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절: 제자들과 함께 계실 다른 보혜사

“여러분이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들을 지킬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께 청하겠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여러분에게 주셔서 영원히 여러분과 함께 있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압니다. 그분이 여러분 곁에 머무시며 여러분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5-17절, 필자 번역)

예수께서는 앞에서 제자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면 이루겠다고 약속하셨다(14:13-14). 이제 제자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일을 말씀하신다. 그 사랑은 계명을 지키는 삶으로 이어진다. 15절의 “지킬 것입니다”는 SBLGNT가 채택한 미래형을 옮긴 말이다. 명령형으로 지키라고 읽는 전승도 있고, 브라운은 사랑하고 지킨다면이라는 조건문으로 읽는다.1

16절에는 아버지께 청하는 예수, 보혜사를 주시는 아버지, 제자들과 함께 계실 보혜사가 등장한다. 예수께서 떠나신 뒤에도 제자들은 도움을 받는다. 보혜사와 함께 지낼 기간에는 끝이 없다는 약속이다.

보혜사로 옮기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는 돕고 대변하는 이를 가리킨다. 카슨은 이 말의 법정적 배경을 설명하면서도 요한복음에서 그 역할이 법정의 대변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본다.2 여기서는 떠나시는 예수의 뒤를 이어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점이 먼저 드러난다. 다른 보혜사라는 말은 예수께서 이미 제자들을 돌보고 도우셨음을 전제한다.

요한일서 2:1에서는 예수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돕는 파라클레토스라고 불린다. 던은 요한 문헌에서 성령이 땅의 보혜사로, 그리스도가 하늘의 보혜사로 묘사되는 역할의 차이를 지적한다.3 요한복음 14장에서 두 분은 제자들을 돌보는 일을 공유하면서도, 청하시는 예수와 주어지는 다른 보혜사로 구별된다.

17절은 보혜사를 진리의 영이라고 부른다. 앞에서 예수는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셨다(14:6). 진리의 영은 예수께서 알리신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제자들에게 주어진다.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그분을 안다. 그분이 그들 곁에 머무시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장은 현재의 함께 계심과 앞으로의 내주를 연결한다. SBLGNT는 여러분 안에 계실 것이라는 미래형을 채택하지만, 여러분 안에 계신다는 현재형의 전승도 있으며 브라운은 그 읽기를 따른다.4 위 번역에서는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영께서 앞으로 그들 안에 계시리라는 약속을 읽는다. 예수의 떠남은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끊어지는 사건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18-21절: 고아로 남겨 두지 않으시다

“나는 여러분을 고아로 남겨 두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옵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여러분은 나를 볼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으므로 여러분도 살 것입니다. 그날에 여러분은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여러분이 내 안에 있으며, 내가 여러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며,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나타내겠습니다.” (18-21절)

다른 보혜사를 약속하신 예수께서 이제 자신이 오겠다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스승을 잃은 채 버려지지 않는다. 예수는 자신을 다시 볼 일과 그들이 살게 될 일을 함께 약속하신다. 그들의 생명은 내가 살아 있다는 예수의 선언에 근거한다.

카슨은 이 오심을 죽음 이후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일로 읽는다.5 조금 있으면 세상이 보지 못하게 되고 제자들은 보게 된다는 말, 예수의 생명과 그날에 알게 될 일을 함께 말하는 흐름은 부활 이후의 만남에 잘 맞는다. 제자들이 다시 만날 분은 죽음을 이기고 살아 계신 예수다.

브라운은 부활의 나타나심을 이 말씀의 배경으로 인정하면서, 현재의 문맥에서는 성령을 통한 예수의 지속적인 현존까지 가리킨다고 해석한다.6 그는 잠시 다시 만나는 일만으로는 고아로 남겨 두지 않겠다는 약속과 서로 안에 거하는 관계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고 본다.6 부활의 만남은 예수가 제자들과 계속 함께하시는 관계를 연다.

20절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제자들까지 이어진다. 예수는 아버지 안에 계시고, 제자들은 예수 안에 있으며, 예수는 제자들 안에 계신다. 14:10-11에서 아버지와 아들에게 사용된 서로 안에 있다는 말이 여기서는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에도 사용된다. 같은 표현 안에서 제자들은 예수의 생명에 참여한다. 그들이 살게 되는 까닭은 예수가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21절은 이 관계를 사랑과 순종으로 설명한다.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받으며, 예수는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카슨은 이를 제자들의 순종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 내는 순서로 보기보다, 예수와 제자들이 맺는 지속적인 사랑의 관계로 해석한다.7 예수는 앞서 자신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13:34). 제자들의 순종은 이미 받은 사랑에 응답하는 삶이다.

22-24절: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오시다

가룟 사람이 아닌 유다가 말했다. “주님, 무슨 일이 있어서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시고 저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려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며,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거처를 마련할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들을 지키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듣는 말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것입니다.” (22-24절)

유다는 예수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대상에 관해 묻는다. 왜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시고 세상에는 나타나지 않으시는가. 예수께서는 자신을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 오시겠다고 답하신다. 이번에는 아버지와 함께 오신다.

우리가 가겠다는 복수형에는 아버지와 예수가 포함된다. 두 분은 제자를 사랑하고 그와 함께 거하신다. 거처를 뜻하는 모네(μονή)는 14:2의 아버지 집에 있는 거할 곳과 같은 단어다. 브라운은 이 약속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겠다는 구약의 약속과 연결하며, 제자들 안의 내주에서 그 약속이 실현된다고 설명한다.8

이제 이 단락에는 진리의 영이 함께 계심, 예수가 오심,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거하심이 나란히 나온다. 브라운은 이 세 약속을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현존으로 종합한다.9 23절에서 함께 오시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은 아버지와 아들이며, 성령을 통한 오심이라는 설명은 16-17절의 약속과 연결한 해석이다.

24절에서는 예수가 전한 말의 출처가 다시 분명해진다. 그 말은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것이다. 예수를 사랑하여 그 말을 지키는 일은 아버지의 말씀에 응답하는 일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제자에게 함께 오시며, 그들이 따를 말씀에서도 일치하신다.

25-26절: 성령께서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시다

“나는 여러분 곁에 머물면서 이런 것들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실 것입니다.” (25-26절)

26절은 보혜사를 성령이라고 명시한다. 아버지께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시며, 성령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신다. 세 분의 역할이 한 문장 안에서 연결된다.

기억나게 한다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에게서 실제로 들은 말씀이 성령의 가르침의 내용임을 밝힌다. 요한복음은 앞에서도 제자들이 부활 후에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해했다고 설명했다(2:22; 12:16). 카슨은 이 약속을 먼저 그 최초의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는 일에 적용한다.10 이들은 자신들이 들은 말씀의 증인이 된다.

브라운은 가르치고 기억나게 한다는 두 표현을, 성령께서 예수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게 하신다는 뜻으로 읽는다.11 따라서 모든 것을 가르친다는 약속의 내용은 예수의 계시와 연결된다. 아버지에게서 온 예수의 말씀이 성령의 가르침 안에서 계속 알려진다.

이때 성령은 제자들이 소유한 능력이나 지식으로만 묘사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보내시고, 성령은 가르치며 기억나게 하신다. 예수가 떠난 뒤 제자들을 돌보는 다른 보혜사에게 지속적인 활동이 귀속된다.

27절: 떠나시는 분이 남기는 평화

“나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남깁니다. 내 평화를 여러분에게 줍니다. 나는 세상이 주는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게 하십시오.” (27절)

예수께서는 떠나는 자리에서 평화를 주신다. 브라운은 평화라는 말이 이별의 인사이면서, 여기서는 예수가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뜻한다고 설명한다.12 예수는 자신이 가진 평화를 제자들에게 주겠다고 하신다.

그 평화는 두려움을 다루는 약속이다. 14:1에서 시작된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라는 말이 반복된다. 제자들이 예수의 떠남을 견딜 수 있는 근거는 그가 남기시는 선물과 지속적인 돌봄에 있다.

28-29절: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

“내가 떠나갔다가 여러분에게 온다고 말한 것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사랑했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지금 여러분에게 말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날 때 여러분이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28-29절)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의 떠남을 기뻐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아버지께 가시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는 말씀이 붙는다. 이 비교는 떠나는 예수와 남는 제자들의 관계, 그리고 예수가 가시는 아버지에 관한 설명 안에 있다.

브라운은 이 구절을 보낸 이와 보내심을 받은 이의 관계로 풀이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일이 예수의 사명 완수와 영광을 뜻한다고 설명한다.13 예수께서는 앞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 보낸 이보다 크지 않다고 말씀하셨다(13:16). 그를 보내신 아버지는 그가 돌아가 영광을 받을 분이시다. 이 설명에서 제자들이 기뻐할 이유는 예수의 사명이 완성되는 데 있다.

카슨은 영광 중에 계신 아버지와 성육신의 낮아짐 속에 계신 아들의 처지를 비교한다. 제자들이 예수를 사랑한다면 그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영광으로 돌아가심을 기뻐하리라는 해석이다.14 이때 크심은 예수가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일을 기뻐할 이유가 된다. 단지 예수 없이 남게 될 자신들의 처지만 보면 그 기쁨을 알 수 없다.

두 해석은 아버지의 크심을 실제 관계의 차이로 읽으며, 예수의 사명과 귀환에서 그 뜻을 찾는다. 본문은 아버지와 아들을 비교하지만 그 비교를 본질의 차이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말씀을 하나님이라 부르는 서문과 예수 안에서 아버지를 본다는 14:9를 함께 읽으면, 이 크심은 아들을 보내시고 그가 돌아갈 아버지의 우위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29절은 이 말씀을 지금 주시는 목적을 밝힌다. 제자들은 다가오는 일을 미리 들었으므로, 그것이 일어날 때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믿게 될 것이다.

30-31절: 아버지를 사랑하여 행하시는 일

“나는 더 이상 여러분과 많은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가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아무 권리도 없습니다. 세상이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도록,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행합니다. 일어나십시오. 여기서 갑시다.” (30-31절)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다가온다고 말씀하신다. 13장에서는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고, 유다는 예수를 넘겨주려고 자리를 떠났다. 이제 그 위협이 예수께 다가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통치자가 자신에게 아무 권리도 갖지 못한다고 선언하신다. 카슨은 이 말을 예수에게 정당한 고발의 근거가 없다는 뜻으로 설명한다.15

31절에서 예수가 행하시는 일의 이유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다. 그는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그 사랑을 세상에 알리신다. 15절에서 제자들의 사랑은 계명을 지키는 일로 나타났고, 단락의 마지막에서는 예수의 사랑이 아버지께 순종하는 일로 나타난다.

예수의 순종은 이 세상의 통치자에게 굴복하는 일과 대조된다. 그가 따르는 분은 아버지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남기신 예수는 그 사랑과 순종 안에서 일어나 가자고 말씀하신다.

교부들의 해석

바실리우스: 보혜사의 이름과 성령의 신성

바실리우스는 『성령에 관하여』 19.48에서 다른 보혜사라는 말씀을 성령과 아들이 공유하는 호칭으로 읽으며, 두 분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까닭을 본성의 밀접한 관계에서 찾는다.16 이름이 같다는 관찰을 신적 본성의 공통성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의 논증은 보혜사라는 이름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그는 같은 절에서 성령이 거룩하게 되는 피조물과 달리 본성상 거룩하며 다른 존재들을 거룩하게 하신다고 설명한다.16 이어 성령의 창조와 생명 수여, 인도와 가르침을 함께 들어 신적 존귀를 논증한다(19.49-50).16

요한복음 14장의 성령은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며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하신다. 바실리우스는 이 활동을 다른 성경 본문의 성화와 생명 수여에 연결하여 성령의 신성을 설명한다. 보혜사라는 호칭은 그 논증의 한 근거이며, 본성에 관한 결론은 여러 호칭과 활동을 함께 읽은 결과다.

그레고리오스: 아버지의 크심과 아들의 근원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제4신학강론』 30.7에서 크심을 존재의 근원과 연결하고, 동등함을 본성에 관한 진술로 설명한다.17 아버지는 아들의 근원이시므로 크시지만,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으로서 같은 신성을 지니신다는 해석이다.

그레고리오스는 하나님이 사람보다 크시다는 설명도 참이라고 인정한다. 다만 그것만으로 이 말씀을 풀이하면 특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평가한다.17 그의 관심은 아버지의 근원적 위치가 아들의 열등한 신성을 뜻하는지에 있다. 그는 근원의 차이와 본성의 동등함을 함께 인정하여 그 문제에 답한다.

이 해석에서 28절은 성육신의 낮아짐뿐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영원한 관계를 설명한다. 본문에서 아버지께 가시는 아들의 관계를, 아버지에게서 나신 아들의 존재 관계로 확장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사람이 되신 아들과 아버지의 크심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강해』 78.1-3에서 빌립보서 2:6-7의 하나님의 형체와 종의 형체를 연결하여, 같은 그리스도가 신성에서는 아버지와 동등하고 인성에서는 아버지보다 작다고 설명한다.18 아버지가 더 크시다는 말씀은 사람이 되신 아들에게 적용된다.

이 설명은 예수가 떠나시면서도 제자들과 함께하실 수 있는 이유에도 적용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예수는 보이는 인간적 현존으로는 떠나시지만 신성으로는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신다.18 아버지께로 가심은 아들이 취하신 인간성이 영광과 불멸에 참여하는 사건이므로 제자들이 기뻐할 이유가 된다.18

그레고리오스가 아버지와 아들의 근원 관계를 강조했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한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을 구별하여 같은 말씀을 풀이한다. 두 해석 모두 아들의 신성을 인정하면서, 아버지가 더 크시다는 진술이 그 동등함과 어떻게 양립하는지 설명한다.

본문에서 내릴 수 있는 판단

이 단락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관계의 서로 다른 주체로 읽을 근거가 뚜렷하다. 아들이 아버지께 청하고, 아버지가 다른 보혜사를 주신다. 성령은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심을 받아 제자들을 가르친다. 이 관계를 한 인물이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는 순서로 읽으면, 청하는 분과 주시는 분과 주어지는 분의 관계를 설명하기 어렵다.

동시에 세 분의 활동은 제자들의 한 삶 안에서 연결된다. 성령께서 함께 계시고, 예수가 오시며,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거하신다. 성령의 가르침은 아들의 말씀을 알게 하고, 아들의 말씀은 아버지에게서 왔다. 신적 현존과 계시가 이렇게 서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삼위일체 해석은 이 단락의 여러 약속을 일관되게 설명한다.

성령의 동등한 신성과 동일 본질을 논증할 때에는 그분이 이루시는 이 현존이 중요한 근거다. 성령은 예수가 하신 일을 계속하며 제자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참여하도록 하신다. 그분을 하나님 자신의 현존을 이루시는 분으로 읽을 근거가 있다. 다만 이 단락은 성령을 하나님이라는 명사로 부르거나 그분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는다. 16절의 영원히는 제자들과 함께 계실 기간이다. 바실리우스는 성령이 거룩하게 하고 생명을 주신다는 다른 본문들을 함께 읽어 본성에 관한 결론을 내린다.

서로 안에 있다는 표현 역시 그 대상에 따라 관계가 다르다. 20절에서는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도 같은 표현이 쓰인다. 제자들은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의 생명의 근원은 예수다. 이 내주만으로 제자들까지 동일한 신적 본질을 지닌다고 읽을 수는 없다. 성령의 신성을 논증하는 데에도 내주라는 표현과 함께, 그분이 다른 보혜사로서 누구의 일을 하며 누구의 현존을 이루시는지가 중요하다.

아버지의 크심은 보내시는 분과 보내심을 받은 분의 차이를 분명하게 한다. 예수의 순종은 그 관계 안에서 실제로 행해진다. 28절의 직접적인 문맥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일을 왜 기뻐할 수 있는지 설명하는 데 있으므로, 사명의 완성과 영광으로의 귀환을 중심으로 읽는 해석이 가장 설득력 있다. 그레고리오스의 근원 관계와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본성은 그 진술을 더 넓은 교리적 설명 안에 배치한다.

따라서 이 단락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함은 모든 관계와 역할이 같다는 뜻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보내시고, 아들은 순종하여 돌아가시며, 성령은 아들의 이름으로 오신다. 삼위일체의 동일 본질 해석은 이 차이를 유지하면서 세 분의 계시와 현존을 한 하나님의 활동으로 이해한다. 제자들은 그 관계 안에서 버려지지 않고, 사랑하며 말씀을 지키고, 예수가 주시는 평화로 살아간다.

성경 인용은 SBLGNT를 기준으로 옮긴 필자 번역이다. 요한복음 헬라어 본문. © 2010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and Logos Bible Software, CC BY 4.0.

각주와 자료

  1.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Grand Rapids: Eerdmans, 1991), 498-499; Raymond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AB 29A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8), 638. SBLGNT의 τηρήσετε는 미래형이다. Brown은 τηρήσητε를 택하여 사랑과 계명 준수를 조건절 안에 함께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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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499-500. 같은 500쪽에서 Carson은 다른이라는 단어 자체에 같은 종류라는 의미를 지나치게 부여하는 해석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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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James D. G. Dunn, Did the First Christians Worship Jesus? The New Testament Evidence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10), 128-129 및 129쪽 각주 83. 바울의 성령과 그리스도에 관한 설명 가운데 요한 문헌을 비교하며, 요한복음 14:16, 26과 15:26, 16:7 및 요한일서 2:1을 함께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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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39-640;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09-510. SBLGNT와 위 번역은 ἔσται, 곧 미래형을 따른다. Brown은 현재형 ἐστίν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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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0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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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45-646.

    본문 1 본문 2

  7.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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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47-648. 특히 스가랴 2:10의 거하심과 14:23을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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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42-643. Carson도 504쪽에서 성령을 통한 아버지와 아들의 현존을 가능성으로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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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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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50-651, 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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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51, 653-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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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54-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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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07-508. Carson은 이 해석과 함께 아버지를 아들의 존재의 근원으로 이해하는 신학적 설명도 덧붙인다(5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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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08-509. 30절의 직역은 내 안에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며, 이를 고발하거나 권리를 주장할 근거가 없다는 말로 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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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Basil of Caesarea, On the Holy Spirit 19.48-50, 공개 영어 본문. 48절은 보혜사를 포함한 공통 호칭과 본성의 거룩함, 49-50절은 성령의 활동과 존귀를 논한다.

    본문 1 본문 2 본문 3

  17. Gregory of Nazianzus, Oration 30.7, 공개 영어 본문. 크심을 존재의 근원과, 동등함을 본성과 연결하는 논증.

    본문 1 본문 2

  18.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78.1-3, 공개 영어 본문. 아들의 신성과 인성, 떠나심과 머무심, 인간성의 영광을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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