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절 앞부분: 더 이상 묻지 않을 날
“그날에는 여러분이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입니다.” (23절 앞부분, 필자 번역)
제자들은 예수가 잠시 보이지 않다가 다시 보이실 것이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16:16-19). 예수께서는 그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리라고 약속하셨다. 해산하는 여인이 고통을 겪은 뒤 새 생명의 탄생을 기뻐하듯, 제자들도 예수를 다시 만나 기뻐할 것이다(16:20-22). 그 약속에 더 이상 묻지 않을 날이 이어진다.
묻다는 에로타오(ἐρωτάω)는 질문에도 부탁에도 쓰인다. 따라서 이 말은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해 질문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 수도 있고, 예수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뜻일 수도 있다. 카슨은 두 가능성을 검토하고, 레이먼드 브라운은 앞선 17-19절의 질문과 연결하여 이해에 관한 약속으로 읽는다.1 제자들은 지금 예수의 떠나심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만, 그날에는 그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이어지는 구절에는 아버지께 구하라는 약속이 나온다. 26절에서도 제자들은 그날에 기도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 말을 모든 간구가 끝난다는 뜻으로 읽기는 어렵다. 문맥상 예수의 떠나심과 다시 보게 됨에 관한 혼란이 해소된다는 뜻이 자연스럽다. 마티아스 뉘고르는 이 변화를 부활과 성령의 가르침에 연결한다. 제자들이 예수의 정체를 이해하게 되므로 지금과 같은 질문을 반복하지 않게 된다는 설명이다.2
23절 뒷부분과 24절: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고 받음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아버지께 무엇이든 구하면,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구하십시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기쁨이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23절 뒷부분-24절)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과 함께 기도에 관한 약속이 시작된다. 앞에서 사용한 에로타오 대신 구하다는 아이테오(αἰτέω)가 나온다. 두 동사의 뜻은 서로 겹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앞의 질문과 뒤의 간구를 문맥이 구별한다.
23절의 내 이름으로는 어디에 연결되는지가 쟁점이다. 이 글의 기준 본문인 SBLGNT에서는 그 표현이 주실 것입니다 뒤에 놓인다. 위 번역은 그 어순을 따라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으로 주신다고 옮겼다. 레이먼드 브라운도 이 읽기를 택한다. 다른 본문 형태에서는 내 이름으로가 주신다는 동사 앞에 놓여, 아들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읽기가 더 자연스럽다.3 24절과 26절은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구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 단락에는 아들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와 아들의 이름으로 베푸시는 아버지의 응답이 함께 있다.
아들의 이름은 기도하는 사람과 응답하시는 아버지를 연결한다. 브라운은 제자들이 예수와 연합하여 구하고, 아버지도 예수와 하나이시므로 그 이름으로 주신다고 설명한다.4 기도하는 사람은 아들과 무관한 자격을 내세우지 않고, 아버지의 응답도 아들이 이루시는 일과 떨어져 있지 않다.
지금까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는 말은 제자들이 한 번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기 어렵다. 예수는 지금과 그날을 대조하고 계신다. 자신의 죽음과 부활 이후 제자들이 아버지께 나아갈 관계가 열릴 것이다. 뉘고르는 아들의 이름으로 구함을 예수와 제자들의 연합으로 설명하며, 그들이 기도할 때 예수가 일하신다고 말한다.5
그 결과가 충만한 기쁨이다. 앞에서 예수는 자신을 다시 보게 될 때 아무도 빼앗지 못할 기쁨을 약속하셨다(22절). 여기서는 기도하고 받는 일이 그 기쁨을 채운다. 뉘고르는 예수의 오심에서 시작된 기쁨이 제자들의 기도와 응답 가운데 계속된다고 읽는다.6 제자들은 예수가 떠나신 뒤에도 아버지가 자신들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25절: 아버지를 분명하게 알리실 때
“내가 이 일들을 여러분에게 비유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비유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분명하게 알려 줄 때가 옵니다.” (25절)
비유라고 옮긴 파로이미아(παροιμία)는 상징적이거나 뜻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말을 가리킨다. 앞에는 포도나무와 가지, 해산하는 여인의 비유가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어려움은 그 이미지들을 풀이하는 일보다 깊다. 예수가 어떻게 떠나시며 그 떠나심이 왜 유익한지 알지 못하고 있다.
카슨은 비유와 분명한 말의 대조를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전의 이해와 이후의 이해 사이에서 읽는다. 십자가와 부활이 일어난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이 무엇을 가리켰는지 깨닫는다.7 같은 말씀도 사건을 겪고 나서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예수께서 분명히 알려 주실 대상은 아버지다. 23-24절의 기도 약속 다음에 아버지를 아는 약속이 놓인다. 톰프슨은 이 말씀을 성령이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이라는 약속과 연결한다. 제자들의 이해는 예수의 말씀이 더 명료해지는 데서만 생기지 않고, 성령이 그들 가운데 일하시는 데서도 생긴다는 설명이다.8 25절의 화자는 예수지만, 앞선 보혜사 약속에 비추어 보면 성령의 가르침 안에서 예수의 계시가 계속된다.
26-27절: 아버지께서 친히 사랑하신다
“그날에 여러분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나를 사랑하였고, 내가 하나님에게서 나왔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26-27절)
예수는 아버지께 기도하는 제자들 앞에 자신이 어떤 역할로 계시는지 설명하신다. 제자들의 부탁을 자신이 먼저 받아 아버지께 전달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 까닭은 아버지께서 친히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예수가 간청하여 마지못해 얻어 내야 하는 호의가 아니다.
카슨은 이 말씀이 아버지께 나아가는 일을 예수가 제한하거나, 사랑이 없는 아버지를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을 배제한다고 설명한다. 아들의 사명 자체가 이미 세상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에게서 시작되었다(3:16).9 뉘고르도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노여움을 누그러뜨릴 전달자가 필요한 상황으로 읽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직접 구한다.5
그렇다고 예수의 역할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바로 같은 절에서 제자들은 내 이름으로 구하리라는 말씀을 듣는다. 이 복음서에서 아버지께 이르는 길은 여전히 예수이며(14:6), 예수는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성령을 구하신다(14:16). 26절은 제자들의 기도를 가로막는 거리를 줄인다. 그들이 아들의 이름으로 부르는 분은 이미 그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다.
레이먼드 브라운은 예수를 아버지와 자녀들 사이에 끼어 있는 별개의 제삼자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이 말씀의 핵심이라고 본다. 예수와 제자들의 친밀한 연합 때문에 그들의 기도는 예수의 기도와 연결된다.10 여기서 아들의 중보는 아버지의 사랑을 대신하지 않는다. 아들은 제자들을 그 사랑 안으로 이끄신다.
27절은 아버지의 사랑에 이유를 붙인다. 제자들은 예수를 사랑하였고, 그가 하나님에게서 오셨음을 믿었다. 이 사랑을 인간이 먼저 얻어 낸 보상으로만 읽으면 요한복음 3:16에서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의 사랑과 맞지 않는다. 여기서는 아들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버지와 누리는 관계가 설명된다. 14:21, 23에서도 예수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을 아버지가 사랑하신다고 했다.
사랑하신다는 동사는 필레오(φιλέω)다. 요한복음은 같은 관계를 말하는 14:21, 23에서 아가파오(ἀγαπάω)를 사용한다.11 따라서 두 동사에 서로 다른 등급의 사랑을 배정하면 이 연결을 놓치게 된다. 27절에서 강조되는 것은 사랑의 등급보다 아버지 자신이 제자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톰프슨은 이 약속을 14:13-14의 기도 응답과 나란히 읽는다. 거기서는 예수가 행하시고 여기서는 아버지가 주시지만, 두 분의 상호 내주와 뜻의 일치 때문에 서로 다른 응답을 주시는 분들로 상상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12 제자들에게 열리는 기도는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에 의존한다.
28절: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께로 가심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습니다. 이제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갑니다.” (28절)
28절은 예수의 오심과 떠나심을 한 문장에 담는다. 아버지에게서 나옴, 세상에 옴, 세상을 떠남, 아버지께로 감이 이어진다. 처음과 끝에는 아버지가 계시고 그 사이에는 세상에서의 사역이 놓인다. 카슨은 이 문장을 아들의 파송과 성육신, 세상에서의 떠나심과 아버지께로의 귀환을 아우르는 요약으로 읽는다.13
이 문맥에서 아버지는 예수가 세상에 오신 뒤 처음 맺게 된 관계의 이름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예수는 아버지에게서 오셨고 그분께로 돌아가신다. 13:3에서도 서술자는 예수가 하나님에게서 나와 하나님께로 가신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고 말한다. 세상에서의 사역 전후를 같은 예수의 이야기로 연결하는 서술이다.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표현만 떼어 놓으면 파송의 권위를 가리킬 수도 있다. 세례 요한 역시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1:6). 28절에는 그 표현에 세상에 들어오심과 아버지께로 돌아가심이 결합된다. 예수가 세상에서 활동하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는 읽기가 이 왕복의 서술을 가장 잘 설명한다.
아버지에게서라는 말에는 에크(ἐκ)가 쓰인다. 그러나 에크 자체가 아버지의 본질에서 태어나셨다는 뜻을 확정하지는 않는다. 27절에는 파라(παρά), 30절에는 아포(ἀπό)가 쓰이며 모두 예수의 출처를 말한다. 레이먼드 브라운은 28절을 성육신과 사명의 문맥에서 읽고, 에크라는 전치사만으로 아들의 영원한 존재 관계를 정의하는 해석에 반대한다.14
문장의 직접적인 관심도 예수가 세상에 오셨다가 떠나시는 일에 있다.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첫 절구를 영원한 나심으로 읽으면, 뒤의 세상에 왔다는 절구와 서로 다른 두 사건을 구별하게 된다. 문장 전체를 파송과 귀환으로 읽으면, 앞의 두 절구는 아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에 이르렀는지 설명한다. 문맥상 후자가 더 자연스럽다. 예수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보다, 자신이 누구에게서 와서 누구에게로 가는지를 제자들에게 알리고 계신다.
제자들은 이어지는 29-30절에서 이제 분명히 알겠으며 예수가 하나님에게서 오셨음을 믿는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곧 흩어져 자신을 홀로 남겨 둘 것이라고 답하신다(31-32절). 그들의 고백은 바른 대상을 향하지만 그 뜻을 다 이해하고 견뎌 낼 준비까지 갖춘 것은 아니다. 28절의 출처 고백은 이후의 수난과 부활을 지나 더 깊어질 믿음의 출발점이다.
교부들의 해석
크리소스토무스: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나아가는 담대함
크리소스토무스는 『요한복음 강해』 79.1-2에서 제자들이 예수를 눈앞에서 보지 못해도 그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담대히 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사도행전 4:29-31의 기도를 실제 사례로 연결한다.15 제자들의 기도는 예수의 부재 때문에 힘을 잃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에 관한 말씀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품으신 호의가 아버지께도 있음을 알리는 위로로 읽는다. 25절의 분명한 가르침은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때와 연결한다.15 이 해석은 제자들이 떠나신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면서 아버지의 친구로 살아갈 수 있다는 데 초점을 둔다.
아우구스티누스: 간구하시는 그리스도와 응답하시는 그리스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강해』 102.1에서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을 그 이름의 소리를 발음하는 것과 구별한다.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구원에 합당한 것을 구하는 기도가 그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다.16
102.4에서는 아버지께 청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사람이신 점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하나님이신 점에서 아버지와 함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17 아버지가 한 장소에 계시고 아들이 다른 장소에서 말을 전달하는 그림 대신, 같은 신성을 가지신 두 분이 함께 응답하신다는 설명이다. 이 해석은 그리스도의 중보와 신적 지위를 함께 보존한다.
102.6에서 아버지에게서 나오심은 그분에게서 존재하심으로, 세상에 오심은 육신을 취하여 나타나심으로 읽는다. 예수는 인성으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올라가셨지만 신적 현존으로 세상을 계속 다스리신다.18 같은 문장의 오심과 떠나심을 신성과 인성에 따라 풀어내는 해석이다.
힐라리우스: 나오심과 오심을 구별하여 나심을 논증하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는 『삼위일체론』 6.31에서 하나님에게서 나오심과 세상에 오심에 각각 다른 뜻을 부여한다. 전자는 하나님의 본성을 가진 아들로 나심을, 후자는 구원을 위하여 육신으로 세상에 나타나심을 가리킨다는 해석이다.19 두 표현을 구별하는 것이 그의 논증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6.33-34에서는 제자들이 이미 예수의 파송을 알고 있었으므로, 29-30절의 새로운 확신은 그 이상의 깨달음이어야 한다고 논한다. 제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에게서 나신 분이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다는 것이다.20 그는 제자들의 고백을 아들의 신적 본성에 대한 고백으로 읽는다.
6.35는 그 나심을 하나님의 본질이 분할되거나 줄어드는 사건과 구별한다. 아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이며, 그 나심은 무에서 새 존재가 생겨난 시작과 다르다.21 같은 본성을 가지는 나심이라는 설명에 하나님의 불변성과 영원성을 결합한 논증이다.
이 해석은 예수의 출처가 그분의 정체와 관계된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다룬다. 다만 제자들이 29-30절에서 신적 나심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읽는 부분은 뒤따르는 예수의 응답과 긴장을 이룬다. 예수는 그들의 확신 직후에 흩어짐을 예고하신다. 나오심과 오심을 서로 다른 두 사건으로 배정하는 것도 28절의 출발과 도착, 떠남과 귀환이라는 대응보다 힐라리우스의 나심과 성육신의 구별에 더 의존한다.
본문에서 내릴 수 있는 판단
이 단락은 제자들이 아버지께 직접 나아가도록 아들이 길을 여시는 관계를 서술한다. 아버지께서는 제자들을 친히 사랑하고,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한다. 아들의 중보와 아버지의 직접적인 사랑은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예수를 사랑하고 믿는 이들은 그분이 오신 아버지와 관계를 맺는다.
14:13-14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기도를 자신이 이루겠다고 하셨고, 16:23에서는 아버지가 주신다. 아들의 이름은 양쪽 약속을 연결한다. 제자들이 아버지께 직접 구할 수 있다는 말씀과 아들 자신이 그 기도를 이루신다는 약속이 함께 성립한다. 여기서 아들은 제자들의 말을 전달하는 역할만 맡지 않으신다. 아버지와 함께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28절은 아들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계셨다는 선재 해석을 뒷받침한다. 영원한 부자 관계에 대한 더 명시적인 근거는 세상이 있기 전 아버지와 함께 누린 영광과 창세 전의 사랑을 말하는 17:5, 24에 있다. 리처드 보컴은 이 두 구절을 서문과 연결하여, 성육신이 이미 계신 아들의 영원한 관계를 드러낸 사건이라고 논증한다.22
영원한 나심은 그 관계를 한 단계 더 설명한다. 아들이 아버지와 영원히 함께 계신다는 사실에 더하여, 아버지에게서 같은 신적 본성을 가지신다는 관계를 말한다. 힐라리우스는 28절의 나오심을 그 관계의 표현으로 읽었다. 그의 논증을 이끄는 근거는 전치사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참으로 나신 아들이 같은 본성을 가지며 하나님의 본성은 분할되거나 변하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요한복음 16:23-28의 역사문법적 해석은 아들의 파송과 선재,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베푸시는 사랑과 응답을 설명한다. 교부들은 이 관계를 같은 신성을 가진 분들의 관계로 읽으며 중보와 동등성, 오심과 영원한 나심을 함께 해명했다. 본문이 직접 약속하는 열매는 제자들의 기도와 기쁨이다. 아버지에게서 오셨다가 돌아가시는 아들은 자신이 떠난 뒤에도 제자들이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살도록 하신다.
성경 인용은 SBLGNT를 기준으로 옮긴 필자 번역이다. 요한복음 헬라어 본문. © 2010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and Logos Bible Software, CC BY 4.0.
각주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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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Grand Rapids: Eerdmans, 1991), 545-546; Raymond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AB 29A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8), 722-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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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hias Nygaard, “John,” in Prayer in the Gospels: A Theological Exegesis of the Ideal Pray-er, Biblical Interpretation Series 114 (Leiden and Boston: Brill, 2012), 170-208, 특히 190. 출판사 장별 원문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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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23; Nygaard, “John,” 190 n. 104. 뉘고르도 주심에 연결하는 읽기를 논하며, 그 읽기가 응답의 근거를 예수와 아버지의 관계에 둔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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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33-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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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gaard, “John,” 190.
-
Nygaard, “John,”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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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46-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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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nne Meye Thompson, John: A Commentary, NTL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344. Perlego 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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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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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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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24.
-
Thompson, John,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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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47-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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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24-725. 27절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읽거나, 28절의 첫 절구를 생략하는 본문도 있다. 이 글은 SBLGNT의 하나님, 첫 절구를 포함한 긴 본문을 따른다. 카슨도 긴 본문을 우선한다.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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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Chrysostom, Homilies on the Gospel of John 79.1-2, 요한복음 16:23-28 해설, 공개 영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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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102.1, 공개 영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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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ine, Tractates on John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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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ine, Tractates on John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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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lary of Poitiers, On the Trinity 6.31, 공개 영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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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lary, On the Trinity 6.33-34.
-
Hilary, On the Trinity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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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Bauckham, “The Trinity and the Gospel of John,” in The Essential Trinity: New Testament Foundations and Practical Relevance, ed. Brandon D. Crowe and Carl R. Trueman (London: Apollos, 2016), EPUB 판, 제4장 중 “Eternal Son?” 절. 전자책 위치:
OEBPS/Text/ET_chap04.xhtml#sigil_toc_id_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