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떠나시는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십시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나도 믿으십시오.” (1절, 필자 번역)

제자들은 예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을 들었다. 베드로는 그분이 가시는 곳에 지금은 따라갈 수 없다는 대답을 받았고,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다짐 뒤에는 세 번 부인하리라는 예고를 들었다(13:33-38). 14장은 이 불안 속에서 시작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믿으라고 하신다.

믿으라는 동사 피스튜에테(πιστεύετε)는 형태상 명령으로도, 믿고 있다는 진술로도 읽힌다. 브라운은 앞부분을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진술로, 뒷부분을 예수도 믿으라는 권면으로 옮긴다. 카슨은 두 동사를 모두 명령으로 읽는다. 위 번역은 마음이 흔들리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청하는 문맥을 따라 카슨의 읽기를 택했다.1

어느 구문으로 읽어도 예수는 하나님과 나란히 믿음의 대상으로 제시된다. 제자들은 눈앞에 계신 예수의 떠남 때문에 불안해하지만, 예수께서는 바로 자신을 신뢰의 근거로 주신다. 그 신뢰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아버지의 집에 관한 약속이 설명한다.

2-4절: 함께 있을 자리를 준비하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여러분을 위해 자리를 준비하러 간다고 여러분에게 말했겠습니까? 내가 가서 여러분을 위해 자리를 준비하면 다시 와서 여러분을 내게로 데려가겠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 여러분도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가는 곳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2-4절)2

예수의 떠남에는 제자들을 위한 목적이 있다. 아버지의 집에는 그들이 거할 곳이 있으며, 예수께서는 그들을 맞을 자리를 준비하러 가신다. 거할 곳을 뜻하는 모네(μονή)는 머물며 사는 곳이다. 많다는 말은 제자들을 받아들일 자리가 충분하다는 약속이다.

예수께서는 다시 와서 제자들을 자신에게로 데려가겠다고 하신다. 약속의 목적은 내가 있는 곳에 여러분도 있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에 담겨 있다. 떠남으로 끊어질 것처럼 보였던 관계가 함께 거하는 관계로 이어진다. 카슨은 이 대목을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제자들을 영원히 자신과 함께 있게 하시는 약속으로 읽는다. 자리를 준비하는 일도 십자가와 부활을 거쳐 아버지께 가시는 사건과 연결한다.2

4절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그 길을 안다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떠남과 다시 오심, 함께 있을 곳에 관한 약속을 들었다. 그들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도마의 질문에서 드러난다.

5-7절: 아버지께 가는 길

도마가 말했다.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그분을 알고, 그분을 보았습니다.” (5-7절)

도마는 목적지를 모르면 길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길이라고 답하신다. 그 길의 목적지는 아버지다.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 아버지께 오며, 예수가 누구신지를 아는 데서 아버지를 알게 된다.

길과 진리와 생명은 문장에서 나란히 예수를 서술한다. 도마가 길을 물었고, 예수의 답변 후반도 아버지께 오는 일을 말하므로, 여기서는 길이라는 표현이 대화의 중심이다. 카슨과 브라운은 진리와 생명이 예수께서 어떻게 길이 되시는지 설명한다고 읽는다. 예수는 아버지를 알리시는 진리이며, 아버지의 생명을 사람들에게 주시는 분이다.3

이 설명은 예수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분을 떠나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을 제시하지 않는다. 예수 자신을 통해 아버지께 오는 관계다. 6절의 아무도라는 말은 그 관계의 필수성을 강조한다. 아버지를 알고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일은 예수와 분리되어 이루어지지 않는다.

7절은 제자들이 예수를 알았더라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SBLGNT가 채택한 이 읽기에는 그들이 아직 예수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다른 전승에는 예수를 알게 되었다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형태가 있다. 카슨은 그 읽기를 더 유력하게 보며, 브라운은 위 번역과 같은 조건문을 택한다.4

이어지는 이제부터 여러분은 그분을 알고 보았다는 말은 제자들의 무지에 대한 책망과 함께 놓인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알아 온 그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앎이 주어졌다고 선언하신다. 오랜 동행 속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제자들은 아직 다 깨닫지 못하고 있다.

8-9절: 빌립보가 보고자 한 아버지

빌립보가 말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에게 충분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빌립보, 내가 이렇게 오래 여러분과 함께 있었는데도,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합니까?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말합니까?” (8-9절)

빌립보는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한다. 예수를 통해 아버지를 안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그에게는 아직 따로 보아야 할 아버지가 계신다. 카슨과 브라운은 이 요청을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구했던 출애굽기 33장의 장면과 비교한다. 하나님을 직접 뵙는 일이 제자들의 갈망을 채워 줄 것이라는 기대다.5

예수의 대답은 자신과 함께 지낸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빌립보는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이 행하시는 일을 보았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고 물으신다. 부족했던 것은 예수를 볼 기회가 아니라, 자신이 본 예수가 누구신지에 대한 앎이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은 예수 안에서 아버지를 실제로 만난다는 주장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자신과 구별하여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본 것과 아버지를 본 것을 연결하신다.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라고 하신 6절은 여기서 아버지를 알 수 있는 근거에 관한 설명이 된다. 예수와 함께 지낸 제자들은 이미 그분 안에서 아버지의 계시를 접했다.

10-11절: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하시는 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머무시는 아버지께서 자신의 일들을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나의 말을 믿으십시오. 그렇지 못하겠거든 그 일들 때문에라도 믿으십시오.” (10-11절)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의 근거를 서로 안에 계신다는 관계에서 설명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예수 안에 머무시며 자신의 일을 하신다. 예수의 말도 스스로 만들어 낸 말이 아니다. 제자들이 예수에게서 들은 말씀과 본 일들에는 아버지가 계신다.

10절 앞에서는 말을 언급하고, 뒤에서는 일을 언급한다. 브라운은 이를 같은 것을 두 번 말한 문장보다 말씀과 활동을 함께 제시한 문장으로 읽는다. 아버지에 관한 계시는 예수가 전하는 가르침과 실제로 행한 일 모두에 담겨 있다. 11절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설명을 믿기 어려우면 그 일들을 보고 믿으라고 하신다. 그 일들은 말로 설명한 관계를 드러낸다.6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는 방향이 있다. 예수의 말씀과 일은 아버지에게서 비롯되며, 아버지가 아들에게서 말씀을 배운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동시에 아버지는 예수에게 일을 맡겨 보내신 뒤 떨어져 계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예수 안에 머무시며 자신의 일을 하신다. 예수께서 자신이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이 밀접한 관계의 한 부분이다.

브라운은 이 관계를 설명할 때 보낸 이의 권위를 대표하는 대리자 개념을 활용한다. 예수께서는 앞서 자신이 보내는 사람을 영접하면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고, 자신을 영접하면 자신을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3:20). 이때 제자들도 보내신 분을 대표한다. 브라운은 예수의 경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가 더해져 본성의 유사성도 함축한다고 설명한다. 카슨 역시 대리자 개념으로 말씀과 활동의 출처를 설명하면서도, 아들이 아버지의 모든 일을 한다는 주장에서는 아들의 고유한 지위가 나타난다고 평가한다.6

12절: 믿는 이들이 행할 더 큰 일

“내가 여러분에게 진실로 말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들을 그도 할 것이며, 이보다 더 큰 일들도 할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입니다.” (12절)

대화는 예수께서 행하시는 일에서 그분을 믿는 사람들이 행할 일로 이어진다. 제자들은 예수의 일을 믿음의 증거로 보았고, 이제 그 일을 자신들도 하리라는 약속을 받는다. 약속의 대상은 나를 믿는 사람이다. 눈앞에 있는 제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지만, 표현 자체는 예수를 믿는 이들을 넓게 포함한다.

더 큰 일들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께서 아버지께 가시기 때문이다. 카슨과 브라운은 이를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이루어질 사역과 연결한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영광을 알리고, 그분이 주시는 생명을 사람들에게 전하게 된다. 카슨은 더 크다는 말을 기적의 규모나 사역의 수량보다 예수의 사역이 완성된 뒤의 상황에서 설명한다. 브라운도 부활 이후 제자들이 예수의 생명과 심판의 활동에 참여하는 점을 강조한다.7

예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보다 더 놀라운 기적을 모든 신자가 행한다는 해석은 이 문맥에 잘 맞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더 큰 일을 하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들의 활동은 예수가 아버지께 가시는 사건에 달려 있다. 제자들이 이어 갈 사역에는 떠나시는 예수의 활동이 계속 필요하다.

13-14절: 아들이 이루시는 기도

“여러분이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 내가 그것을 이루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 이름으로 내게 무엇을 구하면 내가 이루겠습니다.” (13-14절)

제자들이 행할 일에 이어 예수께서 두 번 내가 이루겠다고 약속하신다. 제자들의 활동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예수의 활동과 연결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가신 뒤에도 그들이 맡은 일을 이루실 분이다.

14절에는 내게라는 대명사 메(με)가 있다. SBLGNT는 이 단어를 본문에 포함하며, 카슨과 브라운도 포함된 읽기를 지지한다. 이를 따르면 제자들이 구하는 대상은 예수 자신이다. 내게가 없는 전승에서는 기도의 대상이 이 절에 명시되지 않지만, 그 기도를 이루는 분은 여전히 예수다.8

내 이름으로 구한다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와 맺는 관계를 나타낸다. 브라운은 예수와의 연합을, 카슨은 예수의 이름이 나타내는 뜻과 사명에 맞는 기도를 강조한다. 13절은 응답의 목적도 밝힌다.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제자들의 기도와 사역은 예수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에 참여한다.9

제임스 D. G. 던은 요한복음의 기도 언어에서 아버지께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일과 예수께 직접 구하는 일을 연결한다. 두 경우 모두 예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공통점을 지적한다.10 이 단락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시며, 아버지께 가신 뒤에도 제자들의 요청을 듣고 이루시는 분이다.

교부들의 해석

이레네우스: 아들이 알리시는 아버지는 창조주다

이레네우스는 『이단 논박』 IV.6에서 예수가 알려 준 아버지를 창조주와 다른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견해에 반박한다. 그는 말씀께서 창조와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같은 하나님을 알려 오셨고, 보이고 만질 수 있게 되신 아들 안에서 아버지가 드러나셨다고 설명한다. 아들을 보는 것과 아버지를 아는 관계는 그에게 창조와 구원의 연속성을 설명하는 근거다.11

IV.6.6에서 그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보이는 아들 안에서 알려진다고 설명한다. 아들의 나타나심을 통해 알게 되는 아버지는 이전에 세계를 지으시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다. 이레네우스의 설명은 예수의 계시와 구약의 하나님을 연결한다. 그의 논증은 아들이 알리시는 아버지가 창조주라는 점을 밝힌다.

크리소스토무스: 같은 본질이기에 아버지를 알리신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요한복음 강해』 74.1에서 빌립보가 예수를 육체의 눈으로 보면서도 그분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은 아들의 본질을 아는 사람이 아버지의 본질도 안다는 뜻으로 읽는다. 아버지와 아들은 구별되지만, 아들 안에서 알게 되는 신성은 아버지의 신성과 같다는 해석이다.12

그는 이 주장을 설명하면서 은을 보고 금의 본질을 알 수는 없다는 비유를 사용한다. 서로 다른 본질로는 상대의 본질을 드러낼 수 없으므로, 아들을 보는 것이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면 두 분의 본질이 같아야 한다는 논증이다. 여기서 그는 본다는 말을 본질을 안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완전한 계시에는 동일 본질이 필요하다는 전제를 더한다.

74.2에서는 10절의 아버지께서 하신다는 말과 13절의 내가 이루겠다는 말을 연결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따로 일하지 않으며, 제자들이 행하는 일도 예수가 그들 안에서 이루시는 일이라고 설명한다.12

아우구스티누스: 말씀의 출처와 아들의 존재 근원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강해』 71.1-2에서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는 진술을 아들이 스스로 존재의 근원이 아니라는 뜻으로 설명한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신 하나님이므로, 자신이 행하는 일의 근원도 아버지께 돌린다. 아버지에게서 비롯된다는 관계와 아버지와 동등하다는 신성을 함께 유지하는 해석이다.13

그는 12-13절에서도 제자들이 하리라는 말과 내가 이루겠다는 말을 함께 읽는다(71.3; 72.1). 예수께서는 제자들 안에서, 또 그들을 통해 더 큰 일을 하신다. 제자들의 활동이 커진다는 약속은 그들이 예수보다 높은 존재가 된다는 뜻을 갖지 않는다. 그 약속을 이루는 분은 예수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제자들의 믿음 자체도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서 이루시는 일로 해석하고, 더 큰 일을 죄인이 의롭게 되는 구원과 연결한다(72.2-3). 이 해석에서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활동에 참여하지만 그분과 같은 본질을 갖지는 않는다. 함께 일한다는 관계 안에서도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과 그 은혜에 참여하는 이들을 구별한다.13

본문에서 내릴 수 있는 판단

이 단락은 떠나시는 예수를 제자들이 계속 믿을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아버지께 이끄시는 길이며, 그분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가 예수 안에서 말씀하시고 일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가신 뒤에도 예수는 제자들의 기도를 이루고 그들이 행할 일을 가능하게 하신다.

12절은 공동 활동과 동일 본질의 관계를 평가하는 데 중요한 비교점을 준다. 제자들도 예수의 일을 하며 더 큰 일까지 한다. 따라서 같은 종류의 일을 행한다는 사실만으로 두 행위자의 본질이 같다고 결론낼 수는 없다. 이 단락이 예수와 제자들을 구별하는 방식은 믿고 구하는 사람들과 그 믿음의 대상이 되어 구한 것을 이루시는 분의 관계다. 제자들의 일은 예수께 의존한다.

아들도 아버지께 의존한다. 다만 9-11절은 그 의존을 아버지와 서로 안에 계시는 관계로 설명하며, 예수를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한다. 13-14절에서는 제자들의 기도를 아들이 직접 이루신다. 아들은 아버지의 계시를 받아 전달하는 동시에, 제자들이 아버지께 이르고 그분의 생명과 활동에 참여하게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요청과 함께 아들을 믿으라는 요청이 주어지는 것도 이 관계에 어울린다.

요한복음의 앞선 진술들도 아들의 신성을 뒷받침한다. 서문은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5:19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그대로 한다고 말한다. 10:28에서는 누구도 아들의 손에서 양들을 빼앗을 수 없다. 동일 본질 해석은 예수 안에서 드러나는 아버지의 계시와 권능이 같은 신적 생명에서 나온다고 설명한다. 아들을 하나님과 별개로 권능을 부여받은 피조물로만 이해하는 해석보다 이 진술들의 결합을 잘 설명한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이 결론을 아들이 아버지의 본질을 온전히 알리신다는 논증으로 발전시켰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들의 말과 활동의 출처를 아들의 존재 근원과 연결했다. 본문은 예수의 말과 일에서 아버지를 알게 된다고 설명하며, 두 교부는 그 계시가 가능한 존재 관계를 동일 본질과 나심으로 해명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아버지께 이끄시고, 그들의 기도를 이루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신다. 아들의 신적 지위와 아버지를 향한 사명은 이 단락에서 함께 서술된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예수의 떠남 뒤에도 그 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 인용은 SBLGNT를 기준으로 옮긴 필자 번역이다. 2절의 문장 구분과 7절 및 14절의 본문 형태는 각주에 설명했다. 요한복음 헬라어 본문. © 2010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and Logos Bible Software, CC BY 4.0.

각주와 자료

  1.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Grand Rapids: Eerdmans, 1991), 487-488; Raymond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AB 29A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8), 618, 624-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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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488-490;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19-620, 625-627. 2절의 ὅτι는 SBLGNT에 포함되어 있으며, 위 번역은 뒤 절구를 말하다의 내용으로 연결하고 문장을 의문문으로 읽는다. Carson은 490쪽에서 이 읽기를 검토한다. Brown은 2-3절의 재림 약속이 요한복음의 최종 문맥에서 부활 이후 아버지와 아들과의 연합으로 재해석되었을 가능성도 논한다(6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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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491;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21, 628-631. 두 주석은 길이라는 표현을 도마의 질문에 대한 답변의 중심으로 읽으며, 진리와 생명을 아버지께 이르는 관계와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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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493-494;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21, 631. SBLGNT는 ἐγνώκειτε와 ἂν ᾔδειτε를 채택한다. Carson은 예수를 알게 되었다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라는 다른 읽기를 선호한다. 이제부터의 시간적 의미에 관해서도 두 주석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포함하는 계시의 때를 고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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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494;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32. 모세의 요청과 빌립보의 요청을 연결하는 설명 및 예수 안에서 아버지를 본다는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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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22, 632-633;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494-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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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495-497;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33. 더 큰 일의 부활 이후 성격과 예수의 떠남에 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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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497-498;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22, 634. 14절 전체의 생략과 내게의 생략은 서로 다른 본문 이문이다. 두 주석은 내게를 포함한 본문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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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497;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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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James D. G. Dunn, Did the First Christians Worship Jesus? The New Testament Evidence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10),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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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Irenaeus, Against Heresies IV.6.1-6, 특히 IV.6.6, 공개 영어 본문. IV.6.6에 대응하는 Harvey 1857판 IV.11.4의 라틴어 본문과 한국어 번역. 이레네우스는 이 장에서 마태복음 11:27과 누가복음 10:22의 상호 인식 진술을 중심으로 아들을 통한 아버지의 계시를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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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John Chrysostom, Homilies on John 74.1-2, 공개 영어 본문. 74.1은 아버지를 봄과 동일 본질, 74.2는 아버지의 활동과 아들이 기도를 이루는 활동을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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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71.1-3, 72.1-3. 71.1-2는 말과 존재의 근원, 71.3과 72.1은 제자들 안에서 일하는 그리스도, 72.2-3은 믿음과 죄인의 의롭게 됨에 관한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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