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절: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보내실 보혜사
“내가 아버지에게서 여러분에게 보낼 보혜사가 오시면,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그분이 나에 관하여 증언하실 것입니다.” (26절, 필자 번역)
이 약속 앞에서 예수께서는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리라고 말씀하셨다(15:18-25). 그 미움은 예수를 향한 미움과 연결된다.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가 행하신 일을 보았으나 그를 미워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따르는 분 때문에 같은 반응을 겪게 된다. 그 가운데 보혜사의 증언이 약속된다.
예수께서는 보혜사를 자신이 보내겠다고 말씀하신다. 14:16에서는 아버지께 청하여 다른 보혜사를 받게 하겠다고 했고, 14:26에서는 아버지가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신다고 했다. 여기서는 예수가 보내시는 분으로 등장하며, 아버지에게서라는 말이 그 파송의 출처를 밝힌다. 아버지가 주시는 영을 아들이 제자들에게 보내신다.
아버지에게서라는 표현은 같은 절에서 두 번 나온다. 앞에서는 내가 보낼 보혜사를 설명하고, 뒤에서는 나오시는 진리의 영을 설명한다. 두 절구 모두 파라 투 파트로스(παρὰ τοῦ πατρός)라는 말을 사용한다. 보냄의 주체는 아들이고, 영이 나오시는 출처는 아버지다.
메리앤 메이 톰프슨은 이 문장이 성령을 아들이 보내신다고 말하면서도 성령이 아들에게서 나온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차이에 주목한다.1 아들의 파송과 아버지에게서 나오심은 이 문장에서 함께 서술되지만 같은 말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이 차이는 후대에 성령의 발출을 논할 때 중요한 본문 근거가 되었다.
나오신다는 동사는 에크포류에타이(ἐκπορεύεται)로 현재형이고, 내가 보내겠다는 동사는 미래형이다. 카슨과 레이먼드 브라운은 이 두 절구가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오실 사명을 함께 설명한다고 읽는다.2 현재형은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영의 특징을 서술하며, 미래형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 영을 보내실 일을 약속한다. 이 문장의 직접적인 관심은 영이 제자들에게 오셔서 하실 일에 있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서라는 말이 단지 파견 장소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진술은 보냄을 받은 분의 권위와 그가 전하는 계시의 근거를 설명한다. 성령의 증언은 예수와 무관한 곳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서 오시고 아들이 보내시는 영께서 아들을 증언하신다.
26절의 증언: 누구에게 무엇을 증언하시는가
예수께서는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신다. 성령의 증언이 향하는 대상은 예수다. 앞서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과 일을 보고도 그와 아버지를 미워했다(15:23-24). 그 거부 속에서도 예수에 관한 증언은 계속된다.
코르넬리스 베네마는 보혜사의 증언을 제자들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로만 제한하지 않는다. 성령께서 제자들 안에서, 또 그들의 증언을 통해 세상에 예수를 증언하신다고 설명한다.3 이 해석에서 제자들의 입으로 말하는 증언과 성령의 활동은 긴밀하게 연결된다. 세상은 성령을 직접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다.
베네마는 성령과 제자들의 증언을 예수의 정체와 생명을 주시는 사역에 관한 계속되는 재판의 일부로 이해한다.3 박해받는 제자들은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계속 알린다. 그들의 증언은 미움에 굴복하지 않도록 자신들을 지탱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하는 일을 향한다.
트리샤 게이츠 브라운은 보혜사를 주로 법정적 역할로 규정하는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후원자와 의뢰인을 연결하는 중개 관계를 사용하여, 보혜사가 위기에 처한 제자들에게 예수의 지원과 증언을 전하시는 분이라고 설명한다.4 법정에서도 친구나 후원자가 자신의 신뢰와 영향력을 더하여 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 브라운에게 이런 도움은 재판 중에만 생기는 관계가 아니라, 계속되는 후원 관계가 드러나는 한 장면이다.4
이 설명은 보혜사의 돌봄과 증언을 연결한다. 14장에서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하실 분은 15장에서 미움받는 그들 곁에 계시며 증언하신다. 보혜사의 도움을 받는다는 약속은 제자들이 박해를 피하거나 언제나 유리한 결과를 얻는다는 약속으로 바뀌지 않는다.
트리샤 브라운은 나에 관하여라는 표현을 예수를 위한 증언으로 강조한다. 보혜사는 떠나신 예수의 증언을 계속 전하며,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와 함께 지내며 겪은 일을 증언한다는 것이다.5 성령의 증언에는 예수를 옹호하는 뜻이 있고, 제자들의 증언에는 실제로 그분과 함께했던 이들의 경험이 있다. 두 증언은 같은 예수를 가리킨다.
27절: 처음부터 함께 있었던 사람들
“여러분도 증언하십시오. 여러분은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27절)
여러분도라는 말은 제자들을 성령의 증언에 연결한다. 성령께서 증언하시므로 제자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약속이 아니다. 그들도 증언할 책임을 받는다.
증언하라는 마르튀레이테(μαρτυρεῖτε)는 형태상 명령으로도, 증언하고 있다는 진술로도 읽을 수 있다. 위 번역은 카슨이 택한 명령의 읽기를 따른다.6 성령께서 앞으로 증언하실 것이라는 약속에 제자들의 증언 요청이 이어진다.
그 요청의 근거는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다. 카슨과 레이먼드 브라운은 이 처음을 예수의 사역 초기부터 제자들이 그를 따라온 시간으로 읽는다.6 예수의 말씀을 듣고 활동을 본 사람들이 그분을 증언한다. 성령의 활동은 그들의 역사적 경험을 지워 버리지 않는다. 바로 그 사람들이 증언하도록 돕는다.
베네마는 성령의 증언과 제자들의 증언이 함께 이루어질 수도 있고, 성령의 앞선 가르침과 기억나게 하심이 나중에 제자들의 증언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7 이 설명은 성령의 도움을 한순간의 발화에 한정하지 않는다.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고 기억하며 말하는 과정 전체가 성령의 활동과 관계된다.
에드워드 말라테스타는 성령이 공동체 안에서 먼저 예수를 증언하시기 때문에 공동체가 세상 앞에서 예수를 증언한다고 설명한다.8 그는 성령을 영광받으신 예수께서 자신의 계시 사역을 계속하고 제자들과 관계를 맺도록 그분의 현존을 매개하시는 분으로 이해한다.8 성령의 활동과 제자들의 증언을 연결하면서도, 그 안에서 예수 자신의 활동이 계속된다고 보는 해석이다.
윌리엄 브래들리 사이먼은 성령이 제자들만 도우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증언을 듣는 사람들의 내면에도 역사하여 믿을 수 있게 하신다고 주장한다.9 그는 성령으로 거듭남을 말하는 3:3-5와 세상을 책망하시는 성령을 말하는 16:8을 함께 사용한다.9 이 견해는 증언을 듣는 사람이 어떻게 믿음에 이르는지를 더 설명한다. 다만 15:26-27이 직접 서술하는 관계는 성령과 증언하는 제자들 사이에 있다. 청자의 내적 변화에 관한 설명은 다른 단락을 연결한 사이먼의 구원론적 해석이다.
이 두 절은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시고 제자들이 증언한다는 흐름을 가진다. 따라서 성령께서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세상에 예수를 알리신다는 해석이 문맥에 가장 가깝다. 성령의 활동과 제자들의 활동은 협력하지만, 성령이 제자들의 기억이나 용기의 다른 이름으로 축소되지는 않는다. 예수께서 보내실 영이 먼저 약속되고, 그와 함께 제자들의 책임이 주어진다.
교부들의 해석
그레고리오스: 나오심을 나심과 구별하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제5신학강론』 31.8에서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는 말씀을 성령의 존재 관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한다. 성령은 아버지처럼 아무에게서도 비롯되지 않는 분도 아니고, 아들처럼 나신 분도 아니며, 나오시는 분으로 구별된다는 해석이다.10
31.9-10에서 그는 이 관계의 차이가 신성의 부족이나 본질의 차이를 뜻하지 않는다고 논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다른 관계를 가지면서 하나의 신적 본성과 존귀를 공유하신다.10 그레고리오스에게 나오심은 아버지와 아들과 다른 성령의 고유한 관계를 가리킨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영이 제자들에게 오셔서 증언하신다. 그레고리오스는 이 표현을 나지 않음, 나심, 나오심이라는 세 관계의 구별 안에서 읽는다. 본문의 파송과 증언을 설명하던 말이 여기서는 성령의 신성과 고유한 존재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 된다.
아우구스티누스: 성령의 내적 증언과 제자들의 말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강해』 93.1에서 성령은 제자들의 마음 안에서 증언하고 제자들은 소리 내어 증언한다고 풀이한다.11 그는 베드로가 예수의 모범과 가르침을 보고도 두려워 부인했지만, 성령을 받은 뒤에는 담대하게 전했다고 설명한다.11
그에게 성령은 제자들이 박해를 견디며 증언하게 하시는 분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본 예수를 말하고, 두려움 속에서도 그 말을 계속할 힘을 성령에게서 받는다. 이 해석은 본문의 증언을 제자들의 삶과 연결하며, 박해의 문맥을 유지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아버지에게서 나오심과 아들과의 관계
『요한복음 강해』 99.6-9에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성령이 아들에게서도 나오시는지를 논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이 아버지의 영이면서 아들의 영이라고 불린다는 진술들을 연결하고, 부활하신 예수가 숨을 내쉬며 성령을 주신 요한복음 20:22도 근거로 든다.12
그는 15:26의 아버지에게서 나오심이 아들에게서 나오심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아들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 근원이 아버지이듯, 성령이 아들에게서 나오시는 관계도 아버지에게서 아들이 받으신 것이라는 논증이다.12
이 설명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들이 가진 것을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으로 이해한다. 아들에게서도 나오신다는 결론은 아버지와 아들을 독립된 두 근원으로 세우지 않으면서, 성령이 아들과 맺는 관계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본문에서 내릴 수 있는 판단
이 단락의 주된 약속은 예수께서 떠나신 뒤에도 그에 관한 증언이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은 예수를 증언하며, 예수와 함께 있었던 제자들도 증언한다. 부자 관계와 성령의 출처는 이 증언이 누구에게서 와서 누구를 알리는지를 설명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은 분명하다. 보내시는 아들, 영이 나오시는 출처인 아버지, 증언하시는 성령을 한 역할로 합치기 어렵다. 동시에 그 활동은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서 온 성령이 아들에 관한 증언을 제자들 가운데 계속하신다.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는 진술은 그분의 기원을 논할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이 두 절에는 영원한 발출의 방식이나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 관계를 정의하는 설명이 없다. 직접적인 문맥에서는 제자들에게 보냄을 받아 오시는 성령의 사명을 중심으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현재형으로 나오신다고 말한다는 사실만으로 시간 밖의 영원한 발출 전체가 설명되지는 않는다.
톰프슨이 강조한 동사의 차이는 이 판단에서 중요하다. 본문은 아들이 성령을 보내신다고 말하고,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고 말한다.1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들에게서도 나오신다는 결론에 이르는 근거는 이 절에 모두 들어 있지 않다. 그는 아들의 영이라는 호칭과 부활하신 예수의 성령 수여, 아버지에게서 아들이 받으신 신성을 연결하여 그 관계를 논증했다.
성령과 제자들이 같은 증언에 참여한다는 사실도 본질의 동일성을 곧바로 뜻하지는 않는다.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지낸 사람들로서 증언하고,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오시며 아들이 보내시는 분으로서 그들을 돕는다. 공동 활동 안에서도 성령의 출처와 제자들의 역사적 경험은 다르게 서술된다. 성령의 동일 본질을 논증하는 힘은 증언이라는 동사의 반복보다, 그분이 아버지와 아들의 계시를 어떤 지위에서 계속하시는지에 있다.
그레고리오스는 성령의 나오심을 같은 신성을 지닌 세 분의 고유한 관계로 설명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과 아들의 관계까지 더 넓은 성경적 논증으로 해명했다. 이들의 해석은 성령의 출처를 그분의 존재 관계로 설명한다. 요한복음의 제자들에게 그 출처는 증언을 계속할 근거다. 그들이 예수를 증언할 때, 아버지에게서 오시는 진리의 영께서 함께 증언하신다.
성경 인용은 SBLGNT를 기준으로 옮긴 필자 번역이다. 요한복음 헬라어 본문. © 2010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and Logos Bible Software, CC BY 4.0.
각주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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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nne Meye Thompson, John: A Commentary, NTL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15), 335. Perlego에서 읽은 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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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Grand Rapids: Eerdmans, 1991), 528-529; Raymond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AB 29A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8), 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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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nelis Bennema, The Power of Saving Wisdom: An Investigation of Spirit and Wisdom in Relation to the Soteriology of the Fourth Gospel, WUNT II/148 (Tübingen: Mohr Siebeck, 2002), 235-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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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cia Gates Brown, Spirit in the Writings of John: Johannine Pneumatology in Social-scientific Perspective, JSNTSup 253 (London and New York: T&T Clark International, 2003), 219-220. Perlego에서 읽은 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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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G. Brown, Spirit in the Writings of John, 21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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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29; 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89-690. μαρτυρεῖτε의 명령형과 직설법 가능성, 처음부터의 시간적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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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nema, Power of Saving Wisdom, 236.
-
Edward Malatesta, “The Spirit/Paraclete in the Fourth Gospel,” Biblica 54, no. 4 (1973): 539-550, 특히 546, 550. George Johnston의 저술에 관한 서평논문. JSTOR 원문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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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Bradley Simon, “The Role of the Spirit-Paraclete in the Disciples’ Mission in the Fourth Gospel” (PhD diss.,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2002), 185, 18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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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gory of Nazianzus, Oration 31.8-10, 공개 영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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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93.1, 공개 영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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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99.6-9, 공개 영어 본문. 아버지의 영과 아들의 영이라는 호칭은 99.6, 요한복음 20:22의 사용은 99.7, 아버지에게서 나오심과 아들에게서 나오심의 관계는 9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