는 말 자체가 낮은 본성을 뜻한다는 규칙은 성경 용례와 맞지 않는다는 논증이다.23

이 반박은 8:6의 관계절들을 같은 뜻으로 지우지 않는다. 아버지가 기원이시고 아들이 매개하시는 관계는 유지된다. 바실리우스는 그 다른 관계가 다른 본성을 반드시 요구한다는 추론을 반박하며,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을 같은 신적 본성 안에서 설명한다.

성령을 언급하는 본문 형태도 후대 수용에 나타난다. 티슬턴은 한 성령과 그 안의 만물 및 신자들을 더하는 후대 전승을 소개한다.24 SBLGNT의 8:6에는 그 문구가 없다. 이 기준 본문의 고백은 한 하나님 아버지와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며, 성령을 이 절에 직접 덧붙인 삼자 병렬과는 형태가 다르다.

창조의 매개와 동일 본질

8:6이 직접 서술하는 관계에는 순서가 있다. 만물의 근원은 아버지이며, 만물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있고, 신자들의 삶은 아버지를 향한다. 예수의 역할이 아버지에게서 독립한 별도의 창조에 배정되지는 않는다. 같은 만물의 존재를 두 분에게 연결하되, 그 관계를 서로 다르게 말한다.

만물을 새 창조에만 한정하는 읽기보다 창조된 세계와 구원을 함께 읽는 해석이 이 단락의 전개에 더 잘 맞는다. 4절은 세상을, 5절은 하늘과 땅을 언급하고, 6절은 그 전체를 가리키는 만물을 두 번 말한다. 이어지는 음식 논의에서도 세상과 먹는 것을 누가 주셨는지가 신자들의 삶에 관계된다. 지상에서 일어난 구원과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통하여 존재하는 세계를 연결하는 읽기는 이 범위를 유지한다.

매그래스의 지혜 해석은 창조 언어가 시적 고백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표현할 수 있음을 설명한다. 다만 8:6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인 분에게 아버지와 평행한 만물의 관계절이 붙고, 그 관계절은 신자들이 그를 통하여 존재한다는 진술로 이어진다.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말은 실제 창조의 기원으로 읽으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있다는 말은 예수 안에서 완성될 계획의 비유로만 읽으면, 두 관계절이 같은 만물을 설명하는 공통성이 약해진다. 창조의 매개를 실제 역할로 읽을 때에는 콘첼만이 말한 선재의 함의가 설득력을 얻는다.

선재와 동일 본질은 여전히 서로 다른 판단이다. 선재한 창조 대리자를 인정하면서도 그를 창조주와 구별된 존재로 설명할 수 있다. 보컴은 하나님의 지혜와 말씀의 창조 활동을 한 하나님 자신의 활동으로 읽고, 매그래스는 같은 전통이 높은 대리자의 지위를 허용했다고 읽는다. 그 차이는 쉐마의 몇 단어를 대조하는 일보다, 창조에 관여하는 지혜와 말씀을 하나님과 어떤 관계로 이해하는지에 있다.

동일 본질의 논증은 한 하나님이라는 고백, 그리스도에게 돌려진 만물의 창조, 피조물과 창조주의 구별을 함께 유지한다. 만물이 모든 피조물을 포함한다면, 그 만물의 창조를 매개하시는 분을 그 자신이 매개하여 생긴 피조물에 넣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자신의 활동에서 나온다는 모순을 만든다. 이때 그리스도는 창조주의 지위에 속하며,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고백 안에서 아버지와 같은 신적 본성을 가지신다고 설명된다. 여기에는 만물의 범위가 창조된 세계 전체이고, 그리스도의 매개가 실제 창조 활동이라는 두 해석이 전제된다.

이 논증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한 인격으로 합쳐지지 않는다. 본문은 아버지와 예수를 다른 관계의 주체로 말한다. 동일 본질의 설명은 그 구별을 유지하면서 하나의 분할되지 않는 신성을 말한다. 바실리우스의 전치사 반박은 서로 다른 관계가 곧 서로 다른 본성을 뜻한다는 장애물을 제거한다. 개스턴과 페리의 두 대상에 관한 지적은 인격적 구별을 확인하지만, 두 분이 같은 창조주의 지위를 가지는지에 관한 판단은 창조 진술에서 별도로 나온다.

이 본문을 요한복음 1:1-3의 말씀과 창조, 골로새서 1:16의 하늘과 땅 및 모든 권세의 창조와 연결하면, 그리스도의 역할이 창조된 권세 중 하나의 활동이라는 설명은 더욱 어려워진다. 이것은 다른 신약 본문들이 보태는 근거다. 고린도전서 8:6 자체에서는 아버지의 기원적 역할과 그리스도의 매개적 역할이 강하게 서술되며, 아들의 영원한 나심이나 성령의 신적 본성은 직접 설명되지 않는다.

바울은 그 고백을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형제에게 되돌린다. 만물의 창조를 매개하신 주와 그 형제를 위하여 죽으신 주는 같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를 통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다른 교인의 양심을 해쳐 멸망하게 하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다. 한 하나님 아버지와 한 주의 관계에 관한 이 고백은 창조와 구원, 같은 식탁에 앉은 교인들의 삶을 함께 설명한다.

성경 인용은 SBLGNT를 기준으로 옮긴 필자 번역이다. 고린도전서 헬라어 본문. © 2010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and Logos Bible Software, CC BY 4.0.

각주와 자료

  1. Anthony C. Thiselt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and Rapids: Eerdmans, 2000), 617-619, 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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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hiselton,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627-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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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hiselton,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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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Thiselton,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631-634. 가정적 구문은 631-632쪽, 영향과 권세에 관한 판단은 632-634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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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Hans Conzelmann, 1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trans. James W. Leitch,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5),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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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Conzelmann, 1 Corinthians,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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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Thiselton,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636-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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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Thiselton,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635-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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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Conzelmann, 1 Corinthians, 14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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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Thiselton,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636-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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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Richard Bauckham, Jesus and the God of Israel: God Crucified and Other Studies on the New Testament’s Christology of Divine Identity (Grand Rapids: Eerdmans, 2009),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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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Bauckham, Jesus and the God of Israel, 10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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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James F. McGrath, The Only True God: Early Christian Monotheism in Its Jewish Context (Urbana and Chicago: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2009), 39-42. Perlego 판본. 고백의 추가와 분할의 구별은 39-40, 42쪽, 전치사와 대리자의 역할은 41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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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McGrath, Only True God, 44-48. 지혜와 하나님의 계획을 연결하는 해석은 44-46쪽, 선재한 지혜의 성육신과 지혜의 구현이라는 두 선택지 및 유대교적 대리의 범위는 46-48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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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Thomas Gaston and Andrew Perry, “Christological Monotheism: 1 Cor 8.6 and the Shema,” Horizons in Biblical Theology 39, no. 2 (2017): 176-196, 특히 182-185. 출판사 레코드. 개념적 연관과 본문의 재작성은 182-183쪽, 주라는 호칭의 논증은 184-185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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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Gaston and Perry, “Christological Monotheism,” 192-196. 두 지시 대상과 동일성 분석은 192-195쪽, 유일신 고백에 관한 결론은 196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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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Thiselton,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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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Irenaeus, Against Heresies 3.6.1, 공개 영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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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Irenaeus, Against Heresies 3.6.5. 확인한 ANF 영어 번역에서 아버지에 관한 첫 관계절의 뒤는 우리도 그를 통하여라는 형태다. SBLGNT의 우리는 그를 위하여라는 εἰς αὐτόν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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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John Chrysostom, Homilies on First Corinthians 20.5-6, 공개 영어 본문. 첫 창조와 믿는 사람이 됨은 20.5, 하나님과 주의 호칭 및 배타성 논증은 20.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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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Chrysostom, Homilies on First Corinthians 20.7. 성령의 생략을 청중과 우상 숭배 논쟁에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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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Basil of Caesarea, On the Holy Spirit 2.4, 공개 영어 본문. 이곳에 아에티오스의 편지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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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Basil, On the Holy Spirit 5.7-10. 로마서 11:36의 성자 해석과 상대의 성부 해석을 모두 사용하는 논증은 5.7-8, 고린도전서 1:9의 용례는 5.1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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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Thiselton,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631. 그는 이 긴 형태가 4세기보다 이른 자료는 아니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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