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의 저자는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한 일을 하며, 인내와 감사로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그 감사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아버지가 하신 일과 아들의 지위를 함께 말한다. 교인들은 어둠의 권세에서 건짐받아 아들의 나라에 들어왔고, 그 아들 안에서 죄의 용서를 누린다.

15절부터 같은 아들을 하나님의 형상과 만물의 맏아들로 부른다. 만물의 창조와 보존, 교회의 삶과 부활, 충만과 화해가 그분에게 연결된다. 이 진술들은 구원받은 교회가 누구에게 속하며 누구를 의지하는지를 설명한다.

12-14절: 아버지가 건지시고 아들의 나라로 옮기심

“[우리는 여러분이] 빛 가운데 성도들의 유업에 참여할 수 있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드리기를 기도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 내어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는 속량, 곧 죄의 용서를 누립니다.” (12-14절, 필자 번역)1

감사하며라는 분사는 9절에서 시작한 기도에 이어진다. 저자는 교인들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고 열매를 맺으며 아버지께 감사하기를 기도한다. 유업에 참여할 수 있게 하신 분은 아버지다. 교인들의 자격은 그분이 주신 구원에서 비롯된다.

13절의 두 동사도 아버지의 행위를 서술한다. 건져 내셨다는 에뤼사토(ἐρρύσατο)와 옮기셨다는 메테스테센(μετέστησεν)은 어둠의 권세 아래 있던 사람들이 다른 통치에 속하게 된 일을 말한다. 그들이 들어간 나라는 아버지가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다. 아버지는 건져 내시는 분이며, 아들은 그 나라를 다스리시는 분이다.

아버지의 구원과 아들의 통치는 같은 사건에 속한다. 아들 안에서라는 표현은 14절의 속량과 죄의 용서를 설명한다. 속량은 여기서 죄의 용서로 구체화된다. 14절의 SBLGNT 본문에는 그의 피를 통하여라는 말이 없으며, 십자가의 피는 20절에서 명시된다.

아들은 이미 이름과 관계가 있는 분으로 소개된다. 뒤의 그분은이라는 관계대명사(ὅς)는 이 아들을 계속 가리킨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과 창조에 관계된 분 사이에 서술 대상이 바뀌는 표지는 없다.

15절 앞부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15절 앞부분)

형상이라는 에이콘(εἰκών)은 어떤 대상을 나타내는 모습이나 표상을 뜻한다. 여기서는 무엇의 형상인지 명시된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하나님과 아들은 관계 속에서 구별되며, 아들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분으로 서술된다.

던은 이 표현을 유대교의 지혜 언어에서 읽는다. 지혜는 하나님이 창조 세계에 자신을 알리고 뜻을 드러내시는 방식을 표현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십자가에 달리고 높임받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를 온전히 나타내는 분이라는 설명이다.2 던의 읽기에서 형상은 우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말하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된 교회의 고백과 연결된다.

노스컷은 형상을 통치 권한에 초점을 두어 읽는다. 창세기 1장의 형상과 다스림을 연결하여, 예수를 하나님의 대표 통치자로 설명한다. 보이지 않는다는 표현도 알 수 없는 신이라는 뜻보다 형상을 세워 섬기는 다른 신들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구별하는 말로 읽는다.3 그의 해석에서 아들은 그 하나님의 권한으로 세계를 다스리는 분이다.

바르트와 블랑케도 형상이라는 호칭을 뒤의 맏아들과 창조 진술에 연결한다. 아들이 하나님을 나타내신다는 설명에 머물지 않고, 그분이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메시아라는 관계를 강조한다.4 이 읽기는 13절의 아들의 나라와 16절의 권세들을 한 문맥에 놓는다.

이 단락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아들은 만물과 교회의 존재를 책임지는 분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호칭은 뒤의 창조와 화해에서 그 내용이 구체화된다.

15절 뒷부분: 모든 피조물의 맏아들

“모든 피조물의 맏아들이십니다.” (15절 뒷부분)

프로토토코스(πρωτότοκος)는 맏아들을 뜻한다. 가족 안에서는 출생의 선후와 상속의 특권이 함께 따라온다. 성경에서는 이 호칭이 특별히 선택받은 관계와 우월한 지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바르트와 블랑케는 출애굽기 4:22의 이스라엘과 시편 89:27의 왕에게 붙는 맏아들 호칭을 그런 용례로 제시한다.5

노스컷은 시편 89:27의 맏아들과 세상 왕들 가운데 가장 높은 분이라는 병렬을 주목한다. 골로새서에서는 그 왕적 지위의 범위가 모든 피조물로 확대된다는 설명이다.6 이 관계에서 맏아들은 처음 만들어진 물건을 뜻하는 호칭과 다르다.

모든 피조물의라는 속격만으로 그분이 피조물 가운데 첫 번째인지, 피조물보다 앞서며 그들을 다스리는 분인지 결정되지는 않는다. 본문은 다음 절의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ὅτι)로 그 호칭의 이유를 설명한다. 맏아들의 지위는 그분 안에서 이루어진 만물의 창조와 연결된다.

던은 이 호칭에 지혜 전승의 긴장이 함께 있다고 본다. 지혜는 하나님이 지으신 것으로 표현되면서 창조를 매개하는 것으로도 서술된다. 그는 초기의 지혜 언어가 후대의 창조주와 피조물 논쟁에서 요구한 존재론적 구분을 그대로 전제하지 않았다고 판단한다.7 그러나 이 단락에서 맏아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그 배경과 함께 16-17절의 설명을 따라 결정된다.

16절: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창조된 만물

“그분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좌들이든 지배권들이든 통치자들이든 권세들이든, 만물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6절)

창조되었다는 두 동사는 수동태다. 저자는 창조된 만물을 주어로 놓고, 아들이 그 창조에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를 세 전치사로 설명한다. 앞에서 아버지의 구원을 말한 문맥을 따라,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창조하셨다는 읽기가 자연스럽다. 바르트와 블랑케도 하나님을 이름으로 반복하지 않은 창조 진술로 읽는다.8

그분 안에서라는 엔 아우토(ἐν αὐτῷ)는 뒤의 그분을 통하여와 그분을 향하여로 설명된다. 디 아우투(δι’ αὐτοῦ)는 창조의 매개를, 에이스 아우톤(εἰς αὐτόν)은 창조가 향하는 목적을 표현한다. 바르트와 블랑케는 이 세 표현을 서로 관계없는 목록보다 첫 표현을 뒤의 두 표현이 풀어 주는 구조로 읽는다.9 아들은 창조의 목적이며 그 창조가 그분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창조된 범위도 구체적으로 열거된다.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말하여 사람들이 접하는 세계와 천상 세계를 포함한다. 왕좌와 지배권, 통치자와 권세는 그 만물 안에 놓인다. 바르트와 블랑케는 이 호칭들이 천상 권세와 지상의 통치 구조를 함께 포괄할 수 있다고 읽는다.10 권세들은 창조된 만물에 속하며, 아들은 그 창조가 이루어지는 분이다.

던도 이 절을 처음의 창조에 관한 서술로 읽는다. 그는 새 창조만을 가리킨다는 설명보다 유대교 지혜 전승에서 알려진 창조 언어가 더 잘 맞는다고 판단한다. 그 언어가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는 것은, 창조 때 활동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이제 그리스도에게서 온전히 알려지고 실현되었다는 뜻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11 이 해석에서는 과거에 개인으로 존재한 그리스도의 활동보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이 중심이다.

매그래스는 지혜가 율법에 적용된 유대교 자료를 비교하면서, 같은 언어가 예수에게 적용될 때도 지혜의 구현을 뜻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창조의 목적이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된다는 읽기와 새 창조의 읽기를 검토하면서, 선재하신 분이 사람이 되셨다는 해석도 가능한 대안으로 인정한다.12 그의 판단은 개인적 선재를 배제하는 결론보다 여러 읽기가 초기 유대교의 언어 안에서 가능하다는 데 있다.

본문의 관계대명사와 대명사들은 사랑받는 아들을 계속 가리킨다. 던의 해석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예수에게 나타났다는 연속성을 설명한다. 아들이 실제로 창조를 매개했다고 읽으면, 그분을 통하여라는 표현의 주체가 처음부터 같은 아들로 유지된다. 다음 절의 먼저 계심과 만물의 지속도 그 아들의 활동으로 이어진다.

17절: 만물보다 먼저 계시며 만물을 유지하시는 분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며, 만물은 그분 안에서 함께 유지됩니다.” (17절)

그분 자신이라는 아우토스(αὐτός)가 문장 앞에 놓인다. 같은 아들을 다시 강조하면서 그분과 만물의 관계를 두 진술로 설명한다. 먼저라는 프로(πρό)는 시간의 앞섬을 표현할 수 있으며, 이 문맥에서는 창조를 매개하는 분의 지위와 연결된다.

바르트와 블랑케는 이 구절을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번역하면서도 시간적 선재를 포함한다. 창조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이 그분의 앞섬과 통치를 함께 설명한다는 것이다.13 던은 이 앞섬을 그리스도에게서 알려진 하나님의 지혜에 돌릴 가능성을 유지한다.14 해석의 차이는 먼저라는 낱말 자체보다, 그 앞섬의 주체를 아들로 읽을지 그리스도에게 구현된 지혜로 읽을지에 있다.

쉬네스테켄(συνέστηκεν)은 함께 서 있고 유지되는 상태를 표현하는 완료형이다. 만물의 지금 존재도 그분에게 의존한다. 바르트와 블랑케는 이 진술에 창조 세계의 유지와 그리스도를 향한 목적이 함께 들어 있다고 읽는다.15 이 단락의 아들은 창조의 매개이며, 지금도 만물의 존재가 의존하는 분이다.

보컴은 신약의 이런 창조 진술을 한 하나님의 고유한 활동에 예수를 포함하는 언어로 읽는다.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말씀을 통한 창조는 다른 피조물에게 맡긴 작업을 뜻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창조 활동을 설명한다는 주장이다.16 이 관점에서 아들이 창조와 보존을 행하시는 것은 창조주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18절 앞부분: 몸인 교회의 머리

“그분은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18절 앞부분)

그분 자신이라는 말이 반복된다.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을 유지하시는 분이 교회의 머리이시다. 저자는 몸이 무엇인지 교회라는 말로 밝힌다. 창조 세계를 설명하던 단락이 교회가 그분에게 속한다는 진술에 이른다.

머리와 몸의 관계는 2:19에서 다시 설명된다. 몸은 머리에 연결되어 공급을 받고 함께 결합되며, 하나님이 주시는 성장으로 자란다. 바르트와 블랑케는 그 연결에 따라 1:18에서도 교회의 존재와 삶을 돌보시는 그리스도를 읽는다.17 그분은 교회의 위에 계신 분이면서 몸의 삶을 유지하는 분이다.

18절 뒷부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심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맏아들이십니다. 이는 그분이 모든 것에서 으뜸이 되시려는 것입니다.” (18절 뒷부분)

시작이라는 아르케(ἀρχή)는 시간의 시작과 근원, 우월한 지위나 통치를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맏아들이라는 말과 이어진다. 아들의 부활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며, 그분은 그 삶에서 으뜸이시다. 바르트와 블랑케는 두 호칭을 통치자와 부활한 맏아들이라는 왕적 지위에 연결한다.18

15절은 모든 피조물의라고 했고, 18절은 죽은 이들 가운데서라는 에크 톤 네크론(ἐκ τῶν νεκρῶν)을 사용한다. 아들은 죽음을 겪고 살아나신 분이다. 창조를 매개하는 아들과 죽음에서 살아난 아들은 같은 분이며, 두 맏아들 호칭이 그분의 창조와 구원에 관한 관계를 각각 설명한다.

으뜸이 되시려는이라는 목적절에는 게네타이(γένηται), 곧 되다라는 동사가 쓰인다. 부활을 거쳐 이루어진 새로운 사건을 서술한다. 던은 이 목적절에서 높임받은 그리스도의 지위가 부활의 결과로 주어졌다고 읽고, 그 관점에서 단락 전체의 우월성을 설명한다.19 바르트와 블랑케는 이미 창조를 매개하신 분의 통치가 죽음과 부활에서 시작되고 하나님에 의해 공적으로 확인되었다고 읽는다.20

18절의 되심은 같은 아들이 부활에서 얻은 지위를 설명한다. 창조를 매개하고 만물을 유지하시는 분이 죽음에서 살아나 교회의 으뜸이 되셨다. 창조주 아들이 인간의 죽음을 겪고 새로운 삶을 여신 사건이다.

19절: 모든 충만이 그분 안에 머무름

“[하나님께서는] 모든 충만이 그분 안에 머무르게 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19절)

기뻐하셨다는 에우도케센(εὐδόκησεν)은 누가 무엇을 원하였는지를 묻는 동사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이 문장에 직접 쓰이지 않는다. 모든 충만을 주어로 읽을 수도 있고, 하나님을 생략된 주어로 읽으며 모든 충만이 머무는 일을 그분이 원하셨다고 읽을 수도 있다. 바르트와 블랑케는 양쪽의 문법적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하나님을 행위 주체로 읽는 설명을 선호한다.21 위 번역의 대괄호는 그 생략된 주어를 보충한 것이다.

충만이라는 플레로마(πλήρωμα)에 모든이라는 말이 붙는다. 2:9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몸으로 머문다고 설명한다. 바르트와 블랑케는 1:19의 충만과 머묾을 성전과 시온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언어에 연결한다.2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의 일부만을 받는 분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던은 이 충만을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는 말로 읽는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현존이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온전히 나타났으며, 그리스도가 그 능력을 알아보는 기준이 되었다는 해석이다.23

충만이 머문다는 문장에는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가 유지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아들 안에 충만이 머문다. 이 관계는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라는 설명과 다르다. 동시에 만물의 창조와 보존을 서술한 앞 문맥은 그 충만을 교인에게 주어지는 일반적인 은사보다 넓은 관계에서 읽게 한다.

20절: 십자가의 피로 이루신 만물의 화해

“또 그분을 통하여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만물을 자신과 화해시키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20절)

화해시키다라는 아포카탈락사이(ἀποκαταλλάξαι)는 19절의 기뻐하셨다는 동사에 이어지는 부정사다. 하나님은 충만이 아들 안에 머무는 일과 아들을 통하여 만물을 화해시키는 일을 원하신다. 평화를 이루셨다는 남성 분사(εἰρηνοποιήσας)도 그 행위를 설명한다. 바르트와 블랑케는 화해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읽는다.24

누구를 향한 화해인지에는 해석이 갈린다. 16절에서 그리스도를 가리킨 에이스 아우톤이 20절에도 나온다. 바르트와 블랑케는 이 반복을 따라 하나님이 만물을 그리스도에게 화해시키신다고 읽는다.25 크렌치드워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을 자신에게 화해시키신다는 읽기와 그리스도를 향한 화해를 함께 검토한다.26 위 번역은 하나님을 화해의 주체와 목적으로 읽었다. 두 설명 모두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일을 서술하며, 아버지와 아들을 서로 교환 가능한 이름으로 쓰지 않는다.

화해의 범위는 다시 만물이며, 땅과 하늘이 함께 열거된다. 창조를 설명한 16절과 같은 범위다. 크렌치드워는 이 반복에 따라 십자가의 화해를 창조의 지속과 완성,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지는 세계로 읽는다.27 창조와 구원은 같은 아들에게 연결된다.

그 화해는 아들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만물의 주권을 설명한 단락이 그분의 죽음을 화해의 근거로 말한다. 바르트와 블랑케는 피가 폭력적인 죽음을 표현하며, 이 편지에서는 예수의 실제 성육신과 죽음이 두드러진다고 읽는다. 그들은 희생 제사의 함의를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 의미만을 중심에 놓지 않는다.28

크렌치드워는 당시 통치자가 적을 제거하여 세운 평화와, 아들의 고난과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진 평화를 비교한다. 그에게 십자가는 화해를 위한 희생이며 수치와 고통이 있는 죽음이다.29 단락의 주님은 만물과 떨어져 통치하시는 분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그분의 죽음이 만물의 평화와 연결된다.

이 우주적 화해에는 악한 권세의 통치가 끝나는 일도 포함된다. 2:15은 통치자들과 권세들이 무장 해제되어 공개적으로 드러난 일을 말한다. 교인들에게 이루어진 화해는 1:21-23에서 죄와 적대의 해소, 거룩한 삶, 믿음과 소망을 지키는 관계로 설명된다. 세계 전체가 그리스도의 통치와 평화에 속한다는 진술과 각 사람이 그 생명에 참여하는 과정이 함께 서술된다.

교부들의 해석

크리소스토무스: 형상의 닮음과 창조된 권세의 구별

크리소스토무스는 『골로새서 강해』 3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아버지에 대한 정확한 닮음으로 읽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도 보이지 않는다고 추론하며, 창조된 존재가 창조주의 형상이라는 호칭을 엄밀하게 가질 수 있는지 묻는다.30 그의 설명은 형상을 대표 통치권이나 계시에 초점을 두어 읽는 현대 해석보다 본성의 닮음에 무게를 둔다.

그는 맏아들을 처음 창조된 존재로 읽는 반론에 답하면서,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고 그분 안에 유지된다는 말을 근거로 든다.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먼저 계시며 천사들의 존재도 그분에게 의존한다. 강해는 권세들의 열거에 성령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명시한다.31 이 해석에서 성령은 아들이 창조한 천상 권세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의 강해 영어 번역에는 18절을 설명하면서 첫열매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맏아들이라는 인용이 함께 나온다. SBLGNT의 18절은 시작(ἀρχή)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맏아들로 읽힌다. 크리소스토무스의 첫열매 해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다른 이들의 부활을 이끈다는 점을 강조한다.32

20절의 하늘에 있는 것들의 화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적대 때문에 천사들이 인간을 거슬렀다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이 하늘에 받아들여진 일로 설명한다.33 천사들의 적대와 인간의 하늘 진입은 그가 다른 성경 본문을 연결하여 제시한 설명이며, 골로새서 1:20 자체에는 그 사건들이 개별적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아타나시우스: 아버지의 독생자와 피조물의 맏아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파 반박』 2.62에서 독생자와 맏아들이 각각 다른 관계를 설명한다고 논한다. 독생자는 아버지에게서 나신 관계를, 맏아들은 피조 세계로 낮추어 오셔서 많은 형제를 얻으신 관계를 말한다는 것이다.34 이 해석에서 만물의 맏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신 방식의 직접적인 명칭과 다르다.

2.63에서는 아들이 피조물이면서 그분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생겨나고 유지된다는 설명이 모순이라고 반박한다. 만물을 창조한 말씀은 그 만물과 구별된 창조주라는 논증이다.35 그는 맏아들의 속격을 피조물에 포함되는 부분 관계로 읽는 설명을 16-17절의 창조와 보존에 비추어 거절한다.

2.64-66에서는 말씀의 낮아지심과 새 창조를 연결한다. 처음에 피조물이 생겨날 수 있도록 그들을 붙드신 말씀은, 사람이 되어 죽음을 겪고 부활하심으로 새 삶의 시작이 되신다.36 아타나시우스에게 창조와 구원에서의 맏아들 호칭은 피조물과 맺는 말씀의 관계를 설명하며, 말씀의 신적 본성이 처음 생긴 시점을 말하지 않는다.

신적 지위와 동일 본질의 근거

이 단락의 선재 근거는 맏아들이라는 호칭 하나에 있지 않다. 같은 아들을 통하여 하늘과 땅의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며 지금도 만물을 유지하신다. 그 아들이 죽음에서 살아나셨고 그분의 십자가로 화해가 이루어졌다. 아들의 창조와 구원 활동을 같은 분의 이야기로 읽는 해석이 이 지시 대상의 연속성을 잘 설명한다.

던은 지혜 언어에서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을 읽는다.37 매그래스는 지혜가 예수에게 구현되었다는 해석과 선재하신 분이 사람이 되셨다는 해석을 함께 검토한다.38 유대교에서는 지혜 언어가 하나님의 능력과 율법에도 쓰였다. 그 비교를 인정하더라도 골로새서는 아버지가 사랑하시는 아들을 관계대명사와 대명사로 계속 가리키며 창조와 십자가를 연결한다. 지혜의 언어가 아들에게 적용되었다는 사실은 그 아들의 인격적 선재와 양립한다.

맏아들을 가장 먼저 창조된 천상 존재로 읽으면 그분의 앞섬과 높은 지위는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은 모든 천상 권세를 창조된 만물에 넣고, 아들을 그 만물이 생겨나고 계속 존재하는 관계의 근거로 놓는다. 가장 높은 피조물이라는 지위를 추가하는 것보다, 아들이 아버지의 창조 활동에 속한 분이라고 읽는 해석이 그 구별을 더 잘 유지한다.

형상과 충만만으로 같은 본질의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불리고, 하나님이 사람이나 성전에 거하신다는 말도 있다. 이 단락에서는 그 형상과 충만이 모든 만물의 창조와 보존, 부활과 화해를 행하시는 아들에게 귀속된다. 아들이 어느 한 영역의 권한만을 맡은 대표자인지 판단할 때에는 그 전체 범위가 관계된다.

동일 본질의 논증은 이 아들의 활동을 한 하나님의 활동 안에 놓는 데서 이루어진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고 화해시키신다. 두 분을 서로 독립된 창조주로 나누면, 아버지가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의 창조와 화해라는 관계를 설명하지 못한다. 아들을 피조물로 두면 창조된 만물과 그 존재를 유지하는 분의 구별이 약해진다. 아버지와 아들이 구별되면서 한 신성을 온전히 공유한다는 판단은, 두 분의 구별과 아들의 창조주 지위를 한 하나님의 활동 안에서 함께 설명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지니시는 신성은 하나이며 분할되지 않는다. 보컴은 예수의 창조 활동을 하나님의 고유한 정체성에 속한 것으로 읽는다.39 크리소스토무스와 아타나시우스는 만물의 창조와 보존을 근거로 아들을 피조물과 구별한다.40 두 분이 온전히 공유하는 신성 안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 일하시고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다. 이 부자 관계에서 동일 본질과 위격의 구별이 함께 설명된다.

아타나시우스는 독생자에 관한 다른 본문을 연결하여 영원한 나심을 설명한다. 골로새서의 맏아들은 그에게 창조와 구원에서 피조물과 맺는 관계를 가리킨다.41

12-20절은 성령의 활동을 직접 서술하지 않으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아버지가 건져 내신 교회는 아들의 나라에 속하고, 만물을 유지하시는 그 아들을 머리로 모신다. 교회가 누리는 용서와 삶은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존한다. 저자가 기도한 감사는 그 구원과 통치에 대한 응답이다.

각주와 자료

  1. SBLGNT, 골로새서 1:9-20. 기준 본문은 고정 판본의 골로새서다. 12절의 감사는 9절의 기도에서 이어지는 분사이며, 위 번역은 기도의 주절을 보충했다. 이후 성경 인용도 같은 판본을 기준으로 옮긴 필자 번역이다. © 2010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and Logos Bible Software, CC BY 4.0.

    본문으로

  2. James D. G. 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 A New Testament Inquiry into the Origins of the Doctrine of the Incarnation, 2nd ed. (London: SCM Press, 1989; reprinted 1992), 188-189.

    본문으로

  3. Christopher S. Northcott, “‘King of Kings’ in Other Words: Colossians 1:15a as a Designation of Authority Rather Than Revelation,” Tyndale Bulletin 69, no. 2 (2018): 205-224, 특히 218-220, 223-224. 공개 원문. DOI: 10.53751/001c.27690.

    본문으로

  4. Markus Barth and Helmut Blanke, Colossians: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rans. Astrid B. Beck, Anchor Yale Bible 34B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5), 195-197. 설치 판본의 표제지와 판권은 초판 하드커버 Doubleday 1994, 첫 페이퍼백 2005를 기록한다.

    본문으로

  5. Barth and Blanke, Colossians, 194-195.

    본문으로

  6. Northcott, “‘King of Kings’ in Other Words,” 221-224. 시편 89:27은 그리스어 시편 88:28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7. 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 189.

    본문으로

  8. Barth and Blanke, Colossians, 198-199.

    본문으로

  9. Barth and Blanke, Colossians, 197-199.

    본문으로

  10. Barth and Blanke, Colossians, 200-202.

    본문으로

  11. 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 189-190, 193-194.

    본문으로

  12. James F. McGrath, The Only True God: Early Christian Monotheism in Its Jewish Context (Urbana and Chicago: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2009), 44-47. Perlego 판본. 율법과 지혜의 비교는 45-46쪽, 선재 해석과 다른 가능성은 46-47쪽이다.

    본문으로

  13. Barth and Blanke, Colossians, 203-204.

    본문으로

  14. 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 191.

    본문으로

  15. Barth and Blanke, Colossians, 204-205.

    본문으로

  16. Richard Bauckham, Jesus and the God of Israel: God Crucified and Other Studies on the New Testament’s Christology of Divine Identity (Grand Rapids: Eerdmans, 2009), 26, 29.

    본문으로

  17. Barth and Blanke, Colossians, 205-207.

    본문으로

  18. Barth and Blanke, Colossians, 207-209.

    본문으로

  19. 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 191-192.

    본문으로

  20. Barth and Blanke, Colossians, 208-210.

    본문으로

  21. Barth and Blanke, Colossians, 209-212.

    본문으로

  22. Barth and Blanke, Colossians, 212-213.

    본문으로

  23. 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 192-194.

    본문으로

  24. Barth and Blanke, Colossians, 214-215.

    본문으로

  25. Barth and Blanke, Colossians, 214-215.

    본문으로

  26. Janusz Kręcidło, “The Reconciliation of the World Through the Blood of Christ’s Cross as the Completion of the Work of Creation (Col 1:15-20),” Verbum Vitae 39, no. 4 (2021): 1133-1157, 특히 1150-1151. 출판사 레코드, 공개 원문. DOI: 10.31743/vv.12591.

    본문으로

  27. Kręcidło, “The Reconciliation of the World,” 1150-1153.

    본문으로

  28. Barth and Blanke, Colossians, 217-218.

    본문으로

  29. Kręcidło, “The Reconciliation of the World,” 1151-1152.

    본문으로

  30. John Chrysostom, Homilies on Colossians 3, 1:15의 형상 해설, 공개 영어 본문.

    본문으로

  31. Chrysostom, Homilies on Colossians 3, 1:15-17의 맏아들, 권세, 창조와 보존 해설.

    본문으로

  32. Chrysostom, Homilies on Colossians 3, 1:18의 첫열매와 부활 해설. SBLGNT 1:18의 ἀρχή와 이 영어 강해 번역의 Firstfruits를 대조했다.

    본문으로

  33. Chrysostom, Homilies on Colossians 3, 1:20의 하늘과 땅의 화해 해설.

    본문으로

  34. Athanasius, Discourses Against the Arians 2.62, 공개 영어 본문.

    본문으로

  35. Athanasius, Discourses Against the Arians 2.63.

    본문으로

  36. Athanasius, Discourses Against the Arians 2.64-66.

    본문으로

  37. 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 190-194.

    본문으로

  38. McGrath, Only True God, 45-48.

    본문으로

  39. Bauckham, Jesus and the God of Israel, 26, 29.

    본문으로

  40. Chrysostom, Homilies on Colossians 3; Athanasius, Discourses Against the Arians 2.62-66.

    본문으로

  41. Athanasius, Discourses Against the Arians 2.62-64.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