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진술로 시작한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제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저자는 그 아들이 어떤 분인지 설명하면서 창조, 하나님의 영광, 죄의 정결, 오른편의 보좌를 함께 서술한다.

아들은 하나님에게서 상속자의 지위를 받으신다. 동시에 하나님이 그분을 통하여 세계를 지으셨고, 그분이 만물을 붙드신다고 서술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 구원 사역을 거친 아들의 높임, 창조주로서의 지위가 같은 단락에 놓인다. 이어지는 구약 인용은 천사들의 섬김과 아들의 통치를 대조하며 그 관계를 설명한다.

1-2절 앞부분: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은 옛날 여러 부분으로, 여러 방식으로 예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마지막 날들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2절 앞부분, 필자 번역)1

옛날이라는 팔라이(πάλαι)와 이 마지막 날들이 두 시기를 구별한다. 조상들과 우리는 말씀을 듣는 두 집단이며, 예언자들과 아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두 방식에 속한다. 두 시기의 주어는 같은 하나님이다. 이전의 말씀과 아들을 통한 말씀 사이에는 시간과 전달 방식의 변화가 있다.

애트리지는 관사 없이 쓰인 엔 휘오(ἐν υἱῷ)를 아들이신 분을 통하여라는 뜻으로 설명한다. 여러 아들 중 하나를 골랐다는 표현보다 마지막 계시를 전하는 분의 아들로서의 지위를 강조한다는 것이다.2 예언자들은 복수로 나오고, 아들은 한 분으로 제시된다. 저자는 그분의 말만을 따로 소개하지 않고, 그분이 행하신 죄의 정결과 좌정까지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연결한다.

하나님과 아들은 문장의 두 주체로 구별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 말씀은 아들을 통하여 주어진다. 5절부터 하나님이 아들에게 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므로, 서두의 하나님은 이 관계에서 아버지로 드러난다.

2절 뒷부분: 상속자와 창조의 매개

“하나님은 그분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셨고, 그분을 통하여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2절 뒷부분, 필자 번역)

세우셨다는 에테켄(ἔθηκεν)은 하나님이 아들에게 주신 지위를 서술한다. 상속자인 클레로노모스(κληρονόμος)는 뒤의 왕적 보좌와 연결된다. 만물은 아들의 통치에 속하게 된다.

같은 아들에게 창조도 귀속된다. 그분을 통하여라는 디 후(διʼ οὗ)의 관계대명사는 상속자로 세워진 아들을 가리킨다. 아들의 상속은 구원 역사의 완성과 관계되고, 창조는 그 역사에 앞선 활동이다. 저자는 세계가 생긴 일과 그 세계의 상속을 같은 분에게 연결한다.

세계를 뜻하는 아이오나스(αἰῶνας)는 시대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애트리지는 여기서 우주라는 공간적 의미를 우선한다.3 코커릴은 시대들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표현으로 읽는다.4 두 해석 모두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지으신 범위를 인간의 구원 공동체에 한정하지 않는다. 10절의 땅과 하늘은 그 창조가 피조 세계를 포함한다는 점을 구체화한다.

던은 이런 언어를 개인으로 선재한 아들의 활동 외에, 예수에게서 실현된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지혜로 설명할 가능성을 검토한다. 히브리서의 아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 안에 미리 있는 분으로 읽힐 수 있으며, 이 표현만으로 개인적 선재가 확립되지는 않는다는 판단이다.5

피어스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인용 연쇄와 창조 진술을 함께 읽어 그 설명에 반대한다. 계획이나 지혜의 추상적 내용보다,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말씀을 듣는 아들이 창조의 주체로 등장한다는 것이다.6 2절에서도 상속자로 세워진 분과 창조가 그분을 통하여 이루어진 분은 같은 관계대명사로 연결된다. 구원 역사의 아들과 창조의 아들을 서로 다른 대상으로 나누는 표지는 없다.

3절: 하나님의 광채와 본질의 형상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며, 그분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내는 형상입니다.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스스로 죄를 깨끗하게 하신 뒤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3절, 필자 번역)

광채라는 아파우가스마(ἀπαύγασμα)는 빛에서 뻗어 나오는 광채와 빛을 반영하는 모습 양쪽으로 설명되어 왔다. 애트리지는 어휘의 두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이 비유가 아들과 하나님의 영광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표현한다고 읽는다.7 코커릴도 단어의 용례만으로 두 의미를 결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하며, 창조와 뒤의 형상 표현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는 광채로 읽는다.8

형상이라는 카락테르(χαρακτήρ)는 인장에 새겨진 모양과 그 모양이 정확하게 찍힌 자국을 연상시킨다. 무엇의 형상인지도 명시된다. 하나님의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 곧 그분의 실제 존재 또는 본질이다. 애트리지와 코커릴은 여기서 이 단어를 하나님의 근본적인 실재로 읽는다. 4세기 삼위일체 논의에서 발전한 개별 위격이라는 기술적 의미는 이 구절의 뜻과 다르다.9

두 비유는 아들을 하나님의 영광과 실제 존재에 온전히 대응하는 분으로 설명한다. 광채와 그것이 드러내는 영광, 인장 자국과 그것이 표현하는 실재는 관계 속에서 함께 제시된다. 코커릴은 한 비유에는 공통 신성을, 다른 비유에는 위격의 구별을 각각 배정하는 해석에 반대한다.10 두 표현이 함께 아들의 하나님 계시를 설명한다.

이 진술에는 창조와 만물의 보존이 이어진다. 붙드신다는 페론(φέρων)은 떠받치거나 운반하는 행동을 표현한다. 애트리지는 만물을 계속 유지하는 활동으로 읽는다.11 코커릴은 만물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목적을 향하여 이끄는 활동으로 읽는다.12 아들은 처음에 창조를 돕고 사라진 분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현재분사는 그분이 만물을 붙드시는 분임을 서술한다.

같은 분이 죄의 정결을 이루고 오른편에 앉으신다. 정결을 이루셨다는 분사와 앉으셨다는 동사는 구원 사역과 그 뒤의 좌정을 연결한다. 애트리지는 이 두 진술을 희생적 죽음과 높임이라는 히브리서의 중심 주제로 읽는다.13 창조와 만물의 보존을 행하시는 아들이 인간의 죄를 정결하게 하시고 왕적 지위에 앉으셨다. 저자는 그 두 활동을 한 분의 이야기로 서술한다.

4절: 천사보다 뛰어나게 되심과 이름의 상속

“그분은 천사들보다 훨씬 뛰어나게 되셨습니다. 그들보다 더 뛰어난 이름을 상속하셨기 때문입니다.” (4절, 필자 번역)

뛰어나게 되셨다는 크레이트톤 게노메노스(κρείττων γενόμενος)는 새로운 상태와 비교를 표현한다. 상속하셨다는 케클레로노메켄(κεκληρονόμηκεν)은 받은 이름을 현재 가지고 계신 상태와 연결된다. 3절의 정결과 좌정 뒤에 나온 말이므로, 아들의 구원 사역과 높임이 비교의 문맥을 이룬다.

애트리지는 상속한 이름을 2절과 5절의 아들로 읽는다. 그는 되셨다는 말에서 아들이 처음 존재하게 된 시점을 찾기보다 천사들보다 뛰어난 현재의 지위를 강조한다.14 코커릴도 이름을 아들로 읽고, 이미 천사보다 뛰어난 아들이 성육신과 죽음과 높임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어 새로운 방식으로 그 우월성을 행사한다고 설명한다.15

보컴은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 아들은 상속하는 분의 지위를 가리키고, 상속한 이름은 아버지의 고유한 신적 이름이라고 읽는다. 그는 이어지는 하나님과 주라는 호칭, 아버지와 함께 행하는 보편적 통치에 그 판단을 연결한다.16

이름의 구체적인 뜻에는 차이가 있지만, 두 읽기 모두 상속을 지상의 존재가 처음 신성을 얻은 일로 설명하지 않는다. 2-3절에서 이미 아들을 통한 창조와 만물의 보존이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받은 왕적 지위와 창조에 앞선 아들의 존재는 단락 안에서 함께 설명된다.

5절: 나의 아들과 오늘의 나심

“하나님이 어느 천사에게 ‘너는 나의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5절, 필자 번역)

어느 천사에게라는 물음은 4절의 비교를 성경 인용으로 설명한다. 아들은 하나님이 직접 너라고 부르시는 분이다. 저자는 시편 2:7과 사무엘하 7:14를 나란히 놓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서술한다.

애트리지는 두 본문을 이스라엘 왕정의 언어로 설명한다. 시편 2편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에게 아들이라고 선언하는 본문이며, 사무엘하 7장의 약속은 다윗의 후계자와 하나님이 맺는 관계를 말한다. 히브리서는 그 왕적 언어를 서두에서 창조주로 서술한 아들에게 적용한다.17

나의 아들이라는 직접적인 부름은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을 유지한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라는 약속에는 앞으로 이루어질 왕적 관계도 담겨 있다. 이 약속의 왕적 지위는 1:2에서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진 세계의 창조보다 뒤에 놓인다.

코커릴은 오늘을 3-4절의 좌정과 이름의 상속에 연결하여, 아들이 높임받아 왕적 지위를 행사하는 날로 읽는다. 이 해석에서 시편의 나심은 구원 사역 뒤에 이루어진 즉위의 언어다. 영원한 아들의 존재와 역사 속에서 받은 왕권은 함께 유지된다.18

피어스는 오늘을 하나님의 계속되는 현재로 읽어 영원한 나심과 연결한다. 피어스는 히브리서 3-4장에서 현재의 독자에게도 열려 있는 오늘과, 13:8의 어제와 오늘과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리스도를 근거로 제시한다.19

히브리서 3:13의 오늘은 독자들이 서로 권면하며 응답할 수 있는 기회를 가리킨다. 그 기회는 오늘이라 불리는 동안 주어진다. 13:8은 어제, 오늘, 영원을 함께 열거하여 그리스도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동일하다고 말한다. 이 용례들에서 오늘이라는 낱말 자체가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현재를 뜻하지는 않는다.

1:3-4의 정결과 좌정, 상속의 순서를 따라 읽으면 오늘은 아들의 존재가 생긴 때보다 그분의 구원 사역이 왕적 높임에 이른 때를 가리킨다. 아들이 창조 이전에도 계셨다는 근거는 2절의 창조와 10절의 처음에 지으심에 있다. 5절의 왕적 선언은 그 아들이 구원 역사에서 받은 지위를 설명한다.

6절: 맏아들과 모든 천사의 경배

“또 하나님은 맏아들을 세상으로 들여오실 때 ‘하나님의 모든 천사는 그에게 경배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6절, 필자 번역)

맏아들인 프로토토코스(πρωτότοκος)는 상속권과 우월한 지위를 나타낸다. 아들은 천사들이 경배하는 대상이다. 경배하라는 명령의 주어는 모든 천사이며, 그에게라는 대명사는 하나님이 들여오시는 맏아들을 가리킨다.

인용문은 시편 97:7의 천상 존재들의 경배와도 비슷하다. 코커릴은 문장 첫머리의 카이(καί)와 3인칭 복수 명령을 근거로 신명기 32:43의 그리스어 전승을 직접적인 출처로 읽는다. 그는 송가 2:43과 관련 전승을 대조하여 하나님의 아들들과 하나님의 천사들이 서로 다른 순서로 나타나는 본문을 설명한다.20 이 비교에서 신명기의 인간 백성과 천상 존재들에 관한 말씀이 히브리서의 아들과 천사들의 관계에 적용된다.

언제 세상으로 들여오시는지도 해석이 갈린다. 다시라는 팔린(πάλιν)을 들여오심에 연결하면 두 번째 진입을 뜻하고, 인용을 더하는 말로 읽으면 또 말씀하신다가 된다. 애트리지는 이 말을 인용 연결로 읽으며, 오이쿠메네(οἰκουμένη)의 통상적인 거주 세계라는 뜻을 따라 성육신 때의 들어오심을 선호한다.21

코커릴과 피어스는 높임받아 하늘의 구원 세계에 들어가는 일로 읽는다. 이들에게서는 2:5의 장차 올 세계와 1장의 좌정이 해석의 중심이다. 맏아들은 죽음 뒤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통치 세계에 들어가고, 천사들은 그분을 경배한다.22 코커릴의 1999년 논문은 신명기의 심판 문맥에서 재림이 잘 맞는다고 논하면서도 높임의 가능성을 남겼고, 2012년 주석에서는 높임을 채택한다.23

경배 동사는 왕이나 대표자에게 몸을 굽히는 행동에도 쓰일 수 있다. 이 문장에서 그 행동은 모든 천사가 맏아들에게 행하도록 명령받는다. 이어지는 인용은 경배받는 아들과 경배하는 천사들이 각각 어떤 존재인지를 창조와 통치의 언어로 설명한다.

7절: 바람과 불꽃으로 일하는 천사들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분은 자신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자신의 종들을 불꽃으로 만드신다’고 말씀하십니다.” (7절, 필자 번역)

천사들에 관하여라는 프로스 멘 투스 앙겔루스(πρὸς μὲν τοὺς ἀγγέλους)는 다음 절의 아들에 대한 말씀과 대응한다. 여기서 천사들은 말씀을 받는 왕보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부리시는 종들로 등장한다.

프뉴마타(πνεύματα)는 영들과 바람들을 모두 뜻할 수 있다. 불꽃과 병렬되므로 이 인용에서는 바람이라는 뜻이 자연스럽다. 애트리지는 이 표현을 변하는 천사들의 활동과 뒤의 영원한 아들의 대조로 읽는다.24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존재이며, 그들의 봉사는 바람과 불꽃의 모습으로 서술된다.

만드시는 분이라는 호 포이온(ὁ ποιῶν)의 주체를 아버지로 읽을 수 있다. 피어스와 보컴은 인용 연쇄가 아들의 창조 활동을 계속 설명한다고 보아 아들로 읽는다.25 어느 주체로 읽어도 이 문장에서 천사들은 만들어지고 부림받는 쪽에 속한다. 다음 인용의 아들은 영원한 보좌에 앉아 다스리는 분으로 서술된다.

8절: 하나님이라는 호칭과 영원한 보좌

“아들에게는 ‘하나님이여, 당신의 보좌는 영원무궁합니다. 당신의 나라를 다스리는 홀은 올곧은 홀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8절, 필자 번역)

아들에게라는 프로스 데 톤 휘온(πρὸς δὲ τὸν υἱόν)이 인용의 대상을 명시한다. 시편 45:6-7의 왕적 찬양이 이 아들에게 적용된다. 보좌와 올곧은 홀은 그분의 통치를 설명한다.

호 테오스(ὁ θεός)는 형태상 주격이다. 그리스어에서 관사가 붙은 주격은 직접 부르는 호칭으로도 쓰인다. 애트리지와 코커릴은 이 용례와 인용의 문맥을 따라 하나님이여라는 호칭을 채택한다.26 주격의 술어로 읽으면 하나님은 당신의 보좌라는 문장이 된다.

후자의 읽기에서는 하나님이 왕권을 받치시는 분으로 서술된다. 호격의 읽기에서는 하나님이 아들을 하나님이라고 직접 부르신다. 아들을 향한 인용이라는 도입, 당신의 보좌와 당신의 나라라는 2인칭 표현이 직접 부르는 읽기에 잘 연결된다.

당신의 나라에서 당신은 기준 본문의 수(σου)를 따른다. 그의 나라라는 아우투(αὐτοῦ)를 가진 전승도 있으며, 애트리지는 당신의 나라를 원래 읽기로 선호한다.26 그의 나라를 읽더라도 앞의 당신의 보좌는 그대로 남는다. 인용의 도입과 첫 문장은 계속 아들을 향한 말씀의 틀을 이룬다.

하나님이라는 호칭의 뜻은 그 호칭이 붙은 보좌와 함께 구체화된다. 이 보좌는 천사들이 수행하는 일과 대조되는 영원한 통치의 자리다. 10절에서는 그 통치자가 처음에 땅과 하늘을 지으신 분으로 불린다.

9절: 아들의 하나님과 기름부음

“당신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곧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의 동료들보다 당신에게 기쁨의 기름을 더 부으셨습니다.” (9절, 필자 번역)

기름을 부으신 분과 기름부음을 받는 분은 구별된다. 앞 절에서 하나님이라고 부른 아들에게 이제 당신의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한다. 이 관계는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행동을 계속 서술한다.

첫 번째 호 테오스를 기름을 부으신 하나님이라는 주어로 읽고, 두 번째 호 테오스 수(ὁ θεός σου)를 곧 당신의 하나님이라는 동격으로 읽으면 위의 번역이 된다. 보컴은 이 읽기를 채택한다.27 코커릴은 첫 번째 표현을 다시 아들을 부르는 호격으로 읽어 하나님이여, 당신의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셨다로 번역한다.28 두 읽기 모두 아들은 기름부음을 받는 분이고, 그분의 하나님은 기름을 부으시는 분이다.

코커릴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한 행동을 아들의 지상 순종에 연결한다. 그 순종을 거친 아들은 높임의 왕적 기름부음을 받는다. 그는 동료들을 천사들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읽는 편이 히브리서의 문맥에 잘 맞는다고 판단한다.29 2:10-18에서 아들은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고 그들과 같은 살과 피에 참여한다.

당신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한 아들의 역사와 관계된다. 같은 단락은 그 아들이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고 세계를 지으신 분이라고 서술한다. 기름부음을 받는 관계와 창조주로서의 지위가 함께 있는 까닭은 이 아들이 구원 사역을 행한 뒤 왕적 통치를 맡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10절: 처음에 땅과 하늘을 지으신 주

“또 ‘주님, 당신은 처음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고, 하늘은 당신의 손으로 지으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10절, 필자 번역)

또라는 카이(καί)가 시편 102:25-27의 인용을 더한다. 새로운 화자나 새로운 대상을 밝히는 도입문은 없다. 8절의 아들에게라는 틀 뒤에 9절과 10절의 당신이 이어진다. 피어스는 이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계속 말씀하시는 인용 연쇄로 읽는다. 원래 하나님을 향한 시편의 기도가 여기서는 하나님이 아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다시 배치된다는 것이다.30

그 읽기에서 주님이라는 퀴리에(κύριε)는 아들을 직접 부르는 호칭이다. 처음에 땅의 기초를 놓았다는 동사의 주어도 당신이다. 2절에서 아들을 통하여 창조가 이루어졌다고 서술한 뒤, 여기서는 땅과 하늘을 지으신 활동을 아들에게 직접 돌린다.

시편의 원래 기도자는 짧은 생애와 고난 속에서 영원한 하나님을 부른다. 히브리서는 그 기도를 인용하면서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다. 8절의 왕을 향한 찬양이 아들에게 적용된 것과 같이, 구약의 원래 발화 상황과 이 단락의 발화 상황에는 변화가 있다.

창조주 아버지에 관한 인용이라는 반론

개스턴은 공개된 저자 원고에서 10-12절을 아들을 향한 말씀으로 읽는 해석에 반대한다. 그는 8절을 하나님은 당신의 보좌로 읽고, 10-12절을 그 왕권의 영원한 토대를 설명하는 말씀으로 해석한다. 이 읽기에서 창조주는 아버지이며, 아들의 왕권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에게 근거하여 영원하다.31

그는 카이가 앞 인용의 대상까지 유지할 필요는 없다고 논한다. 히브리서 2:12-13과 10:30처럼 인용들이 관련 주제를 발전시키는 용례를 비교하며, 11-12절까지 인용한 목적도 창조보다 영원성에 있다고 본다.32

2:12-13에서는 형제들을 말하는 인용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인용, 하나님이 주신 자녀들을 말하는 인용이 이어진다. 세 인용의 내용은 달라도 내가라고 말하는 주체는 계속 아들이다. 10:30에서도 내가 보복한다는 말씀과 주께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같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으로 묶는다. 인용의 주제가 발전하는 일과 화자 또는 지시 대상이 바뀌는 일은 이 용례들에서 같지 않다.

1:10의 당신은 8-9절의 당신을 이어받으며, 1:2의 창조 진술과도 연결된다. 11-12절의 영원성은 처음에 창조하셨다는 10절의 사실에 더해진다. 인용이 길어진 까닭은 이 분이 세계를 지으셨으며 그 세계가 변할 때에도 동일하다는 두 진술을 함께 설명하기 때문이다.

보컴은 이런 직접적인 말씀과 창조 활동의 연결이 아들을 하나님의 생각 속에만 있는 지혜로 읽는 해석에 반대하는 근거라고 논한다.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아들은 구원 역사에서 높임받은 분과 동일한 창조주다.33 이 해석은 서두의 관계대명사와 인용 연쇄의 2인칭을 같은 분에게 연결한다.

11-12절: 변하는 피조 세계와 끝나지 않는 아들

“그것들은 없어질 것이지만 당신은 계속 계십니다. 모두 옷처럼 낡을 것이며, 당신은 그것들을 겉옷처럼 말아 올리실 것입니다. 옷처럼 그것들은 바뀔 것입니다. 당신은 동일하시며 당신의 연수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11-12절, 필자 번역)

그것들이라는 아우토이(αὐτοί)는 앞의 하늘들을 가리킨다. 땅과 하늘을 지으신 분은 그 세계가 낡고 바뀔 때에도 계속 계신다. 만물을 붙드시는 3절의 아들은 그 만물의 변화와 마지막에 대해서도 권한을 가진다.

말아 올리실 것이라는 헬릭세이스(ἑλίξεις)의 주어는 아들이고, 바뀔 것이라는 알라게손타이(ἀλλαγήσονται)의 주어는 피조 세계다. 아들은 변화를 행하시는 쪽이며, 세계는 그 변화의 대상이다. 당신은 동일하시다는 말과 끝나지 않는 연수는 그 대조를 끝까지 유지한다.

세계가 어떻게 바뀌는지는 해석이 갈린다. 애트리지는 마지막 동사를 세계가 제거되는 뜻으로 옮긴다.34 코커릴은 옷이 말리고 바뀌는 모습을 아들이 피조 세계를 종결시키는 권한으로 읽는다.35

처치는 바뀐다는 동사를 중심으로 세계의 갱신을 읽는다. 그는 히브리서 8:13에서 옛 언약의 사라짐을 서술한 말과 1:12의 변화 동사를 비교하고, 이사야 34장의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는 심판을 뒤의 회복과 연결한다. 그의 해석에서 심판을 겪은 세계는 새롭게 되며, 창조가 영구히 버려지는 것이 최종 상태는 아니다.36

처치도 없어질 것이라는 말에 파괴의 의미가 전혀 없다고 읽지는 않는다. 소멸 뒤의 재창조인지 쇠퇴한 세계의 변화인지에 관한 가능성을 남긴다.36 피조 세계의 최종 상태에 관한 차이 속에서도, 그가 읽는 10절의 창조주와 12절의 동일한 분은 아들이다.

아들은 세계와 함께 생겨나고 그 세계의 운명에 매인 존재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분은 처음에 세계를 지으셨고, 그 세계를 바꾸실 때에도 동일하시다. 천사들의 바람과 불꽃 같은 활동은 그 창조와 통치 아래에 놓인다.

13-14절: 오른편에 앉은 아들과 파송되는 종들

“하나님이 어느 천사에게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천사들은 모두 섬기는 영들로서, 구원을 상속할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보내심을 받는 이들이 아닙니까?” (13-14절, 필자 번역)

어느 천사에게라는 물음이 5절의 시작을 다시 받는다. 첫 인용에서는 아들이라는 관계가, 마지막 인용에서는 오른편의 통치 지위가 천사들과의 비교를 이룬다. 시편 110:1의 인용은 3절의 좌정을 직접적인 말씀으로 설명한다.

아들이 오른편에 앉으신 일과 원수들이 발판이 되는 일 사이에는 시간의 간격이 있다. 아들은 이미 높임받으셨고, 모든 반대가 굴복할 때를 기다리신다. 2:8의 아직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진술도 이 관계를 이어간다.

천사들에게는 모두라는 판테스(πάντες)가 붙는다. 그들은 아들과 함께 같은 보좌에 앉는 통치자들로 서술되지 않는다. 코커릴과 피어스는 그들을 구원을 상속할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파송되는 존재로 읽는다.37 2절의 아들은 만물의 상속자이며, 14절의 사람들은 그분이 이루신 구원의 상속자다.

천사들의 사역도 이 구원에 속한다. 그들의 높은 지위는 아들의 창조와 왕권을 대신하지 않는다. 저자는 천사들의 사역을 인정하면서 그 사역의 대상이 구원받을 사람들이라고 밝힌다.

교부들의 해석

크리소스토무스: 하나님의 광채와 성육신한 아들의 높임

크리소스토무스는 『히브리서 강해』 1에서 상속자로 세우셨다는 말을 인간이 되신 아들의 지위에 연결한다. 말씀은 그 이전에도 창조주셨다. 그는 서두가 상속, 창조, 광채, 정결과 좌정을 오가며 같은 아들의 높은 신적 지위와 인간을 위한 사역을 함께 설명한다고 읽는다.38

강해 2에서는 광채와 인장 자국을 아버지에게서 나신 아들의 동등한 본성으로 설명한다. 광채는 빛에서 오며, 인장 자국은 원형에 정확하게 대응한다. 그는 아들이 독자적인 실재 없이 아버지가 잠시 뻗어 나온 모습이라는 견해에 반대하고, 아들이 실제로 존재하면서 아버지와 같은 신적 본성을 가진다고 논한다.39

여기서 크리소스토무스는 하나님의 본성을 온전히 표현하는 관계를 실제 존재의 동등성으로 읽는다. 휘포스타시스를 설명할 때에도 아들의 고유한 실재를 옹호하는 4세기의 논쟁이 작용한다. 오른편은 하나님이 물리적인 장소를 차지한다는 뜻보다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한 존귀를 나타낸다고 읽는다.40

강해 3에서 그는 당신의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셨다는 말을 아들이 취한 인간성에 연결한다. 그에게서 아들은 처음부터 창조주셨으며, 그 창조 능력을 계속 가지고 계신다. 옷처럼 말리고 바뀌는 세계는 더 나은 상태로 변화한다고 설명한다.41 기름부음을 받은 인간의 삶과 변하지 않는 창조주의 본성은 성육신한 같은 아들에게 속한다.

아타나시우스: 뛰어나게 되심과 피조물의 차이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 논박』 1.53에서 소개하는 상대 견해는 1:4의 되셨다는 말에 주목한다. 아들이 더 뛰어나게 되었다면 그분도 만들어진 존재이며 변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1:3의 죄의 정결과 마지막 날들의 사역을 따라, 이 말이 성육신한 아들의 구원 사역과 천사보다 뛰어난 봉사를 서술한다고 답한다.42

그는 크레이트톤을 같은 종류의 존재 사이에 있는 정도의 차이보다 아들과 종들 사이의 차이로 읽는다. 아들은 아버지의 고유한 자녀이고, 천사들은 만들어져 은혜로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라는 설명이다.43 크레이트톤 자체는 비교급이다. 아타나시우스가 존재의 종류까지 논하는 근거는 그 비교급과 함께 있는 아들됨, 창조, 천사들의 섬김에 있다.

1.57-58에서는 10-12절을 중심으로 논증한다. 세계는 만들어졌으므로 그 자체로는 없어질 수 있으며, 하나님이 보존하시는 은혜로 계속 존재한다. 아들은 세계가 없어질 때에도 동일한 분으로 계신다. 그는 창조주 아들의 영원성을 피조물이 은혜로 오래 존재하는 일과 구별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영광의 광채가 아버지와 같은 본질을 가진다고 결론짓는다.44

이 논증에는 만들어진 존재가 자기 안에 존재의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다. 아들의 영원성은 하나님이 한 피조물을 끝없이 보존하는 일과 다른 종류의 존재 방식으로 설명된다. 그 구별의 성경적 근거는 아들이 세계를 지으시고, 세계가 변할 때에도 동일하시다는 인용에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시편의 오늘과 영원한 나심

아우구스티누스는 히브리서 1:5가 인용한 시편 2:7을 해설하면서 오늘을 두 방식으로 논한다. 그 말이 성육신의 날을 예언한다고 읽을 가능성을 인정한 뒤, 하나님에게는 지나간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없다는 전제에서 오늘을 영원한 현재로 읽는다. 이 현재 안에서 독생자의 나심을 설명한다.45

그에게 오늘의 영원성은 시간 부사의 사전적 의미보다 하나님의 시간 초월성에 관한 판단에서 나온다. 이어지는 시편 2:8의 민족들을 상속한다는 말은 아들의 인간성, 희생과 중보에 연결한다.46 같은 시편 안에서도 아들의 영원한 나심과 역사 속에서 받은 상속은 서로 다른 근거로 설명된다.

창조주 아들과 동일 본질의 근거

이 단락은 아들이 천사들보다 더 큰 권한을 받았다는 사실에 머물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세계를 지으셨고, 아들이 만물을 붙드시며, 하나님은 그분에게 처음에 땅과 하늘을 지으신 주라고 말씀하신다. 천사들은 모두 만들어지고 파송되는 섬기는 존재들로 서술된다. 아들과 천사들의 차이는 그 창조와 피조의 관계에서 구체화된다.

아들을 가장 먼저 만들어진 대리자로 읽는 해석에는 아들 자신의 창조와 그 뒤에 생긴 나머지 세계라는 구분이 필요하다. 이 단락이 서술하는 창조는 세계의 창조이며, 아들은 그 세계를 지으시고 끝까지 붙드시는 분이다. 10-12절의 직접적인 말씀은 그분을 세계의 시작과 변화에 종속시키는 설명보다 창조주의 영원성을 가진 분으로 읽는 설명에 잘 맞는다.

아버지와 아들은 구별된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 창조하시고, 아들을 상속자로 세우고, 그분에게 말씀하시며 기름을 부으신다. 아들은 정결을 이루고 오른편에 앉으신다. 동일한 한 인격이 자기에게 다른 이름으로 말씀하는 이야기는 이 관계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 구별 속에서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실제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고, 하나님과 주라는 호칭을 받으며, 구약에서 하나님에게 귀속된 창조와 영원한 통치를 행하신다. 아들을 피조 세계에 속한 종으로 두는 해석보다 창조주의 신적 존재에 속한 분으로 읽는 해석이 이 진술들을 함께 설명한다.

동일 본질의 논증은 여기에 한 하나님에 관한 고백을 연결한다. 히브리서 3:4는 만물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과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은 같은 분이며, 아들을 통한 창조도 그 하나님의 활동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을 유지하면서 두 분을 창조주의 신성에 포함시키면, 한 분의 분할되지 않는 신적 본성을 공유한다는 동일 본질의 설명이 그 관계를 표현한다. 그 결론에는 창조주와 피조 세계의 구별, 아들에게 귀속된 창조주의 영원성, 한 하나님에 관한 고백이 함께 작용한다.

휘포스타시스는 아들이 하나님의 실제 존재를 얼마나 온전히 드러내는지 서술한다. 창조와 만물의 보존, 영원한 통치는 그분을 피조 세계를 지으시고 붙드시는 분으로 설명한다. 크리소스토무스와 아타나시우스는 이 진술들을 함께 읽으며 아버지와 같은 신적 본성을 논한다.

영원한 나심의 설명은 아버지와 아들의 기원 관계를 더 구체화한다. 광채와 나의 아들이라는 말은 아들이 아버지와 맺는 관계를 표현하고, 창조 이전의 활동과 끝나지 않는 존재는 그 관계를 세계의 시간 안에 한정하기 어렵게 한다. 교부들은 하나님이 영원하며 변화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이 관계에 연결하여 아들의 나심도 영원하다고 설명한다. 5절의 오늘을 구원 역사에서의 왕적 높임으로 읽어도, 아들의 창조 이전 존재와 영원한 부자 관계에 관한 이 논증은 유지된다.

성령은 1:1-14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2:3-4에서는 주께서 전하신 구원을 하나님이 표적과 능력, 성령의 나눠 주심으로 함께 증언하신다. 저자는 2:1에서 독자들이 들은 말씀에 더욱 마음을 기울이라고 요청한다. 만물을 지으시고 죄를 정결하게 하신 아들이 그 구원을 전하셨으며, 천사들은 그 구원을 상속할 사람들을 위하여 파송된다.

각주와 자료

  1. Michael W. Holmes, ed., The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2010), Hebrews 1:1-14. 확인한 고정 판본. 필자 번역은 이 판본을 따른다. 1:3에는 능력 뒤의 아우투(αὐτοῦ)가 없고 디 하우투(διʼ αὑτοῦ)가 있으며, 1:8은 수(σου), 1:12는 두 번째 호스 히마티온(ὡς ἱμάτιον)을 포함한다. © 2010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and Logos Bible Software, CC BY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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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Harold W. Attridge, The Epistle to the Hebrews: A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Hebrews,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9), 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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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Attridge, Hebrews, 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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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Gareth Lee Cockerill, The Epistle to the Hebrews, NICNT (Grand Rapids and Cambridge: Eerdmans, 2012), 92-93. 코커릴의 인용은 Perlego EPUB에 표시된 원래 인쇄 쪽수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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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James D. G. 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 A New Testament Inquiry into the Origins of the Doctrine of the Incarnation, 2nd ed. (London: SCM Press, 1989; reprinted 1992), 54-56. 던은 히브리서의 지혜 및 아들 언어를 설명하면서 개인적 선재 외의 가능성을 검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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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Madison N. Pierce, Divine Discourse in the Epistle to the Hebrews: The Recontextualization of Spoken Quotations of Scripture, SNTSMS 178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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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Attridge, Hebrews, 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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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Cockerill, Hebrews,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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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Attridge, Hebrews, 44-45; Cockerill, Hebrews, 94, 주 39. 애트리지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실재, 코커릴은 본질 또는 실제 존재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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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Cockerill, Hebrews, 94, 주 41. 두 비유에 신성의 일치와 위격의 구별을 따로 배정하는 견해는 코커릴이 소개하고 비판하는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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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Attridge, Hebrews,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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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Cockerill, Hebrews, 9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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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Attridge, Hebrews, 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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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Attridge, Hebrews, 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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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Cockerill, Hebrews, 97-100, 특히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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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Richard Bauckham, “Monotheism and Christology in Hebrews 1,” in Early Jewish and Christian Monotheism, ed. Loren T. Stuckenbruck and Wendy E. S. North, JSNTSup 263 (London: T&T Clark International, 2004), 17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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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Attridge, Hebrews, 53-55. 그는 왕적 높임 전승과 서두의 선재 전승을 함께 검토하며, 히브리서가 이를 체계적인 그리스도론으로 조정하는 작업에 집중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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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Cockerill, Hebrews, 103-104. 영원한 나심과 성육신 등의 오늘은 소개한 대안이며, 그가 채택한 읽기는 높임과 좌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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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Pierce, Divine Discourse, 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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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Gareth Lee Cockerill, “Hebrews 1:6: Source and Significance,” Bulletin for Biblical Research 9 (1999): 51-59; Cockerill, Hebrews, 105-108. 신명기의 그리스어 전승과 송가의 관계에 관한 복원은 코커릴의 논증이다. 시편 97:7은 2012년 주석 108쪽, 주 41에서 비교 용례로 다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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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Attridge, Hebrews, 55-57. 애트리지는 성육신, 높임, 재림을 검토한 뒤 거주 세계라는 오이쿠메네의 용법을 따라 성육신을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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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Cockerill, Hebrews, 104-108; Pierce, Divine Discourse, 4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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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Cockerill, “Hebrews 1:6,” 61-64. 1999년 논문은 심판 문맥에서 재림을 지지할 이유를 제시하면서 높임의 가능성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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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Attridge, Hebrews,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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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Pierce, Divine Discourse, 53-54; Bauckham, “Monotheism and Christology,” 180. 그들은 1:7의 만드시는 분을 아들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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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Attridge, Hebrews, 58-59; Cockerill, Hebrews, 109-110. 1:8의 수와 아우투 이문은 애트리지 59쪽을 따랐다.

    본문 1 본문 2

  27. Bauckham, “Monotheism and Christology,” 182, 주 33. 보컴은 8절의 호격과 9절의 첫 번째 주격을 구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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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Cockerill, Hebrews, 110-111, 특히 110, 주 61. 코커릴은 두 절에서 모두 아들을 부르는 호격을 채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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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Cockerill, Hebrews, 110-111. 동료들의 정체와 아들의 순종 및 기름부음에 관한 그의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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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Pierce, Divine Discourse, 54-60, 특히 56-58. 피어스는 칠십인역 시편의 발화 구조가 새 대화로 읽힐 여지를 검토하면서, 히브리서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직접적인 말씀을 중심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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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Thomas E. Gaston, Why does Hebrews 1:10-12 cite Psalm 102:25-27?, 공개 저자 원고, “A New Proposal”와 “Conclusion”. 원고에는 인쇄 쪽수가 없다. Neotestamentica 58.2 (2024): 291-312의 출판본은 확인하지 못했으며, 여기서는 공개 원고의 절 제목으로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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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Gaston, 공개 저자 원고의 히브리서 인용 구성 논의와 새 제안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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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Bauckham, “Monotheism and Christology,” 181, 184-185. 던의 비개인적 선재 해석에 대한 비판과 창조주 아들의 영원성 논증을 함께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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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Attridge, Hebrews,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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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Cockerill, Hebrews, 11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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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Philip Church, “Hebrews 1:10-12 and the Renewal of the Cosmos,” Tyndale Bulletin 67, no. 2 (2016): 282-286, 특히 283-286과 286, 주 74. 출판사 공개 원문. 논문 전체의 범위는 269-286쪽이다.

    본문 1 본문 2

  37. Cockerill, Hebrews, 114-116; Pierce, Divine Discourse, 6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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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크리소스토무스, 『히브리서 강해』 1.2-3. NPNF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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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크리소스토무스, 『히브리서 강해』 2.1-2. 아들의 고유한 실재와 아버지와의 본성 관계를 설명하는 대목. NPNF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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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크리소스토무스, 『히브리서 강해』 2.1-2. 휘포스타시스와 오른편의 존귀에 관한 해설. NPNF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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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크리소스토무스, 『히브리서 강해』 3.2-3. 아들의 기름부음, 창조, 세계의 변화에 관한 해설. NPNF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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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 논박』 1.53-56. 상대의 되셨다는 말에 관한 주장은 아타나시우스가 소개하는 논증을 통하여 확인했다. NPNF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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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 논박』 1.55-56. 아들의 사역, 아들과 종들의 차이, 자연적 아들됨과 은혜에 관한 논증. NPNF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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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 논박』 1.57-58. NPNF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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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아우구스티누스, 『시편 해설』 2.6. NPNF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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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아우구스티누스, 『시편 해설』 2.7. NPNF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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