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절: 이름을 알리고 말씀을 전하신 아들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제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께 속해 있었고,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제게 주셨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이제 그들은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왔음을 알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말씀들을 제가 그들에게 주었고, 그들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제가 아버지에게서 나왔음을 참으로 알았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음을 믿었습니다.” (6-8절, 필자 번역)

자신의 영광을 구하신 예수께서 이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그들은 처음부터 아버지와 무관하게 예수만을 따른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버지께 속해 있었고, 아버지가 예수에게 주신 사람들이다. 아들의 사역과 아버지의 뜻은 같은 사람들을 향한다.

이름을 알렸다는 말씀은 4절에서 완수했다고 한 일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성경에서 이름은 한 사람을 가리키며 그의 권위와 그가 알려진 방식을 담는다. 톰프슨은 6절을 예수가 말씀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알리신 일로 읽는다. 이미 알려진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아들의 아버지로 알려지셨다는 설명이다.1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과 삶에서 그 아버지를 알게 되었다.

그 계시는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 아들에게서 제자들에게 전해진다. 7절은 예수가 가진 모든 것의 출처를 아버지에게 두고, 8절은 그 가운데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제자들이 받아들인 예수의 말씀은 아버지가 주신 말씀이다. 그들이 믿는 예수의 사명도 아버지가 보내셨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예수는 그들이 말씀을 지켰다고 평가하신다. 조금 전에는 그들이 흩어져 자신을 홀로 남겨 둘 것이라고 하셨다(16:32). 카슨은 제자들의 믿음을 예수를 거부하는 세상과 비교한다. 제자들은 그의 말씀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그를 따르는 길을 택했다는 점을 강조한다.2 그들에게는 여전히 실패와 두려움이 있으며,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신다.

9-10절: 아버지의 사람들이 아들의 사람들이 되다

“저는 그들을 위하여 구합니다. 세상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사람들을 위하여 구합니다. 그들이 아버지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제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서 영광을 받았습니다.” (9-10절)

예수는 기도의 대상을 한정한다. 지금 지켜 달라고 맡기는 이들은 예수를 믿고 그의 말씀을 받아들인 제자들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므로 아버지께서 그들을 돌보시기를 청한다. 이 기도에서 제자들의 보존은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관계에 근거한다.

세상을 위하여 구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 관계의 바깥을 드러낸다. 카슨과 레이먼드 브라운은 여기서 세상을 하나님과 예수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질서로 읽는다. 그들이 구원받으려면 그 거부를 계속 유지하는 세상으로 남을 수 없다는 해석이다.3 요한복음 3:16에서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을 말하고, 17:9에서는 예수를 거부하는 세상과 제자들을 대조한다. 같은 말이 기도의 문맥에서 더 날카로운 뜻을 가진다.

아버지가 제자들을 아들에게 주셨다고 해서 그들이 아버지의 것이기를 그친 것은 아니다. 6절의 아버지께 속해 있었다는 과거 진술이 9절에서는 지금도 아버지께 속한다는 진술로 이어진다. 톰프슨은 아버지를 주시는 분, 아들을 받으시는 분으로 구별하면서도, 두 분이 같은 사람들과 모든 것을 함께 가지신다고 설명한다.4

10절은 그 관계를 제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이라는 말로 넓힌다. 브라운은 9절의 사람들을 가리키던 남성 대명사가 10절에서 모든 것을 가리키는 중성 표현으로 바뀐 점에 주목한다.5 직접적인 문맥에는 제자들이 있지만, 아버지가 가지신 것이 아들의 것이라는 진술은 16:15의 모든 것과도 연결된다.

예수는 그 사람들 안에서 자신이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이 예수를 아버지에게서 오신 분으로 믿고 그의 말씀을 지킬 때 그분의 정체가 알려진다. 자신만의 추종자를 얻어 아버지의 사람들을 빼앗는 일이 아니다. 제자들이 아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버지가 보내신 분과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11절: 아들에게 주신 이름 안에서 지키심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제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그들을 지켜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하십시오.” (11절)

예수는 떠나실 때를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말씀하신다. 13절에서는 아직 세상에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신다고 하신다. 아버지께로 가심이 임박했기에 제자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보호받던 때를 뒤로하고 살아갈 일을 기도에 담으신다.

이름을 설명하는 관계절의 본문 형태는 해석에 영향을 준다. SBLGNT의 호(ᾧ)는 중성 단수이며 앞의 이름을 가리킨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대상이 이름이다. 일부 사본의 후스(οὓς)는 남성 복수로 제자들을 가리켜,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사람들을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지켜 달라는 뜻이 된다. 브라운은 이름을 가리키는 읽기를 택하며, 사람들을 가리키는 읽기가 앞선 2, 6, 9절의 반복에 맞춘 변화일 가능성을 설명한다.6

6절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알리셨고, 여기서는 그 이름을 자신이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톰프슨은 아들에게 주신 이름이 아버지라는 호칭일 수 없다고 보고, 하나님의 이름 YHWH를 가리키는 주, 곧 퀴리오스(κύριος)라는 호칭을 유력하게 제안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알려지시는 예수의 지위가 부자 관계의 하나 됨을 드러낸다는 해석이다.7

레이먼드 브라운은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사용하시는 나는 있다,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를 그 이름의 계시로 읽는다. 이사야 52:6과 출애굽기 3장의 이름 계시, 예수의 높아지심에서 그가 누구신지를 알게 되리라는 8:28을 함께 사용한다.8 톰프슨은 에고 에이미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표현하지만 그 자체가 정확한 이름은 아니라고 지적한다.7 11절에는 이름의 철자가 주어지지 않는다. 두 해석은 요한복음의 다른 호칭과 진술에서 그 이름을 구체화한다.

이름 안에서 지켜 달라는 요청에도 두 읽기가 있다. 이름의 권능으로 보호해 달라는 뜻일 수 있고, 그 이름이 알리는 하나님께 충실하게 머물도록 지켜 달라는 뜻일 수도 있다. 카슨은 6-8절에서 아버지의 계시를 받아들인 제자들의 믿음과 연결하여 후자에 무게를 둔다. 브라운은 하나님께 속한 영역과 이름의 보호 능력을 함께 읽는다.9

지키심의 목적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앞서 말씀하신 흩어짐(16:32)에 맞서, 그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알고 아들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로 함께 남아야 한다. 하나 됨은 개인들이 각자 안전하게 살아남는 일보다 넓다. 같은 아버지와 아들을 따르는 공동체의 존속을 구한다.

그 모형은 우리처럼, 곧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다. 리처드 보컴은 이를 유대교에서 한 하나님과 한 백성을 대응시키는 고백과 연결한다. 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한 공동체로 모인다는 대응은 하나님과 백성이 같은 방식으로 하나라는 뜻이 아니며, 예수는 자신과 아버지의 하나 됨에 상응하는 공동체를 구하신다는 설명이다.10 이 해석은 비교를 유지하면서도 부자 관계와 제자들의 관계를 한 종류로 합치지 않는다.

12-13절: 떠나심 앞에서 보존과 기쁨을 구하심

“제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제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그들을 지켰고 보호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멸망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그들이 제 기쁨을 자신들 안에 충만히 가지도록, 제가 세상에서 이 말씀들을 합니다.” (12-13절)

아버지께 청하시는 보존은 아들이 이미 수행한 일과 이어진다. 예수는 제자들을 지키고 보호하셨으며, 이제 아버지께서 지켜 주시기를 청하신다. 같은 이름과 같은 사람들이 두 분의 활동을 연결한다. 10:28-29에서도 양들이 아들의 손과 아버지의 손 안에서 지켜진다고 말씀하셨다.

유다는 그 보존 진술의 예외로 등장한다. 멸망의 아들은 그가 끝내 멸망에 속한 사람이 되었음을 표현한다. 톰프슨은 이 표현을 처음부터 멸망하도록 예정되었다는 뜻으로 읽지 않는다. 유다가 예수를 따르는 길에서 돌아섰으며, 그의 배반은 예수에게 뜻밖의 일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목적을 무너뜨리지도 않았다는 서사적 설명에 무게를 둔다.11

카슨은 유다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기신 사람들의 보존을 실패하게 한 예외라기보다, 처음부터 예수가 알고 계신 배반자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수는 그의 불신과 배반을 이미 아셨고, 성경의 성취도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는 해석이다.12 두 해석은 유다가 제자들의 보존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다르게 설명하지만, 그의 배반이 예수와 아버지의 뜻을 뒤집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성경 말씀의 성취는 13:18에서 인용한 함께 먹던 사람의 배신, 곧 시편 41:9와 연결하여 읽을 수 있다.11 성취의 언급은 배반의 현실을 예수의 사명 밖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실패로 놓아두지 않는다. 제자들의 보존에 관한 기도는 그 상실을 안고 드려진다.

이 기도를 듣는 제자들은 자신들이 아버지께 맡겨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카슨은 13절의 기쁨을 15:11의 기쁨과 연결한다.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물며 그분께 순종하시는 예수의 기쁨을 제자들이 함께 누리게 하려는 말씀이다.13 제자들은 예수의 떠나심과 세상의 미움 속에서도 이 사랑을 누리게 된다.

14-16절: 세상에 남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제자들

“제가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고, 세상은 그들을 미워했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듯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구하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일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시는 일입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듯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14-16절)

제자들이 받는 미움은 그들에게 주어진 말씀과 연결된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 말씀이 알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되었다. 15:18-19에서 예수는 세상이 자기에게 속한 것을 사랑하지만 자신이 택한 제자들을 미워한다고 설명하셨다. 같은 대립이 이 기도에 담긴다.

세상에 있다는 말과 세상에 속한다는 말은 다르다. 제자들이 생활하고 증언하는 장소는 여전히 세상이다. 그들의 소속과 충성을 결정하는 분은 아버지와 아들이다. 예수는 자신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도록 보호를 구하신다.

악한 자로 옮긴 투 포네루(τοῦ πονηροῦ)는 악이라는 추상적인 뜻으로도 읽을 수 있다. 브라운은 요한일서의 용례와 세상의 통치자에 관한 요한복음의 진술을 연결하여, 여기서는 악한 자를 가리킨다고 본다.14 예수는 자신이 떠난 뒤 제자들이 맞설 위협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제자들이 예수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의 과거가 예수의 과거와 같다는 뜻이 아니다. 6절에서는 그들이 세상에서 예수에게 주어진 사람들이라고 했다. 예수는 5절에서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분으로 말씀하셨다. 지금 같은 소속과 사명을 가진다는 비교 안에서도 그 관계에 이른 길은 다르다.

17-19절: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하여 보내심

“그들을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그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들도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되도록, 그들을 위하여 제가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17-19절)

예수는 제자들을 보호해 달라는 간구에 이어 거룩하게 해 달라고 청하신다.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부른 11절의 호칭이 이 요청과 연결된다. 제자들이 속한 분의 거룩함이 그들의 삶과 사명을 규정한다.

거룩하게 하다는 하기아조(ἁγιάζω)는 하나님을 섬기도록 구별하여 바치는 일을 가리킨다. 카슨은 요한복음의 성별을 사명과 연결한다. 10:36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거룩하게 하여 보내셨듯, 여기서는 제자들이 거룩하게 되어 세상에 보냄을 받는다.15 18절이 이 요청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들이 거룩하게 되는 곳과 근거는 진리이며, 그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이다. 6절에서는 말씀을 지켰고, 8절에서는 아들이 전한 말씀들을 받아들였으며, 14절에서는 그 말씀 때문에 미움을 받았다. 이제 그 같은 말씀 안에서 아버지의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들로 세워지기를 구한다. 사명의 내용과 그들의 삶을 빚는 근거가 함께 주어진다.

아들의 파송과 제자들의 파송은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신 것처럼이라는 비교로 이어진다. 아버지께 보냄을 받은 예수는 제자들을 보내는 분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19절은 그 비교 안에 다른 관계도 더한다. 예수의 자기 성별이 제자들의 성별을 이루는 근거다. 톰프슨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 제자들의 성별에 앞서며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차이를 강조한다.16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예수가 죄로부터 정결해져야 한다는 뜻보다 아버지의 사명에 자신을 바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맞다. 그들을 위하여라는 휘페르 아우톤(ὑπὲρ αὐτῶν)은 그 헌신이 누구를 향하는지를 밝힌다. 카슨과 브라운은 자기 생명을 양들을 위하여 내어놓는다는 10:11, 15:13과 연결하여, 이 자기 성별에 십자가의 자기 봉헌을 읽는다.17

톰프슨은 제사와 제사장의 성별에 쓰이는 같은 동사를 인정하면서도 이 단락에서는 사명을 위한 헌신을 더 강조한다.16 제자들은 예수의 자기 봉헌으로 세워져 그분이 보내시는 증인들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그 파송을 가능하게 한다는 설명과 사명을 강조하는 설명은 이 점에서 함께 읽을 수 있다.

교부들의 해석

크리소스토무스: 주고받음 안에서도 같은 존귀를 가지심

크리소스토무스는 『요한복음 강해』 81.1에서 이름을 알리심을 하나님에게 아들이 계심을 알리신 일로 설명한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아는 것과 아들의 아버지로 아는 것은 그 내용이 다르다는 해석이다.18

81.2에서는 아버지가 제자들을 아들에게 주셨다는 말을 두 분 사이의 소유권 이전으로 읽지 않는다. 아버지가 주신 뒤 그들을 잃거나, 아들이 그때 처음 그들에 대한 권한을 얻었다는 설명을 거부한다. 제 것은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이라는 상호 진술에서 두 분의 동등한 존귀를 읽는다.18

그는 이 상호성이 낮은 자의 것이 높은 자에게 속한다는 한 방향의 관계와 다르다고 논한다. 아버지의 것도 아들의 것이라는 역방향이 동등성을 설명한다.18 이 해석은 주셨다는 말을 보존하면서도 그 때문에 아들의 권한을 새로 생긴 낮은 지위로 읽는 결론을 막는다.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들을 가지시고 함께 지키시는 분들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강해』 107.2에서 거룩한 이성적 피조물들이 창조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속한다고 전제한다. 그 사람들이 아버지와 아들에게 함께 속하므로 아들은 아버지와 동등하시다는 논증이다.19 공동 소유를 동등성의 근거로 삼는 데에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주인이 창조주이시라는 판단이 들어 있다.

107.5에서는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요청을 제자들은 자신들의 본성 안에서 하나가 되고 성부와 성자는 신적 본성 안에서 하나라는 뜻으로 읽는다. 기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아버지와 하나이신 신성을 함께 사용한다.20 본문의 비교가 같은 본성에 관한 설명으로 발전한다.

107.6에서는 아들이 떠나신 뒤에야 아버지가 보존을 시작하시는 것으로 읽지 않는다. 두 분은 함께 지키셨고 아들이 육체의 현존을 거두신 뒤에도 함께 지키신다. 그는 성령도 이 하나님의 보존에 포함한다.20 그가 유지하는 것은 인격의 구별과 분리되지 않는 신적 활동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진리이신 말씀 안에서 거룩하게 됨

『요한복음 강해』 108.2-3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하심을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하심으로 읽는다. 예수가 자신을 진리라고 부르신 14:6과 서문의 말씀을 연결한다. 17:17의 말씀과 1:1의 말씀이 같은 로고스(λόγος)라는 사실도 근거로 사용한다.21

108.5에서는 자기 성별을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의 관계로 설명한다. 머리와 몸이 한 그리스도이므로 자신을 거룩하게 하심은 자신의 지체들을 자신 안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일을 포함한다. 인성도 하나님이신 말씀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21

이 해석은 아들의 자기 성별과 제자들의 성별을 긴밀하게 연결한다. 6, 8, 14절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의 계시와 가르침을 전하고 제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말씀을 서문의 인격적인 말씀과 연결하고, 바울의 머리와 몸의 관계로 제자들이 그 안에 참여하는 방식을 더 설명한다. 그 결과 성별의 사명이 성육신과 교회의 연합에 관한 해석으로 확장된다.

본문에서 내릴 수 있는 판단

이 단락에서 아들의 사명은 아버지에게 의존하며 제자들의 사명은 아들에게 의존한다. 아버지가 사람들과 말씀과 이름을 아들에게 주시고, 아들은 그 말씀을 전하며 그 사람들을 지키고 보내신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제자들이 누구에게 속하며 누구를 증언하는지 설명한다.

10절의 상호 소유는 일의 위임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진술이다. 아들에게 맡겨진 사람들은 계속 아버지의 사람들이면서 아들의 사람들이다. 아들의 것도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도 아들의 것이다. 16:15의 모든 것, 10:28-30의 공동 보존과 하나 됨을 함께 읽으면, 한 분이 멀리서 명령하고 다른 분이 한정된 권한으로 대행한다는 설명보다 두 분이 자신의 사람들을 함께 소유하고 지키신다는 설명이 더 잘 맞는다.

아버지의 이름을 받으신다는 말씀도 아들의 신적 지위를 뒷받침한다. 이 이름을 YHWH에 연결하는 톰프슨의 해석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을 설명할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름을 지니고 하나님의 권위를 대표한다는 말 자체에는 대리의 의미도 있을 수 있다. 브라운은 출애굽기 23:20-21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지닌 사자가 백성을 지키는 대목을 요한복음 17장과 비교한다.22 이름의 공유를 본질의 공유로 읽는 판단에는 이름을 가진 분이 누구신지에 관한 다른 진술도 필요하다.

요한복음에서 그 이름을 받으신 분은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누린 아들이며, 만물이 그를 통해 생겨난 말씀이다(17:5; 1:1-3). 이름의 공유와 공동 보존을 이 창조주의 지위와 함께 읽으면, 아들의 활동을 피조된 전달자의 활동으로 한정하기 어렵다. 교부들이 주장한 같은 신적 본성의 설명은 이 진술들을 한 하나님에 대한 고백 안에서 연결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구별되면서도 하나의 분할되지 않는 신성을 가지신다는 판단이다.

제자들의 하나 됨은 그 존재 관계를 그대로 복제하지 않는다. 제자들은 아버지의 이름과 아들의 말씀에 충실하게 남아 함께 증언하도록 지켜지는 사람들이다. 뉘고르는 그들의 새로운 삶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과 하나 됨에 참여하는 관계에서 생긴다고 설명한다.23 참여의 근거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고, 참여하는 이들은 그분들이 주시는 생명을 받는 사람들이다.

19절에서는 그 의존이 더욱 선명하다. 아들의 자기 봉헌이 제자들의 거룩하게 됨을 이루고, 제자들은 그 일에 근거하여 세상에 보내진다. 예수의 헌신과 제자들의 헌신에 같은 말이 쓰여도 두 헌신이 같은 효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아들은 자신을 바쳐 그들의 사명을 열고, 제자들은 그가 전한 말씀 안에서 그 사명을 수행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과 보존에 관한 이 기도는 그렇게 세상에 남을 제자들의 삶으로 이어진다.

성경 인용은 SBLGNT를 기준으로 옮긴 필자 번역이다. 요한복음 헬라어 본문. © 2010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and Logos Bible Software, CC BY 4.0.

각주와 자료

  1. Marianne Meye Thompson, John: A Commentary, NTL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351. Perlego 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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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Grand Rapids: Eerdmans, 1991), 558-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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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60-561; Raymond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AB 29A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8), 763-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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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Thompson, John,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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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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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59. 12절에도 이름을 가리키는 관계절의 비슷한 이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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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Thompson, John, 351 n. 173, 352-353. 에고 에이미에 관한 판단과 아들에게 주신 이름을 아버지로 읽기 어려운 이유는 173번 주에서, YHWH와 퀴리오스의 연결은 352-353쪽에서 논한다.

    본문 1 본문 2

  8. 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55-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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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62-563; 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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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Richard Bauckham, Jesus and the God of Israel: God Crucified and Other Studies on the New Testament’s Christology of Divine Identity (Grand Rapids: Eerdmans, 2009), 10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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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Thompson, John, 353-354, 특히 353 n. 180과 354의 성경 성취 설명.

    본문 1 본문 2

  12.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63-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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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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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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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65-566; 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61-762, 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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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Thompson, John, 354-355, 특히 354 n. 182의 성별과 사명, 355의 예수와 제자들 사이의 의존 관계.

    본문 1 본문 2

  17.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67; 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66-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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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John Chrysostom, Homilies on the Gospel of John 81.1-2, 요한복음 17:6, 10 해설, 공개 영어 본문.

    본문 1 본문 2 본문 3

  19.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107.2, 공개 영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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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Augustine, Tractates on John 107.5-6. 107.5에서 그가 인용한 11절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사람들이 보존의 대상이라는 본문 형태다. 이름을 주셨다는 SBLGNT의 관계절과 다르다. 107.6의 보존 논증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공동 활동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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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108.2-5, 공개 영어 본문. 진리와 말씀의 연결은 108.2-3, 머리와 몸 및 인성의 성별은 108.5다.

    본문 1 본문 2

  22. 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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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Mathias Nygaard, “John,” in Prayer in the Gospels: A Theological Exegesis of the Ideal Pray-er, Biblical Interpretation Series 114 (Leiden and Boston: Brill, 2012), 170-208, 특히 193. 출판사 장별 원문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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