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는 아버지에게 의존하는 아들로 자신을 설명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행하며, 아버지에게서 생명과 심판의 권한을 받고, 보내신 분의 뜻을 따른다. 동시에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행하고, 원하는 사람을 살리며,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 아들을 공경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버지에게서 모든 것을 받는다는 진술과 아버지와 같은 신적 권능과 공경을 갖는다는 진술을 함께 설명해야 하는 본문이다.

이 문제는 동등한 신적 지위와 동일 본질을 구분해서 살필 때 선명해진다. 아들이 하나님의 권능과 공경에 참여한다는 것이 본문의 주장이라면, 그 참여는 권한을 받은 피조된 대리자의 활동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아니면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아버지와 같은 신성을 지니신 아들로 이해해야 하는가. 교부들은 이 질문에 답하면서 특히 19절의 할 수 없다는 말과 26절의 주셨다는 말을 해석했다.

17-18절: 안식일의 일과 하나님과의 동등성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더욱 죽이려고 했다. 예수가 안식일을 어길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7-18절, 필자 번역)

이 논쟁은 예수가 안식일에 오랫동안 병든 사람을 고치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한 데서 시작한다. 예수는 자신의 일을 아버지의 일과 연결하여 설명한다. 안식일에도 아버지께서 일하시므로 자신도 일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호칭과 계속되는 하나님의 활동이 하나의 주장 안에 결합한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쉬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활동도 안식일마다 중단되는가. 예수와 동시대의 유대 저술가 필론은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멈추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하나님의 안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는 당시 유대 사상 안에서도 생각할 수 있는 문제였다. D. A. 카슨과 레이먼드 E. 브라운 역시 하나님의 지속적인 활동에 관한 유대 전승을 17절의 배경으로 읽는다.1

예수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활동이 계속된다는 주장에 자신을 연결한다. 자신이 행한 치유와 그에 따른 명령을 아버지의 일에 근거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논쟁은 안식일에 어떤 행동을 허용할 것인가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활동에 어떤 관계로 참여하는가로 이어진다.

18절의 하나님과 동등하게 한다는 표현은 서술자의 설명에 들어 있다. 다만 이 문장이 반대자들의 판단이 정확하다고 모든 면에서 승인하는지는 뒤따르는 예수의 설명과 함께 읽어야 한다. 카슨은 그들이 예수의 주장에 담긴 신적 지위의 문제를 감지했지만, 그 동등성을 아버지와 경쟁하거나 독립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면 수정이 필요하다고 본다.2 19절부터 예수는 바로 그 관계를 설명한다.

19-23절: 아버지의 일을 행하고 같은 공경을 받는 아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것 외에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무엇을 하시든, 아들도 그것들을 그와 같이 하기 때문이다.” (19절)

19절의 앞부분만 읽으면 아들은 아버지보다 능력이 부족한 존재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문장의 뒷부분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이든 아들도 행한다고 말한다. 아들의 활동은 아버지와 분리되어 시작되지 않으며, 아버지의 활동 가운데 일부만 수행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도 않는다.

스스로라는 말은 아프 헤아우투(ἀφ’ ἑαυτοῦ), 곧 자신에게서라는 표현이다. 이 문맥에서는 아버지와 별개로 자신을 출발점 삼아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어지는 보기와 보여 주기의 언어도 관계를 설명한다. 20절에 따르면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여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을 보여 주신다. 아들이 무엇을 행하는지는 아버지와의 지속적인 관계 안에서 결정된다.

이 표현은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배우는 생활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브라운은 앞선 연구자들을 따라 아버지의 작업을 배우는 아들에 관한 비유가 배경에 있을 가능성을 논한다. 카슨은 그런 생활상이 표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면서도, 독립된 비유가 먼저 존재했다고 재구성하는 데에는 신중하다.3

“아버지께서 죽은 사람들을 일으키고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을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처럼 아들도 공경하게 하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1-23절)

아들이 행하는 일은 생명을 주고 심판하는 일로 구체화된다. 21절은 아버지와 아들의 활동을 비교한다. 아버지가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살린다. 특히 아들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살리는 주체로 서술된다. 이 의지는 앞에서 설명한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 있지만, 아들이 수동적인 도구에 그친다는 설명과는 맞지 않는다.

22절에서는 관계의 비대칭도 나타난다. 심판을 맡기는 분은 아버지이며, 그 권한을 받는 분은 아들이다. 본문이 모든 관계를 대칭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다고 말하려면, 이 주고받는 관계도 함께 설명해야 한다.

그 수여의 목적이 23절에 제시된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처럼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는 것이다. 아들의 권한은 아버지에게서 오며, 그 권한을 주신 아버지는 아들을 자신과 함께 공경받는 자리에 놓으신다. 권한을 받았다는 사실과 동등한 공경은 이 문장에서 서로 배척되지 않는다.

공경하다는 티마오(τιμάω)는 그 자체로 신에게만 쓸 수 있는 동사는 아니다. 따라서 이 단어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예배와 신성을 입증할 수는 없다. 이 문장의 무게는 아버지에 대한 공경이 아들에 대한 공경의 기준으로 제시되고, 그 요구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데 있다. 아들의 생명 수여와 보편적인 심판 권한도 이 요구를 뒷받침한다. 카슨은 이런 결합이 통상적인 사절이나 대리자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고 판단한다.4

제임스 D. G. 던도 요한복음 5:23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자신을 만난다는 요한의 이해와 연결한다. 동시에 요한복음이 아들과 아버지를 구별하며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를 말한다는 점을 강조한다.5 아들에게 돌리는 공경은 아버지의 공경을 빼앗는 행위로 제시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들을 거부하면서 아버지를 공경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 이 문장의 결론이다.

24-30절: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지도록 주셨다는 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며, 심판에 들어가지 않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고 있으며, 지금이 바로 그때다. 듣는 사람들은 살 것이다.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지신 것처럼 아들에게도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지도록 주셨기 때문이다.” (24-26절)

아들의 말과 보내신 아버지에 대한 믿음은 24절에서 함께 나온다. 예수의 말을 듣고 아버지를 믿는 사람에게 이미 영원한 생명이 있다. 25절은 죽은 사람이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때가 지금이라고 말한다. 아들이 주는 생명은 미래에만 속하지 않는다. 예수의 말을 듣는 현재에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일이 일어난다.

26절은 그 일이 가능한 이유를 설명한다. 아버지는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지시며, 아들에게도 그렇게 가지도록 주셨다. 본문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살아갈 생명을 주셨다는 말보다 더 구체적이다. 아들이 받는 것은 아버지처럼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지는 것이다. 이것이 아들의 음성이 다른 사람을 살리는 근거가 된다.

여기에는 현대 주석가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해석 차이가 있다. 브라운은 이 구절의 생명을 우선 사람들을 살리는 창조적 능력으로 읽는다. 문맥이 설명하는 것은 삼위일체 내부의 생명보다 인간을 향해 행사되는 생명 수여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카슨은 이 문맥을 인정하면서 요한복음 1:4의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진술을 함께 읽는다. 그는 성육신 이전부터 말씀에게 있던 생명을 고려하여, 5:26의 수여를 아버지와 아들의 영원한 관계에 속한 것으로 이해한다.6

이 차이는 두 사람이 아들의 신성을 인정하는지 여부로 단순화할 수 없다. 브라운도 이 담화가 신적 지위에 해당하는 주장을 담는다고 본다. 차이는 26절이 직접 설명하는 범위를 어디까지 잡느냐에 있다. 브라운은 지금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활동에 집중하고, 카슨은 그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아들의 영원한 존재 관계까지 연결한다.

문맥에서 먼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을 주는 아들의 권능이 아버지에게서 왔고, 그 생명이 아버지의 생명과 비교되어 서술된다는 사실이다. 주셨다는 동사 에도켄(ἔδωκεν)만으로 그 수여가 창조 때인지, 성육신 때인지, 영원한 관계를 가리키는지 결정할 수는 없다. 수여의 시점과 방식을 설명하려면 이 단락과 요한복음의 다른 진술을 연결해야 한다. 교부들의 해석은 바로 이 지점을 다룬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심판을 행할 권한도 주셨다. 그가 인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놀랍게 여기지 마라. 무덤 속의 모든 사람이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고 있다. 그들은 나올 것이다. 선한 일을 행한 사람들은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듣는 대로 심판하며, 내 심판은 의롭다. 내가 내 뜻을 구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구하기 때문이다.” (27-30절)

27절의 인자는 다니엘서 7장에서 권세를 받는 인자 같은 이를 떠올리게 한다. 인자가 권한을 받는다는 서술은 이 배경에서도 자연스럽다. 브라운과 카슨은 모두 다니엘서와의 연결을 중요하게 본다. 28-29절은 그 권한이 무덤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장면을 제시한다. 아들은 현재 생명을 줄 뿐 아니라 마지막 부활과 심판에서도 결정적인 주체다.7

그런데 이처럼 포괄적인 권한을 말한 뒤, 30절은 다시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19절의 시작이 단락의 끝에서 반복된다. 예수의 권한이 커질수록 아버지에게서 독립한다는 서술은 나오지 않는다. 그의 심판이 의로운 이유도 보내신 분의 뜻을 구한다는 데 있다. 이 담화는 아들의 권능과 아버지에 대한 의존을 끝까지 함께 유지한다.

19절과 26절에 관한 교부들의 해석

이그나티우스: 아버지와의 결합을 공동체의 연합에 적용하다

이그나티우스의 『마그네시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7.1에는 주님이 아버지와 결합되어 계시기에 아버지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는 표현이 나온다. 그는 이를 감독과 장로들을 떠나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권면에 연결한다. 브라운은 이 대목에서 요한복음 5:19의 영향을 읽을 가능성을 언급한다.8

이 대목은 명시적인 성경 인용이라기보다 유사한 표현의 사용이다. 직접적인 문헌 의존 여부를 확정하기에 앞서, 이그나티우스가 아버지와 아들의 결합을 공동체의 기도와 연합을 설명하는 데 사용한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이 구절에서 동일 본질을 논증하지는 않는다. 같은 관계 언어가 교회의 삶에 관한 권면에서도 사용되었다는 사례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 할 수 없음과 능력 부족을 구분하다

그레고리오스는 『제4신학강론』 10-11절에서 아들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을 직접 다룬다. 그가 반박하는 독해는 할 수 없음을 아들의 열등한 능력에 연결한다. 이에 그는 할 수 없다는 표현이 언제나 능력 부족을 뜻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이 악해질 수 없다는 말은 하나님의 결함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9

그는 아들이 아버지와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두 분의 존재와 능력이 함께한다는 관점에서 읽는다. 아버지를 보고 행한다는 표현도 미숙한 기술자가 모범을 보고 다른 작품을 복제하는 장면처럼 해석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먼저 다른 세계를 만들고 아들이 그것을 보고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식의 설명은 창조에 관한 성경의 서술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그와 같이는 아버지와 같은 권능으로 행함을 뜻한다.

그레고리오스의 논증은 부정문을 떼어 읽는 해석의 약점을 드러낸다. 다만 할 수 없다는 말에 여러 용법이 있다는 사실이 곧 그의 해석을 확정하지는 않는다. 본문에서 어느 용법이 적절한지는 아들도 아버지의 모든 일을 행한다는 뒷문장과 함께 판단해야 한다. 그의 해석은 이 연결을 보존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아타나시우스: 주셨다는 말에서 시작의 시점을 읽지 않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파 반박』 III.35-36에서 아들이 받았다는 표현이 한때 그것을 갖지 못했다는 뜻인지 묻는다. 그는 요한복음 5:26의 두 요소를 함께 읽는다. 주셨다는 말은 아들이 아버지와 구별되며 아버지에게서 가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처럼이라는 비교는 아들이 가진 생명의 성격을 설명한다.10

그는 요한복음 16:15의 아버지의 모든 것이 아들의 것이라는 진술 등과 연결하여,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영원히 생명을 가진다고 결론 내린다. 여기서 받음은 피조물의 시작을 뜻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서 난 아들의 관계를 뜻한다. 그 논증은 주셨다는 한 단어에서 시간적 시작을 추론하는 독해와 경쟁한다.

이 해석은 수여의 관계와 수여된 생명의 성격을 함께 설명하려는 시도다. 그 관계가 영원하다는 판단은 5:26의 동사 형태만으로 얻은 결론이 아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요한복음의 다른 진술과 아들의 영원성에 관한 이해를 함께 사용한다. 그의 해석을 평가할 때에는 그 연결이 복음서 전체를 잘 설명하는지 살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일을 그와 같이 한다는 표현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강해』 20에서 19절의 그 일들(ταῦτα)과 그와 같이(ὁμοίως)라는 표현을 함께 붙잡는다.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고 아들이 비슷한 다른 일을 복제하는 관계로 읽으면, 같은 일이라는 문구를 놓친다는 것이다. 그는 요한복음 1:3의 만물이 말씀을 통해 창조되었다는 진술을 연결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별개의 세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함께 창조하셨다고 설명한다.11

그는 같은 결과에 관여한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점도 안다. 사람의 마음과 몸은 같은 행동에 관여하면서 서로 다른 방식과 능력으로 활동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그와 같이라는 표현을 중요하게 읽는다. 아들을 아버지에게 조종되는 하위 도구로 설명하는 독해가 두 표현을 함께 해명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의 논증에는 신적 존재와 능력을 분리할 수 없다는 전제도 들어 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활동할 능력을 가진다는 말은 아들의 존재 자체가 아버지에게서 온다는 뜻으로 연결된다. 동일 본질에 관한 판단은 이 신학적 전제를 포함한다. 문장의 어휘에 대한 설명과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설명이 결합하는 지점이다.

대리자라는 해석의 설명력과 한계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보내심과 권한을 받는다는 점에서 대리자라는 설명은 본문의 상당 부분을 설명한다. 아버지에게서 듣고, 보고, 권한을 받아 그 뜻을 수행한다는 언어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 관계를 지워 버린 동등성은 요한복음의 동등성과 다르다. 다만 대리자라는 기능과 피조된 존재라는 신분은 같은 판단이 아니다. 보내심을 받아 행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존재의 본질까지 결정되지는 않는다.

대리자를 대하는 것이 보낸 사람을 대하는 것이라는 사고도 요한복음 안에 있다. 13:20에서 예수는 자신이 보내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을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연결에 포함된 제자들이 그 때문에 모두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5:23의 아들을 공경하지 않으면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는 문장만으로 동일 본질을 입증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5장의 주장은 그 대표 관계에 머물지 않는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모두 행한다. 원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며, 모든 심판을 맡고, 아버지처럼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 아들을 공경해야 한다. 이 진술들을 함께 고려하면 아들은 특정한 일을 잠시 위탁받은 다른 종들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다.

대리자라는 설명을 유지하면서도 예수를 통상적인 종들과 구별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전권을 맡긴 유일한 아들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설명은 아들이 권한을 받는다는 진술과 그에게 주어진 특별한 공경을 함께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더 판단해야 할 것은 그렇게 전권을 받은 아들이 본질적으로 성부보다 열등하다는 결론까지 본문이 요구하는가 하는 점이다.

본문은 아들이 더 낮은 종류의 생명을 갖거나 아버지의 활동 가운데 일부만 수행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처럼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지며 아버지의 일을 행한다고 말한다. 그가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피조성과 본질의 열등성을 추론하는 해석 역시 본문에 더하는 판단이다. 반대로 아들을 아버지와 나란히 선 독립된 신으로 읽으면, 아버지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단락의 처음과 끝을 설명하기 어렵다.

이 본문은 두 조건을 함께 요구한다. 아들의 활동과 권한은 철저히 아버지에게서 오며, 그 활동과 권한과 공경은 하나님의 고유한 지위에 참여하는 것으로 서술된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의존한다는 사실만으로 신성의 열등성을 결론 내리는 독해도, 아들의 신적 권능만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대칭화하는 독해도 본문의 일부를 약화시킨다.

동등한 신적 지위와 동일 본질에 관한 판단

이 단락은 아들에게 동등한 신적 지위를 돌리는 해석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가장 직접적인 근거는 아버지와 같은 공경을 받으라는 23절이다. 그 요구는 아버지의 모든 일을 행한다는 19절, 생명을 주고 심판한다는 21-22절, 아버지처럼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다는 26절과 연결된다. 동등성은 한 단어에 걸린 주장이 아니라 단락의 여러 진술이 함께 가리키는 방향이다.

이 동등성은 아버지에게서 받는 관계를 포함한다. 아버지는 보내고 보여 주며 생명과 권한을 주신다. 아들은 받고 듣고 행한다. 본문은 이 관계의 차이를 없애면서 동등성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등한 신적 지위를 모든 관계에서의 대칭이나 독립성으로 정의하면 본문과 맞지 않는다.

동일 본질은 이러한 동등성과 의존을 함께 설명하는 교리적 판단이다. 교부들의 논증은 대략 다음과 같은 연결을 따른다. 아들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신적 권능과 생명이 있다. 그 권능과 생명은 아버지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아버지에게서 온다. 따라서 아들의 의존은 신성이 부족해서 외부의 도움을 받는 상태보다, 아버지에게서 같은 신성을 가지는 아들의 관계로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이 연결을 요한복음 전체에 비추어 보면 설명력이 더 커진다. 서문은 말씀을 하나님과 구별하면서도 하나님이라고 서술하고, 만물이 그를 통해 생겨났으며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한다(1:1-4). 특히 그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진술은 말씀을 생겨난 만물의 편에 놓는 해석에 어려움을 준다. 5장의 아들이 받는 생명을 이 말씀의 생명과 연결하면, 아들을 피조물 가운데 특별히 승격된 한 존재로 읽는 것보다 하나님의 생명과 활동에 본래 참여하는 아들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카슨과 교부들이 5:26을 영원한 관계에 연결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이것은 여러 진술을 연결한 해석이다. 5:17-30은 하나의 본질이라는 용어로 하나님의 존재를 정의하지 않고, 아들의 능력과 존재가 동일하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제도 직접 명제화하지 않는다. 교부들은 의존하는 아들이 아버지의 고유한 권능과 생명과 공경을 공유한다는 본문의 진술들을 설명하기 위해 이러한 개념을 사용한다.

요한복음 5:17-30은 아들의 동등한 신적 지위를 강하게 뒷받침한다. 동일 본질이라는 설명은 그 지위와 아버지에게서 오는 관계를 함께 해명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아버지에게서 받는다는 사실이 아들의 신성을 낮추는 근거가 될 필요는 없다. 이 담화에서 아들은 바로 그 관계 안에서 아버지의 일을 행하고, 생명을 주며, 아버지와 같이 공경받는다.

성경 인용은 Michael W. Holmes, ed., The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2010)을 기준으로 옮긴 필자 번역이다. 요한복음 헬라어 본문. © 2010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and Logos Bible Software, CC BY 4.0.

각주와 자료

  1. Philo, Allegorical Interpretation I.5-6, 공개 영어 본문.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Grand Rapids: Eerdmans, 1991), 247-249; Raymond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I-XII):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AB 29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8; 초판 1966), 216-218. 두 주석이 인용한 랍비 전승은 후대 자료이고, 필론은 동시대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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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249-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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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214, 218;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25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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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25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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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James D. G. Dunn, Did the First Christians Worship Jesus? The New Testament Evidence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10), 123. Dunn은 이 대목에서 공경과 예배의 관계를 질문형으로 남겨 두면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주장과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을 함께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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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215-216;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256-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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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215, 219-221;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257-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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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이그나티우스, 『마그네시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7.1, 그리스어 본문과 한국어 번역. 요한복음과의 연결에 대해서는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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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Gregory of Nazianzus, Oration 30.10-11, 공개 영어 본문. 상대의 독해는 이 강론이 반박하는 형태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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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Athanasius, Against the Arians III.35-36, 특히 III.36의 요한복음 5:26 해설. 공개 영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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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20.3-4, 8-10. 불가분한 활동과 요한복음 1:3의 연결은 20.3, 7-9, 신적 존재와 능력의 관계는 20.4, 8, 같은 일을 그와 같이 한다는 구문 해석은 20.9-10. 공개 영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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