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절: 제자들의 증언으로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저는 이들만을 위하여 구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통하여 저를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도 구합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세상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음을 믿게 하여 주십시오.” (20-21절, 필자 번역)
아버지께 제자들의 보존과 성별을 구하신 예수께서 이제 그들의 증언으로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18절에서 세상에 보내신 제자들의 사명이 이 사람들의 믿음으로 이어진다. 예수의 말씀을 받았던 사람들이 그 말씀을 전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증언을 통하여 예수를 믿는다.
믿게 될 사람들로 옮긴 피스튜온톤(πιστευόντων)은 헬라어에서 현재 분사다. 레이먼드 브라운은 마지막 식사의 장면에서는 앞으로 믿을 사람들을 가리키고, 복음서 저자의 시점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1 복음서의 독자들은 예수의 기도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발견한다. 그들은 예수의 사역 현장에 없었어도 제자들의 증언으로 그를 믿는 사람들이다.
톰프슨은 이 기도가 시간이나 장소의 거리 때문에 예수를 직접 보거나 듣지 못한 모든 신자를 포함한다고 읽는다. 그들은 제자들의 증언과 기록된 복음서, 성령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를 알고 그의 현존을 경험하며, 예수께서 지키시는 한 무리에 속한다.2 예수의 기도는 당시의 제자들과 뒤에 믿는 사람들을 한 공동체로 연결한다.
그들을 위하여 구하시는 것은 모두의 하나 됨이다. 그 모형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시는 관계다. 11절의 우리처럼이라는 비교가 여기서는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진술로 구체화된다. 예수는 아버지께 말씀하시는 분이며,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신 분이다. 서로 구별되는 두 분의 관계가 신자들의 하나 됨에 앞서 있다.
이어지는 요청은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SBLGNT는 이 두 번째 요청에 하나라는 헨(ἕν)을 반복하지 않는다. 일부 사본은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형태로 읽는다. 브라운은 두 형태 모두 신자들의 하나 됨을 하나님 안에 머무는 관계로 발전시킨다고 설명한다.3 첫 요청이 서로의 연합을 말한다면, 다음 요청은 그 연합을 아버지와 아들 안에 둔다.
카슨은 그 관계를 15장의 포도나무와 가지에 연결한다. 신자들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의존하여 생명과 열매를 얻고, 받은 계시에 함께 순종하며 서로를 위하여 사랑하고 일하는 사람들이다.4 그들의 연합은 예수를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에 뿌리를 둔다.
이 연합은 세상을 향한다. 예수는 그들이 하나로 살아갈 때 세상이 자신의 보내심을 믿게 되기를 구하신다. 13:35에서는 제자들의 서로 사랑함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누구의 제자인지 알게 된다고 하셨다. 여기서는 그들의 연합이 예수를 보내신 아버지를 알리는 증언이 된다.
22-23절: 주어진 영광과 세상을 향한 증언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영광을 제가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셔서, 그들이 온전히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세상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으며, 저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도 사랑하셨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2-23절)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영광을 아들은 신자들에게 주셨다. 아버지가 주셨다는 동사와 아들이 주셨다는 동사는 모두 완료형이다. 브라운은 아들이 받은 영광과 신자들이 받은 영광이 계속 그들에게 속한다는 점을 읽는다.5 예수는 하나 됨을 청하는 기도에 그 하나 됨을 위하여 자신이 주신 선물도 더하신다.
이 영광을 어떻게 설명할지에는 차이가 있다. 카슨은 예수가 하나님의 성품과 정체를 알리는 일을 완수하여 신자들에게 전한 영광으로 읽는다. 기도에서 자신의 일을 완수했다고 하신 것처럼, 여기서도 십자가에서 이루실 계시까지 완수한 일로 말씀하신다는 설명이다.6 브라운은 부활과 높아지심 뒤에 주어진 영광을 복음서 저자가 이미 받은 선물로 서술한다고 읽는다.5 같은 완료형을 두고 카슨은 기도 안의 선취적 표현에, 브라운은 복음서가 기록된 시점에 무게를 둔다.
톰프슨은 하나님의 현존이 나타나는 영광과 존귀, 명성이 함께 담겼다고 본다. 예수께서 세상에 자신을 알리도록 보내신 제자들의 사명에는 그의 존귀가 걸려 있으며, 그들은 예수 안에서 그의 생명과 영광, 하나님과의 연합을 지금 누리고 앞으로도 누린다는 설명이다.7 이 영광은 증언하는 사람들이 예수와 맺은 관계와 그들의 삶에 관한 선물이다.
23절은 그 관계를 제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신다는 말로 설명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이 신자들에게 이르고, 그들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데 목적을 둔다. 테텔레이오메노이 에이스 헨(τετελειωμένοι εἰς ἕν)은 하나 됨이 완성된 상태를 가리킨다. 브라운은 그 연합이 세상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신자들이 이 삶에서 이루어 갈 연합으로 읽는다.8
세상이 알게 될 내용은 두 가지다. 아버지가 예수를 보내셨다는 사실과, 아버지가 예수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사실이다. 23절에서 사랑받는 이들은 20절부터 기도의 대상인 신자들이다. 세상은 그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알게 될 대상으로 따로 등장한다. 신자들의 삶이 예수의 보내심과 자신들에게 이른 아버지의 사랑을 함께 알린다.
브라운은 세상이 알게 되리라는 목적을 모든 사람의 믿음을 예고하는 말로 읽지 않는다. 신자들의 증언이 예수의 사역처럼 믿음과 거부의 결정을 요구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계기가 된다고 본다.9 톰프슨은 세상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으로 응답해도 제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며 생명을 전하는 사명을 계속한다는 점을 강조한다.10 목적을 말하는 기도와 세상의 실제 응답 사이에는 이 긴장이 있다.
게르트 말란은 이 기도의 하나 됨을 당시 요한 공동체의 결속으로 설명한다. 공동체는 주변의 종교 집단과 다른 그리스도인 집단에 맞서 자신의 신앙과 삶을 유지했고, 아버지와 예수의 연합을 그 결속의 모형으로 사용했다는 해석이다. 그는 새 구성원이 이 공동체에 들어오는 과정도 논하며, 이 본문에서 현대 교회의 조직이나 신앙고백을 통합하라는 명령을 도출하는 해석에 반대한다.11
이 설명은 세상과 신자들 사이의 대립, 공동체의 결속과 증언을 받는 새 신자들의 참여를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놓는다. 다만 말란이 구별한 경쟁 집단들은 복음서 전반에서 재구성한 대상들이다. 이 단락은 그 집단들의 이름을 열거하지 않고, 제자들의 증언으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연합의 목적도 공동체의 존속과 함께 세상의 믿음과 앎을 포함한다. 여기서 신자들의 경계는 예수에 관한 증언을 받아들이는 믿음에 있으며, 그 증언은 그 경계 밖의 사람들을 향한다.
24절: 창세 전에 사랑받으신 아들의 영광을 보게 하심
“아버지, 제게 주신 사람들이 제가 있는 곳에서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제 영광을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저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4절)
예수는 이제 자신의 뜻을 원합니다라는 텔로(θέλω)로 밝히신다. 그 뜻은 아버지가 주신 사람들이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다. 카슨과 브라운은 이를 아버지의 뜻과 일치하는 아들의 뜻으로 읽고, 14:2-3에서 제자들을 데려가 함께 있게 하겠다고 하신 약속과 연결한다.12 세상에 남아 증언하는 삶과 예수와 함께할 소망이 이 기도 안에서 이어진다.
제게 주신 사람들이라는 첫 구절은 SBLGNT에서 중성 단수 호(ὃ), 곧 제게 주신 것으로 시작한다. 뒤의 그들도는 복수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일부 사본은 첫 구절도 사람들을 가리키는 남성 복수로 바꾼다. 카슨과 브라운은 중성 단수가 사람들을 하나의 집합으로 묶어 가리키는 요한복음의 용법을 설명한다.13 예수가 함께 있기를 원하시는 이들은 아버지가 그에게 맡기신 사람들 전체다.
그들은 예수의 영광을 보게 된다. 22절에서는 영광을 주셨다고 했고, 여기서는 자신의 영광을 보게 하기를 원하신다. 뉘고르는 주어진 영광과 앞으로 보게 될 영광 사이에 별개의 영광을 구별하는 표시가 없다고 읽으며, 예수가 자신에게 속한 것을 신자들에게 주신다는 점을 강조한다.14 카슨은 지금 계시를 통하여 알려진 영광과 장차 가리지 않은 찬란함으로 보게 될 아들의 영광을 구별한다.15 같은 아들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진술과 그 영광을 보는 방식의 차이가 함께 있다.
그 영광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다. 받았다는 관계는 이 단락에서 계속 유지된다. 예수는 아버지를 향하여 말씀하시며, 자신에게 영광을 주신 분을 아버지로 밝히신다. 영광을 주신 까닭은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이다. 브라운은 이 사랑을 5절의 창세 전 영광과 지상의 사명에 함께 연결한다.16
사랑하신 대상은 지금 기도하시는 예수 자신이다. 5절에서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을 청하신 분이, 여기서는 그때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신다. 톰프슨은 사랑이 처음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규정했고, 그 사랑이 이제 제자들 안에 머물러 그들을 세상으로 보낸다고 설명한다.17
25-26절: 알려진 아버지와 신자들 안에 머무는 사랑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했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았고, 이들은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렸고, 앞으로도 알리겠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25-26절)
예수는 의로우신 아버지를 부르며 세상과 자신과 제자들의 앎을 구별한다.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했고, 예수는 아버지를 알았으며, 제자들은 아버지가 예수를 보내셨음을 알았다. 제자들의 앎은 아버지를 아시는 예수와 그의 보내심을 통하여 생겼다. 브라운은 의로우시다는 호칭을 제자들의 앎과 세상의 무지를 판단하시는 아버지에게 연결한다.18
그 앎은 이름의 계시에서 왔다. 6절에서는 예수가 아버지의 이름을 알리셨다고 했고, 여기서는 알렸으며 앞으로도 알리겠다고 말씀하신다. 카슨과 브라운은 아버지께로 가신 뒤에도 보혜사를 통하여 이어질 계시를 이 미래 표현에 연결한다.19 14:26에서는 보혜사가 예수가 하신 말씀을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시며, 16:13-15에서는 예수에게 속한 것을 받아 제자들에게 알리신다고 했다.
이 계시의 목적은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자신이 신자들 안에 머무는 것이다. 23절에서는 그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었고, 26절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된다. 카슨은 이 사랑이 서로를 사랑하는 삶과 각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함께 포함한다고 풀이한다.20 신자들은 아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된다.
마지막 말은 저도 그들 안에 있다는 것이다. 떠나심을 앞두고 드린 기도가 신자들 안에 머무시는 예수의 현존으로 끝난다. 브라운은 이를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이 이스라엘 가운데 머물던 언약의 표현과 연결한다.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신자들에게 주어지고, 예수 자신이 그들 안에 계신다는 설명이다.21 그들은 떠나신 예수에 관하여 말하는 증인들이면서 그가 함께 계신 공동체다.
교부들의 해석
크리소스토무스: 인간의 연합과 아들의 나심
크리소스토무스는 『요한복음 강해』 82.2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따르는 신자들의 연합을 인간에게 가능한 일치로 읽는다. 그들이 하나라는 말에는 아버지와 아들을 믿는 믿음이 담기며, 세상 사람들은 제자들의 평화를 보고 그들이 평화의 하나님에게서 배웠음을 알게 된다는 해석이다. 22절의 영광에는 기적과 가르침, 한마음으로 사는 일이 포함되며, 그는 그 평화를 기적보다 더 강한 증언으로 평가한다.22
24절에서 영광을 주셨다는 표현을 읽을 때에는 다른 논증을 제시한다.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낳고 한동안 영광 없이 두셨다가 나중에 영광을 주셨다는 순서를 거부한다. 영광을 주셨다는 말을 아들을 낳으셨다는 관계로 설명하여,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나신 때와 영광을 가진 때를 갈라놓지 않는다.23 여기에는 아들의 신적 나심과 영광을 함께 이해하는 전제가 있다. 24절 자체는 사랑이 창세 전에 있었음을 말하며, 영광의 수여를 나심과 같은 의미로 풀이하는 것은 그 전제에 따른 해석이다.
아타나시우스: 본성의 하나 됨과 성령을 통한 참여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파 반박』 3.20-23에서 성부와 성자의 하나 됨을 신자들의 관계에 맞추어 낮추는 해석에 답한다. 아들은 본성상 아버지 안에 계시고, 신자들은 그 관계를 모형으로 삼아 뜻과 사랑에서 하나가 된다고 설명한다. 비교를 나타내는 말은 모든 면의 동일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요나가 사흘 동안 큰 물고기 안에 있었던 일과 예수의 죽음을 비교하는 마태복음 12:40을 예로 든다.24 사흘이라는 비교는 유효하면서도 요나와 예수의 존재와 일을 같게 만들지 않는다.
3.24-25에서는 이 참여를 성령의 선물로 설명한다. 요한일서 4:13의 성령을 주셨으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진술을 사용한다. 아들은 성령을 받아서 비로소 아버지와 연결된 분이 아니라 성령을 주시는 분이며, 신자들은 그 성령을 받아 아들과 아버지 안에 있게 된다는 논증이다.25 모방에 관한 설명이 성령을 통하여 실제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설명으로 깊어진다.
이 해석에서 본성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신자들의 믿음이나 성장과 같은 조건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을 담는다. 신자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관계는 선물을 받아 이루어진다. 아타나시우스는 그 차이를 17장의 비교 문구와 요한일서의 성령 진술을 연결하여 설명한다.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본질, 부활의 영광과 완성된 앎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강해』 110.1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심을 같은 본질에 근거한 하나 됨으로 읽는다. 신자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며, 창조주 안에 있는 피조물이다. 성육신한 아들의 인성은 우리와 같은 본질을 가지지만, 아버지와 함께 하나님이신 아들의 신성을 신자들의 본성에 포함하지 않는다.26 그가 사용하는 같다는 말은 신성과 인성에 서로 다른 대상을 연결한다.
22절의 영광은 110.3에서 부활한 인성이 받을 불멸성으로 풀이한다. 예수는 자신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을 이미 주어진 일로 말씀하신다는 해석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요한복음 5장의 공동 생명 수여와 2:19의 예수 자신의 부활 진술에 연결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활동을 분리할 수 없는 활동으로 설명한다.27 영광의 의미와 공동 활동에 관한 그의 논증에는 이 다른 본문들이 함께 쓰인다.
110.2, 4에서는 21절의 믿음과 23절의 앎을 지금의 믿음과 장차 완성될 직접적인 앎으로 읽는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믿음으로 화해된 사람들이다. 111.6에서도 이름을 이미 알리셨다는 말은 믿음으로 아는 현재를, 앞으로 알리시겠다는 말은 직접 보는 미래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28 세상이 제자들의 연합을 보고 믿게 된다는 현대 주석의 선교적 설명과 초점이 다르다. 21, 23절에서 신자들의 연합과 세상의 응답을 각각 말하는 구조는 그 두 대상을 구별하여 읽을 근거이며, 26절의 미래는 보혜사의 계속되는 가르침으로도 설명된다.
창세 전 사랑과 동일 본질
이 단락의 연합에는 주시는 분들과 받는 사람들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안에 계시며, 신자들은 두 분 안에 있게 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영광을 주시고, 아들은 신자들에게 그 영광을 주신다. 신자들이 같은 사랑과 영광을 누린다는 사실은 그 참여가 얼마나 깊은지를 말한다. 그 영광을 나누어 주시는 아들의 존재 관계를 신자들의 존재 관계와 같은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아들의 관계는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으로 거슬러 간다. 24절은 영광을 받은 시점을 밝히지 않으며, 사랑받았다는 표현 자체에는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사랑받았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에베소서 1:4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신자들도 그들이 존재하기 전부터 사랑하셨다고 설명한다.29 그 설명에서 신자들은 창세 전에 예정된 사랑의 대상이다. 예수는 5절에서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가졌다고 말씀하신다. 이 창세 전 영광과 함께 읽을 때 24절의 사랑은 아버지와 함께 계신 아들의 관계를 서술한다.
동일 본질의 해석에는 요한복음 서문의 창조 진술이 더해진다. 만물이 말씀을 통하여 생겼고, 생긴 것 가운데 그 없이 생긴 것은 없다고 했다(1:3). 말씀을 만들어진 것에 포함하면 그 말씀 자신의 존재도 그의 활동으로 생겼다는 모순이 생긴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하나님이시고(1:1), 육신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로 알려진다(1:14, 17-18). 17장의 아들은 그 아버지와 창세 전 영광과 사랑을 누리신 분이다. 이 연결은 아들을 피조된 전달자에 한정하는 해석보다 창조주의 지위에서 읽는 해석을 뒷받침한다.
같은 인간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여럿 있다는 사실과,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신적 본질을 가지신다는 주장은 같은 종류의 하나 됨을 말하지 않는다. 인간들은 같은 종에 속하면서도 각자의 생명을 가지는 사람들이다. 동일 본질의 신학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독립된 두 신성을 배정하는 대신, 한 하나님의 분할되지 않는 신성을 말한다. 이 판단에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17:3의 고백과, 아들의 창조주의 지위를 함께 유지한다는 전제가 있다. 본성이라는 말은 이 두 진술의 관계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보컴은 17:11, 22의 비교를 한 하나님과 한 백성을 대응시키는 유대교적 고백으로 읽는다. 하나님과 백성의 하나 됨은 종류가 다르며, 아버지와 아들은 한 하나님의 고유한 정체성 안에 서로 구별되면서 분리할 수 없는 관계로 계신다는 설명이다.30 이 해석은 아들의 신적 지위를 신자들의 결속에 맞추어 낮추지 않고, 신자들의 연합이 그 하나님에게서 생긴다는 비교를 유지한다.
아버지에게서 받는다는 관계도 계속 유지된다. 24절의 아들은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독립하여 가진 영광으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가 주신 영광으로 말씀하신다. 크리소스토무스가 이를 나심으로 풀고, 아타나시우스가 본성의 관계로 설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등한 신적 지위에 관한 그들의 판단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없애는 판단이 아니라, 그 관계 안에서 아들이 피조물처럼 뒤늦게 신성을 얻는 분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판단이다.
성령은 이 기도에서 이름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성령을 통한 참여라는 아타나시우스의 설명에는 요한일서 4:13이 쓰이고, 이름의 계속되는 계시를 보혜사에게 연결하는 해석에는 요한복음 14:26과 16:13-15가 쓰인다. 이 단락이 직접 서술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과 영광이 신자들에게 이르고, 예수와 그 사랑이 그들 안에 머무는 관계다. 신자들은 그 관계 안에서 서로 하나로 살며 세상에 예수를 증언하고, 마침내 그와 함께 그의 영광을 보는 소망을 받는다.
성경 인용은 SBLGNT를 기준으로 옮긴 필자 번역이다. 요한복음 헬라어 본문. © 2010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and Logos Bible Software, CC BY 4.0.
각주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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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nne Meye Thompson, John: A Commentary, NTL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355-356. Perlego 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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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69-770. 두 번째 목적절의 하나라는 말의 포함과 생략을 비교하며, 앞의 요청을 발전시키는 내주 관계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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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Grand Rapids: Eerdmans, 1991), 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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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pson, John, 356-357, 특히 356 n. 184와 357 n. 185. 영광의 존귀와 명성이라는 뜻과 실제 참여를 함께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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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pson, John, 356-357. 세상의 응답과 제자들의 선교, 하나님의 계속되는 사랑에 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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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t J. Malan, “Does John 17:11b, 21-23 refer to church unity?” HTS Teologiese Studies / Theological Studies 67, no. 1 (2011), a857, 1-10, 특히 8-9. 출판사 공개 원문, DOI. 8쪽에서 새 구성원의 참여와 공동체 결속을, 9쪽에서 17장의 재맥락화와 교회 연합에 관한 결론을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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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69-570; 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72, 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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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70; 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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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Chrysostom, Homilies on the Gospel of John 82.2, 요한복음 17:20-23 해설, 공개 영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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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ysostom, Homilies on John 82.2-3, 요한복음 17:24 해설. 영광을 주심과 나심의 연결은 82.2, 아들의 영광을 보는 일은 82.3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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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hanasius, Discourses Against the Arians 3.20-23, 공개 영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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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hanasius, Discourses Against the Arians 3.24-25. 요한일서 4:13, 15를 사용하여 신자들의 내주와 성령의 선물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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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110.1, 공개 영어 본문. 확인한 NPNF 영어 번역의 21절 인용은 두 번째 목적절에도 하나라는 말을 넣는다. SBLGNT는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달라는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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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ine, Tractates on John 110.3. 22절의 영광을 불멸성으로 읽으며 성부·성자·성령의 분리할 수 없는 활동을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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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ine, Tractates on John 110.2, 4;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111.6, 111강해 공개 영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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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ine, Tractates on John 110.5-6. 신자들을 창세 전부터 사랑하심과 아들의 신성 및 인성을 사랑하심을 함께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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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Bauckham, Jesus and the God of Israel: God Crucified and Other Studies on the New Testament’s Christology of Divine Identity (Grand Rapids: Eerdmans, 2009), 104-106. 한 하나님과 한 백성의 대응은 104-105쪽, 구별되면서 분리할 수 없는 부자 관계는 105-106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