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교회의 은사와 섬김과 활동을 성령, 주, 하나님에게 연결한다. 다른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이 서로 다른 신적 근원에 속한다는 뜻이 되지 않도록, 매번 같다는 말을 반복한다. 이어 11절에서는 하나님에게 돌렸던 활동을 성령에게 돌린다. 교부들은 이 연결에 주목하여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논증했다.

이 글의 중심 본문은 4-6절이다. 그 의미를 살피기 위해 바로 앞의 3절과 뒤의 7-11절을 함께 읽는다.

은사의 다양성과 같은 근원

은사들은 여러 가지이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섬김도 여러 가지이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도 여러 가지이지만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고전 12:4-6, 필자 번역)

바울은 이 문장에 앞서 성령의 일을 분별할 기준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예수를 저주하지 않으며,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다(12:3). 따라서 5절의 주는 예수를 가리킨다. 성령의 활동과 예수의 주되심은 문단의 출발부터 연결되어 있다.

6절에는 아버지라는 호칭 없이 하나님이라고만 적혀 있다. 이를 성부로 읽는 데에는 같은 편지의 8:6이 근거가 된다. 바울은 그곳에서 한 하나님 아버지와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고백한다. 따라서 12:4-6의 성령, 주, 하나님을 성령, 성자, 성부로 읽는 것은 바울의 다른 표현을 함께 고려한 해석이다.

각 문장은 다양성과 동일성을 짝짓는다. 은사는 여러 가지여도 성령은 같고, 섬김은 여러 가지여도 주님은 같으며, 활동은 여러 가지여도 하나님은 같다. 직접적인 대조는 서로 다른 은사와 그 은사들을 주시는 같은 성령 사이에 있다. 바울은 은사가 다르다고 더 높은 성령이나 더 낮은 성령을 받은 것처럼 생각할 수 없게 한다.

그러므로 같다는 말의 반복만으로 성령과 주와 하나님이 구별 없이 같은 하나의 인격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는 없다. 각 문장에서 같다는 말이 비교하는 대상을 먼저 살펴야 한다.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에게 같은 성령이 계시고, 서로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같은 주님을 섬긴다는 것이 바울의 논지다.

여러 가지로 번역한 디아이레세이스(διαιρέσεις)는 다양성과 함께 나누어 줌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앤서니 티슬턴은 11절에서 성령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 할 때 같은 어근의 동사가 쓰인다는 점을 강조한다. 은사들의 차이는 사람들이 스스로 획득한 영적 지위의 차이보다 성령이 나누어 주신 선물의 차이로 이해된다.1

은사, 섬김, 활동도 서로 완전히 분리된 세 종류의 현상으로 나누기 어렵다. 은사는 받은 선물이라는 점을, 섬김은 주님을 위해 사용하는 일을, 활동은 하나님이 효과를 이루시는 일을 강조한다. 바울은 같은 공동체의 삶을 이처럼 연결된 여러 표현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과 성령이 이루시는 일

7절에서 바울은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나타남이 공동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밝힌다. 이어 지혜와 지식의 말, 믿음, 치유, 예언, 방언과 같은 은사들을 열거한다. 그리고 목록의 끝에서 말한다.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이루시며,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고전 12:11, 필자 번역)

여기서 6절과 11절이 연결된다. 6절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며, 11절에서는 성령이 이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다. 두 절의 동사는 에네르게오(ἐνεργέω)로 같다. 11절의 이 모든 것은 바로 앞에 열거한 은사들을 가리킨다. 은사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효과를 내는 일은 하나님과 성령 모두에게 귀속된다.2

바울은 성령과 주와 하나님을 나란히 언급하며, 같은 공동체에 주어진 은사의 활동을 하나님과 성령 모두에게 돌린다.

성령은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나누어 주시는 분으로 서술된다. 성령이 단지 신자들이 소유한 능력이라면, 성령이 각 사람에게 무엇을 줄지 결정한다는 문장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바울은 성령에게 활동과 의지를 돌리며, 은사를 받는 사람들과 성령을 구별한다.

의지를 나타내는 동사는 의인화에도 쓰일 수 있으므로 그 단어 하나가 후대의 위격 개념 전체를 확정하지는 않는다. 이 문단에서는 의지, 분배, 하나님의 활동과의 연결, 예수의 주되심에 대한 고백을 함께 보아야 한다. 여러 표현이 모여 성령을 교회의 삶을 일으키는 주체로 서술한다.

바실리우스: 분리할 수 없는 성령의 활동

바실리우스는 『성령론』 16.37에서 성령을 피조물의 자리에 놓으려는 주장에 맞서 이 본문을 읽는다. 그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예언을 듣는 사람이 하나님이 공동체 안에 계시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먼저 제시한다. 성령의 은사를 통해 드러나는 활동이 곧 하나님의 현존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이어 12:4-6과 11절을 함께 인용하여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의 활동에서 분리되지 않는다고 논증한다.3

그는 성령, 주, 하나님이라는 순서도 다룬다. 이 순서가 세 분의 지위를 거꾸로 배치한다고 보지 않고, 선물을 받는 사람이 분배자에서 보내는 분과 근원으로 생각을 이어 가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성령이 먼저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위계의 표지로 삼지 않는 것이다.

이 해석의 강점은 4-6절을 11절과 연결하고, 은사의 현현을 하나님의 활동과 함께 읽는 데 있다. 다만 선물을 받는 사람의 인식 순서라는 설명은 바실리우스가 덧붙인 해석이다. 바울은 자신이 세 호칭을 그 순서로 배열한 이유를 직접 밝히지 않는다.

암브로시우스: 공동 활동에서 본질의 일치로

암브로시우스는 『성령론』 II.12.140-142에서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는 표현을 강조한다. 그는 성령을 명령받아 움직이는 종으로 이해하는 견해에 맞서, 성령이 자신의 뜻으로 선물을 주신다고 논증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신다면 성령이 이루시는 일도 하나님의 일에 포함된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의지와 성령의 의지가 충돌한다고 볼 것인지, 일치한다고 볼 것인지를 묻는다.4

암브로시우스는 의지와 활동의 일치를 인정하면 본질의 일치도 인정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창조자는 그가 하시는 일을 통해 알려진다는 것이 그 연결의 근거다. 그는 본질과 능력의 일치를 주장하면서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유지한다.

이 논증에서는 바울의 진술과 교부의 추론이 만나는 지점을 볼 수 있다. 바울은 같은 은사의 활동을 하나님과 성령에게 귀속하며 성령의 뜻에 따른 분배를 말한다. 암브로시우스는 그 활동과 의지가 성령의 본질을 드러낸다고 읽는다. 활동의 일치에서 본질의 일치로 나아가는 데 이 신학적 판단이 들어간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여러 주체가 뜻을 모아 같은 결과를 낼 수 있다. 그러므로 공동 활동이라는 사실만으로 언제나 동일 본질이라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암브로시우스의 추론을 평가하려면 지금 논의하는 활동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고유한 활동이며, 성령이 거기에 어떻게 참여하시는지를 따져야 한다.

본문과 교부 해석을 함께 읽은 판단

바실리우스와 암브로시우스는 성령의 활동이 성령의 존재와 지위에 관하여 무엇을 알려 주는지 설명하려 한다. 바실리우스는 성령을 성부와 성자의 활동에서 떼어 놓기 어렵다고 논증하고, 암브로시우스는 의지와 활동의 일치를 본질의 일치와 연결한다. 같은 본문을 읽으면서도 강조하는 논증의 단계가 다르다.

티슬턴은 『교리의 해석학』에서 암브로시우스의 본질 언어가 바울의 표현을 넘어설 수 있다고 지적한다. 동시에 암브로시우스 자신은 바울의 함의를 풀어낸다고 이해했음을 설명한다.5 이 차이는 교부 해석을 평가할 때 중요하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밝히는 일과, 그 말이 전제하거나 함축하는 내용을 추론하는 일은 서로 관련되지만 동일하지 않다.

이 본문에 관한 나의 판단은 성령의 활동을 하나님의 활동과 분리하고 예수의 주되심과 무관하게 읽는 해석보다, 세 분의 관계를 함께 읽는 해석이 문단의 흐름을 더 잘 설명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하고, 그 주님을 섬기도록 은사를 나누어 주며,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 안에서 활동한다. 이 연결은 삼위일체 교리를 구성하는 데 실질적인 근거가 된다.

동일 본질이라는 결론은 이 연결을 설명하는 교리적 판단이다. 그 결론의 타당성을 충분히 논증하려면 은사를 주시는 일이 왜 신적 본질을 드러내는지, 하나님의 활동과 피조물의 활동을 어떻게 구분할지, 다른 본문들이 성령을 어떻게 서술하는지를 더 살펴야 한다. 고린도전서 12장은 그 논증을 시작할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한다.

바울의 권면도 이 신학적 설명과 함께 읽어야 한다. 같은 성령과 같은 주와 같은 하나님이 활동하신다면, 서로 다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그 차이를 영적 우월성의 근거로 삼기 어렵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은사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쓰인다. 세 분의 관계에 관한 고백은 이 공동체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을 뒷받침한다.

성경 번역은 Michael W. Holmes, ed., The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2010)을 기준으로 했다. SBLGNT, CC BY 4.0.

각주와 자료

  1. Anthony C. Thiselt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and Rapids: Eerdmans, 2000), 929-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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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hiselton,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933-935, 특히 934. 이 대목에서 Thiselton은 Neil Richardson의 분석을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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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Basil of Caesarea, On the Holy Spirit 16.37. 공개 영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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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Ambrose, On the Holy Spirit II.12.140-142. 의지와 활동에서 본질의 일치로 나아가는 문장은 142절에 있다. 공개 영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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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Anthony C. Thiselton, The Hermeneutics of Doctrine (Grand Rapids: Eerdmans, 2007), 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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