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게 하십시오.’” (1절, 필자 번역)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다가 아버지께 말씀하신다. 앞에서는 제자들이 흩어져 자신을 홀로 남겨 둘 것이지만 아버지께서 함께 계신다고 하셨다(16:32). 이제 그 아버지를 부르며 자신의 영광을 구하신다. 제자들은 예수가 아버지께 무엇을 청하시는지 듣는다.
때가 왔다는 말은 죽음을 앞둔 기도의 성격을 정한다. 요한복음의 앞부분에서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한 때가, 12:23에서는 인자가 영광받을 때로 선언되었다. 예수는 그때를 피하게 해 달라고 청하지 않으신다. 카슨은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는 간구를 십자가와 부활, 아버지께로 높아지심을 함께 이루어 달라는 기도로 읽는다.1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할 일이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이 되는 사건이다.
아들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면서 그 목적을 아버지의 영광에 둔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시면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에게 말씀하고 행하시는 분들로 구별되지만, 한 분의 영광이 다른 분의 손실이 되지는 않는다. 예수의 죽음과 승리 안에서 아버지께서 누구신지도 알려질 것이다.
이 기도는 아들 자신의 영광만을 위한 기도로 끝나지 않는다. 마티아스 뉘고르는 1절과 5절의 영광에 관한 간구가 뒤따르는 제자들을 위한 간구의 근거라고 설명한다.2 아들이 영광받으시는 일에 제자들의 생명이 달려 있다.
2절: 받은 권한으로 영생을 주시는 아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2절)
2절은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는 기도를 아버지가 주신 권한과 연결한다.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문자적으로 모든 육체, 파세스 사르코스(πάσης σαρκός)다. 여기서 육체는 영과 대립하는 악한 본성이 아니라 인류를 가리킨다.3 아들의 권한은 제자들의 작은 무리에 한정되지 않는다.
아들은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받으시고,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신다. 그들을 가리키는 판 호(πᾶν ὃ)는 중성 단수로 전체를 묶어 말하고, 이어 그들에게라는 복수 대명사 아우토이스(αὐτοῖς)가 나온다. 아버지께 속한 사람들이 아들에게 맡겨지고, 아들이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다. 6:37과 10:27-29에서도 같은 관계가 설명된다.
권한을 주셨다는 말의 시점에 대해서는 주석가들의 판단이 다르다. 레이먼드 브라운은 예수가 지상 사역에서 이미 받은 권한으로 읽는다.3 카슨은 아들의 죽음과 높아지심을 내다보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에서 주어진 권한으로 읽는다.4 문장은 그 시점을 따로 밝히지 않고, 권한을 주신 목적을 영생의 수여로 설명한다. 받음은 아들의 사명이 아버지에게서 왔음을 나타내며, 그 사명을 수행하시는 분은 아들이다.
아들은 생명을 얻는 방법만 알려 주지 않으신다. 2절의 주체는 그가 영생을 주도록이라는 말에서 분명해진다. 죽은 사람을 살리고 원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5:21, 자기 양들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10:28의 약속이 이 기도에 모인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맡기신 권한은 사람의 최종 운명과 관계된다.
3절: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영생
“영생은 이것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3절)
3절은 앞에서 약속한 영생의 내용을 설명한다. 아버지와 그가 보내신 아들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 톰프슨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교제하는 삶 자체가 영생이라고 풀이한다.5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그 관계 안에서 생명을 누린다.
이 앎에는 믿음과 관계가 포함된다. 카슨은 예레미야 31:34의 하나님을 아는 새 언약 백성, 하박국 2:14의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과 이 말씀을 연결한다.6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모으는 것으로 이 앎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요한복음에서 아들을 믿는 이들이 생명을 얻고(3:16), 아들을 본 이들이 아버지를 알게 된다(14:7-9). 그들이 아는 하나님은 예수의 사역과 죽음, 부활에서 자신을 알리시는 분이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이 문장에서 아버지를 가리킨다. 헬라어의 세 톤 모논 알레티논 테온(σὲ τὸν μόνον ἀληθινὸν θεόν)은 당신을,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이라는 동격 표현이다. 이어지는 그리고는 아버지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같은 앎의 대상으로 연결한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이 구문에서 예수에게 직접 붙는 것은 아니다. 브라운도 이 절이 두 분을 같은 명칭으로 부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7
유일하심과 참되심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다른 신들과 구별하는 고백이다. 브라운은 이 표현의 성경적 배경과 우상 숭배에 대한 대조를 설명한다.7 톰프슨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두 명칭에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유일성과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함께 읽는다. 요한복음에서 그 메시아가 이루는 구원은 죽음에 처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일이다.8
이 문장은 아버지를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예수를 아는 일도 영생에 포함한다. 따라서 두 분의 구별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생명에서 예수의 역할을 제거할 수는 없다. 아들은 영생을 베푸시는 분이면서 그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 알아야 할 분이다.
여기서부터는 아버지의 유일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쟁점이 된다. 아버지만 신적 본성을 가지시고 아들은 그 본성 밖에 있다는 뜻으로 읽으면, 이 복음서에서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도마가 예수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대목(1:1; 20:28)과 충돌한다. 반대로 이 절의 명칭이 처음부터 성부와 성자를 똑같이 수식한다고 읽으면 문장의 실제 구별이 사라진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이라고 주로 부르는 아버지와 그가 보내신 아들을 구별하면서, 아들을 아버지의 생명과 계시에서 분리하지 않는다. 이 관계가 뒤의 교부 해석에서 동일 본질의 문제로 논의된다.
3절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복음서를 읽는 공동체의 고백과도 연결된다. 브라운은 이 절을 기도에 삽입된 교회의 고백적 설명으로 보고, 톰프슨도 부활 이후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언어가 이 기도에 반영되어 있다고 설명한다.9 카슨은 2절의 영생을 풀이하는 3절이 단락의 논증을 자연스럽게 이어 간다는 점을 강조한다.10 현재의 본문에서 이 고백은 예수의 기도 한가운데 놓여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삶을 설명한다.
4절: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심
“저는 아버지께서 제게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4절)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는 기도 다음에 아들이 이미 행한 일이 나온다. 예수는 땅에서 아버지가 맡기신 일을 수행하셨다. 표적을 행하고 말씀을 전하며 아버지가 누구신지를 알리셨다. 일의 출처는 아버지이며, 그 일을 완수하는 책임을 지신 분은 아들이다.
십자가를 앞두고 일을 완수했다고 말하는 것은 시간상 어려움을 낳는다. 지상 사역의 가르침과 표적만 완료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카슨은 죽음과 부활, 높아지심까지 포함하는 일을 이미 완수된 것으로 내다보는 진술이라고 해석한다.11 브라운도 아버지의 일이 온전히 완성되는 때를 수난과 부활, 귀환 전체에 두며, 이 기도가 그 완성 이후의 관점을 반영한다고 본다.12
예수의 사역에서 십자가를 떼어 놓으면 1절의 때와 4절의 완수가 멀어진다. 4:34에서 예수는 보내신 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 자신의 양식이라고 하셨고, 19:30에서는 죽음을 맞으며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다. 17:4은 그 끝을 확신하며 말하는 기도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맡기신 일을 끝까지 수행하심으로 아버지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세상에 알리실 것이다.
5절: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린 영광
“아버지, 세상이 있기 전에 제가 아버지 곁에서 누리던 영광으로 이제 아버지 곁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하여 주십시오.” (5절)
5절은 1절의 간구를 되풀이하며 어떤 영광인지를 밝힌다. 예수께서 구하시는 것은 세상에서의 사역에 대한 낯선 새 보상이 아니다. 자신이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이다.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한 일과 아버지 곁에서 아들이 영광받는 일이 서로 대응한다.
누리던으로 옮긴 에이콘(εἶχον)은 내가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 과거를 세상이 있기 전이라는 구절이 정하고, 아버지 곁에서라는 파라 소이(παρὰ σοί)가 그 관계를 설명한다. 가장 자연스러운 읽기는 지금 기도하시는 예수가 창조 이전에도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누렸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두 번 쓰인 곁에서라는 표현을 아버지와 아들의 창조 이전 교제와 연결한다.13
리처드 보컴은 17:5를 서문과 연결한다. 1:1-2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의 관계가 이 기도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서술된다. 그는 17:24의 창세 전 사랑도 함께 읽으며, 아들이 성육신 때 처음 아들이 되었다는 설명보다 영원히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계셨다는 설명을 지지한다.14 여기서 기도하는 분과 세상 이전에 영광을 누린 분은 같은 나다.
이전의 영광을 구한다는 말이 성육신 동안 영광을 잃었다는 뜻인지는 별개의 쟁점이다. 카슨은 아들이 성육신에서 내려놓은 영광의 찬란함으로 돌아가기를 구하신다고 설명한다. 그 귀환에서도 성육신은 취소되지 않으며, 부활하신 예수는 몸을 버리고 돌아가시는 분이 아니다.15
톰프슨은 영광의 지속을 더 강조한다. 예수는 창조 전에 영광을 가지셨고, 육신이 되어 그 영광을 나타내셨으며, 십자가와 아버지께로 돌아가심에서도 같은 영광을 나타내신다. 사람들의 눈에 그 영광이 가려질 수는 있어도 예수가 그것을 내어준 때는 없다는 해석이다.16
요한복음은 육신이 되신 말씀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하고(1:14), 가나의 표적에서도 예수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고 말한다(2:11). 그러므로 영광이 전혀 없는 지상 생애에서 영광이 있는 생애로 바뀐다고 읽기는 어렵다. 지상 사역에서 드러난 바로 그 영광이 죽음과 부활을 거쳐 아버지 곁에서 온전히 드러나는 것이다. 5절의 간구에는 사역 이전과 이후를 잇는 아들의 정체, 그리고 실제로 죽음을 통과하여 높아지시는 사건이 함께 있다.
교부들의 해석
크리소스토무스: 유일하심이 배제하는 대상
크리소스토무스는 『요한복음 강해』 80.2에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신이 아닌 존재들을 배제한다고 읽는다. 요한복음 5:44에서도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므로, 유일하심을 아들을 배제하는 말로 읽으면 아들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논증이다. 그는 예수가 진리라고 불린다는 사실도 연결한다.17
그는 같은 강해에서 5절의 간구를 아들의 육신이 영광받는 일로 설명한다. 아직 썩지 않음과 왕좌의 영광에 참여하지 않은 인성이 영광받기를 구한다는 것이다.18 아들이 가진 신적 영광과 성육신한 삶이 영광받는 사건을 구별하여, 이미 영광스러운 분이 왜 영광을 구하시는지 설명한다.
유일하심이 거짓 신들을 배제한다는 읽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고백과 맞는다. 다만 그 읽기만으로 아들이 참 하나님 안에 포함된다는 결론까지 모두 나오지는 않는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아들을 하나님과 진리로 고백하는 다른 진술들을 함께 사용한다. 그의 설명은 3절의 한정어를 복음서 전체의 기독론 안에서 해석한 결과다.
힐라리우스: 영생을 함께 이루시는 아버지와 아들
힐라리우스는 『삼위일체론』 9.28에서 아버지의 유일한 신성을 근거로 아들의 참된 신성을 부정하는 해석을 소개하고 반박한다. 그의 답변은 3절을 앞선 말씀들과 연결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내주, 아버지에게서 나오심, 서로를 영광스럽게 하심, 아들이 생명을 주시는 권한이 그 근거다.19
9.32-36에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영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어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참으로 나신 분이면 아버지의 참된 신적 본성을 가지신다고 논한다. 하나의 하나님에게서 종류가 다른 신이 나올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20
이 논증에는 두 근거가 결합되어 있다. 본문은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일을 영생으로 묶고, 힐라리우스는 그 구원 관계를 같은 본성을 전하는 참된 나심으로 설명한다. 예수가 하나님을 알려 주는 역할만 한다는 해석에 맞서, 생명을 주시는 능력과 아버지에게서의 기원을 아들의 존재에 관한 진술로 읽은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3절의 재배열과 5절의 예정된 영광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강해』 105.3에서 3절을, 아버지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알게 되는 것이라는 순서로 풀어 쓴다. 성령도 성부와 성자의 영으로서 이 고백에 포함된다고 설명한다.21
헬라어에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아버지를 설명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아는 일 전체에 적용하고, 원문에 언급되지 않은 성령까지 포함한다. 세 분이 한 하나님이라는 고백에 따라 수식 범위를 재배열한 해석이다.
5절에서는 예상과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105.6-8에서 그는 창세 전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인성에 미리 정해진 영광으로 읽는다. 에베소서 1:4에서 신자들이 창세 전에 선택되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인간적 삶과 영광도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었다는 설명이다.22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말씀은 시작과 끝 없이 이미 하나님으로 계신 분이고, 예정의 대상은 시간 안에서 취하신 인성이다.22 이 구별은 영광받는 인성이 소멸하거나 신성으로 변환된다는 해석도 막는다.22
그의 해석에서는 내가 가졌다는 말에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가졌다는 뜻이 보충된다. 5절에는 예정이라는 말이 없다. 기도하시는 나가 아버지와 함께 실제로 누린 과거의 영광을 회상한다는 읽기가 더 직접적이다.
본문에서 내릴 수 있는 판단
이 기도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구별되며, 아들은 아버지에게 의존한다. 아버지는 권한과 사람들, 수행할 일을 주신 분이고, 아들은 그 일을 완수하고 영광을 구하시는 분이다. 동시에 아들은 영생을 주시며 아버지와 함께 영생의 앎에 포함되고,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누리셨다. 의존과 높은 신적 지위가 같은 기도 안에 서술된다.
3절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아버지라는 직접적인 진술로 읽는 것이 문법에 맞는다. 이 진술을 아들에게는 참된 신성이 없다는 결론으로 확대하면 아들의 신성과 창조 활동을 서술하는 1:1-3,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20:28을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수식어를 재배열하지 않아도, 아들을 아는 일이 아버지를 아는 영생에 포함된다는 연결은 원문에 이미 있다.
5절은 아들의 선재와 창세 전 부자 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근거다. 그것을 동일 본질에 관한 판단으로 연결하는 데에는 서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1:3은 말씀을 만물이 생겨난 근거로 서술하고, 그를 생겨난 만물에 포함하지 않는다. 이 창조자의 지위와 17:5의 창세 전 영광을 함께 읽으면, 아들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높은 대리자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영광을 공유한다는 표현 하나만으로 본질이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17:22에서는 제자들도 예수가 주시는 영광을 받는다. 아들은 창조 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누렸고, 만물은 그를 통해 생겨났다. 제자들은 세상 가운데서 아들이 주시는 생명과 영광을 받는 사람들이다. 같은 영광이라는 말이 쓰여도 그 영광과 맺는 관계는 서로 다르다.
동일 본질이라는 설명은 이 본문들을 함께 읽으며 한 하나님, 구별되는 아버지와 아들, 아들의 온전한 신성을 동시에 말하려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와 독립된 별개의 신이라면 하나님의 유일성이 흔들린다. 아들이 피조물이라면 말씀의 창조 활동과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설명되지 않는다. 교부들은 구별되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의 분할되지 않는 신적 본성을 가지신다고 설명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나신다는 관계는 그 구별과 같은 신성을 함께 표현한다. 그 설명에는 참된 나심이 본성을 전한다는 판단과 하나님의 본성은 분할되거나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도 들어 있다.
요한복음 17:1-5은 그 존재 관계를 교리의 용어로 정의하는 대신, 죽음을 앞둔 아들의 기도로 서술한다. 아들은 아버지께 영광을 구하며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일을 말씀하신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누리던 영광은 그들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살아가게 하는 구원의 일과 연결된다.
성경 인용은 SBLGNT를 기준으로 옮긴 필자 번역이다. 요한복음 헬라어 본문. © 2010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and Logos Bible Software, CC BY 4.0.
각주와 자료
-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Grand Rapids: Eerdmans, 1991), 553-554.
-
Mathias Nygaard, “John,” in Prayer in the Gospels: A Theological Exegesis of the Ideal Pray-er, Biblical Interpretation Series 114 (Leiden and Boston: Brill, 2012), 170-208, 특히 192. 출판사 장별 원문 페이지.
-
Raymond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AB 29A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8), 740-741.
-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54-555.
-
Marianne Meye Thompson, John: A Commentary, NTL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349. Perlego 판본.
-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56; 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52-753.
-
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41, 752.
-
Thompson, John, 350.
-
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41; Thompson, John, 350.
-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55-556.
-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56-557.
-
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41-742.
-
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42, 753-754.
-
Richard Bauckham, “The Trinity and the Gospel of John,” in The Essential Trinity: New Testament Foundations and Practical Relevance, ed. Brandon D. Crowe and Carl R. Trueman (London: Apollos, 2016), EPUB 판, 제4장 중 “Eternal Son?” 절. 전자책 위치:
OEBPS/Text/ET_chap04.xhtml#sigil_toc_id_21. -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54, 557.
-
Thompson, John, 350-351.
-
John Chrysostom, Homilies on the Gospel of John 80.2, 요한복음 17:3 해설, 공개 영어 본문.
-
Chrysostom, Homilies on John 80.2, 요한복음 17:4-5 해설.
-
Hilary of Poitiers, On the Trinity 9.28-31, 공개 영어 본문.
-
Hilary, On the Trinity 9.32-36.
-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105.3, 공개 영어 본문.
-
Augustine, Tractates on John 105.6-8. 창세 전 선택과 인성의 예정은 105.7, 말씀의 시작 없는 신성과 인성의 예정의 구별은 105.8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