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5-11은 그리스도 예수의 낮아지심과 높임을 교인들의 삶에 연결한다. 하나님과 동등함, 종의 형체, 십자가의 죽음, 모든 무릎이 꿇는 고백이 한 이야기 안에 놓인다. 그리스도의 지위를 설명하는 말들은 자기 이익을 앞세우는 교인들에게 다른 사람을 돌보는 마음을 요청하는 문맥에 속한다.
본문은 두 분을 구별한다. 예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하나님이 그를 높이신다.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에 이른다. 이 구별과 함께, 처음의 하나님과 동등함이 마지막의 높임과 어떤 관계인지가 해석의 중심에 놓인다.
함께 살아가는 교회에 주어진 그리스도의 본보기
1:27에서 바울은 교인들이 한 영으로 굳게 서고, 한마음으로 복음의 믿음을 위하여 함께 싸우기를 요청한다. 2:1-4에서는 같은 사랑과 마음을 품고, 이기적 경쟁이나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라고 말한다. 자신의 일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라는 요청 뒤에 그리스도 예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홀러웨이는 흔히 그리스도 찬가로 불리는 2:6-11을 바울이 이 권면에 맞추어 작성한 찬양적 산문으로 읽는다. 6-8절의 낮아지심은 2:1-4의 겸손을 설명하고, 8절의 순종은 2:12-16의 순종에 관한 권면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1
5절: 여러분 가운데 품을 마음
“여러분 가운데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에게도 있었던 마음입니다.” (5절, 필자 번역)
마음을 품으라는 프로네이테(φρονεῖτε)는 앞의 2절과 이어진다. 너희 가운데라는 엔 휘민(ἐν ὑμῖν)은 복수의 교인들에게 주어진 말이다. 각자의 내면에서 겸손을 느끼는 일과 함께, 그들이 서로 대하는 태도가 문제다.
후반부의 호 카이 엔 크리스토 이에수(ὃ καὶ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에는 동사가 생략되어 있다. 홀러웨이는 여기서 존재를 뜻하는 동사를 보충하여, 그리스도 예수에게도 있었던 마음이라는 뜻으로 읽는다.2 다음 절부터는 그 마음이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행동으로 나타났는지 서술된다.
6절: 하나님의 형체와 하나님과 동등함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6절, 필자 번역)
하나님의 형체라는 모르페 테우(μορφῇ θεοῦ)와 종의 형체라는 모르펜 둘루(μορφὴν δούλου)는 6절과 7절을 연결한다. 같은 모르페(μορφή)가 두 상태를 표현하므로, 앞의 말이 어떤 존재 방식을 가리키는지에 관한 판단은 뒤의 종의 삶과 관계된다.
계셨다는 휘파르콘(ὑπάρχων)은 현재분사로, 그리스도가 어떤 상태에서 하나님과 동등함에 관한 판단을 하셨는지 표현한다. 던은 이 분사가 판단 당시의 상태를 서술하며, 그 자체에 시간을 초월한 존재라는 의미가 있지는 않다고 설명한다.3 선재 해석의 근거는 이 단어 하나보다 하나님의 형체로 계신 분이 종의 형체를 취하고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는 이야기의 순서에 있다.
분사의 관계를 계셨으므로라는 인과로 읽을 수도, 계셨으나라는 양보로 읽을 수도 있다. 홀러웨이는 부유하셨으나 가난하게 되셨다는 고린도후서 8:9의 표현을 비교하여 양보로 읽는다.4 이 관계에서는 이미 누리던 높은 지위와 그 지위를 자기 이익에 이용하지 않는 선택이 대조된다.
홀러웨이는 모르페를 외적으로 드러나는 형체로 읽고, 하나님의 형체를 선재한 그리스도의 빛나는 천상 모습으로 설명한다. 그는 유대교의 신적 영광과 천사에 관한 자료를 비교하여, 그 표현이 높은 천사적 존재의 모습을 가리킬 수 있다고 논한다.5 보컴도 형체를 드러나는 모습으로 읽지만, 그 모습은 하나님과 동등한 그리스도가 누리던 천상의 영광을 나타낸다고 본다.6
하나님과 동등함이라는 토 에이나이 이사 테오(τὸ εἶναι ἴσα θεῷ)는 그 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 이사(ἴσα)는 동등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뜻을 담는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관계의 두 대상으로 구별되며, 동등함이 두 분의 구별을 없애지는 않는다.
쟁점은 그 동등함을 어떤 범위로 읽고, 하르파그모스(ἁρπαγμός)와 어떻게 연결하는지에 있다. 홀러웨이는 빼앗는 행위라는 의미와, 붙잡거나 계속 보유하려는 가치 있는 대상이라는 의미를 검토한다. 그가 채택한 읽기에서는 그리스도가 이미 누리던 상태를 놓을 수 없는 소유물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다만 그는 하나님과 동등함을 높은 천상 지위를 강조한 과장적 표현으로 제한한다.7
보컴은 하나님과 동등함을 자기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지 않았다는 읽기를 채택한다. 그리스도가 동등함을 가지고 계신 상태에서 그 관계를 어떻게 표현하셨는지가 중심이라는 설명이다. 그리스도는 다른 이들에게 섬김을 요구할 수 있는 지위를 자기 이익에 쓰지 않고, 섬김과 자기 낮춤을 택하셨다.8 2:3-4의 자기 일과 다른 사람의 일을 대조하는 권면에 이 해석이 잘 연결된다.
던의 아담 해석
던은 처음부터 선재한 그리스도를 전제하는 해석에 반대한다. 하나님의 형체를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받은 아담의 상태에 연결하고, 하나님과 동등함을 움켜쥐는 일을 창세기 3장의 유혹에 연결한다. 종의 형체와 사람들의 모습은 타락 뒤 인간들이 겪는 죽음과 부패의 운명을 나타낸다는 설명이다.9
이 해석에서 그리스도는 아담이 했던 선택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지위를 높이려고 움켜쥐는 대신, 타락한 인간의 운명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여 죽음까지 겪는다. 던은 이러한 언어가 그리스도의 전 생애와 희생을 아담의 이야기로 설명하므로, 그 선택이 선재 상태에서 일어났는지 지상 생애에서 일어났는지를 이 찬가가 결정하지 않는다고 본다.10
아담과 그리스도의 불순종 및 순종을 비교하는 일은 바울의 다른 진술과 잘 연결된다. 이 단락에서는 아담의 이름이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에이콘(εἰκών)이 직접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과 동등함에 관한 판단 뒤에 같은 주체가 종의 형체를 취하고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는 서술이 이어진다. 던은 그 변화를 타락한 인간의 운명에 참여하는 일로 설명한다. 선재 해석은 앞의 하나님과 동등한 상태에서 인간의 삶을 받아들이는 이야기로 읽으며, 본문에 명시된 형체와 모습의 변화에 더 직접적으로 대응한다.
7절: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심
“오히려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들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으로 드러나셨습니다.” (7절, 필자 번역)
자신을 비우셨다는 헤아우톤 에케노센(ἑαυτὸν ἐκένωσεν)의 목적어는 자신이다. 뒤의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는 라본(λαβών)과 사람들의 모습이 되셨다는 게노메노스(γενόμενος)가 그 행동을 구체화한다. 비움은 종의 삶과 인간의 삶을 받아들이는 일로 서술된다. 지식이나 능력 같은 신적 속성을 목적어로 열거한 문장은 없다.
홀러웨이는 비우셨다는 동사가 2:3의 헛된 영광인 케노독시아(κενοδοξία)와 연결된다고 설명한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교인들 앞에 자신을 비우신 그리스도가 제시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고대의 신적·천사적 변신 이야기와 비교하며, 천상의 모습을 감추거나 내려놓고 인간의 모습으로 사는 변화로 읽는다.11
보컴은 그리스도가 천상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을 포기하면서도 하나님과 동등함을 계속 가지신다고 읽는다. 동등함은 다른 이들의 섬김을 받는 방식 대신, 그들을 섬기고 자신을 낮추는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설명이다.12 이 읽기에서는 신성의 상실보다 지위와 영광을 자기 이익에 사용하지 않는 행동이 비움의 내용을 이룬다.
그리스도는 종의 형체를 취하신 분으로 죽음까지 순종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모습과 사람으로 드러났다는 표현은 실제 삶과 죽음을 포함한다. 이 단락의 인간성은 잠시 사람처럼 보이는 외관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을 받아들인 주체가 십자가의 죽음을 겪는다.
8절: 십자가에 이르기까지의 순종
“그분은 자신을 낮추시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8절, 필자 번역)
자신을 낮추셨다는 에타페이노센 헤아우톤(ἐταπείνωσεν ἑαυτόν)은 7절의 자신을 비우셨다는 말과 같은 주체의 선택을 서술한다. 종의 형체를 취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삶을 죽음까지 따른다. 홀러웨이는 여기서 순종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읽고,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태도로 설명한다.13
죽음의 방식도 명시된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선택이 이른 구체적인 처형이다. 홀러웨이는 로마의 공개적 수치와 처형의 문맥에서 이 말을 읽는다. 바울은 그 수치를 감추지 않고 그리스도의 이야기의 결정적인 대목에 놓는다.14 6절의 하나님과 동등함에서 8절의 십자가까지 이어지는 서술은 그분이 받아들이신 낮은 지위와 순종의 크기를 설명한다.
9절: 하나님이 높이시고 이름을 주심
“그러므로 하나님도 그분을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은혜로 주셨습니다.” (9절, 필자 번역)
그러므로라는 디오(διό)는 앞의 자기 비움과 순종을 하나님의 높임에 연결한다. 낮아지심과 높임 사이에는 실제 인과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 뒤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이야기의 새로운 단계로 나타난다.
지극히 높이셨다는 휘페립소센(ὑπερύψωσεν)은 매우 높은 높임을 표현한다. 홀러웨이는 접두사와 뒤의 모든 이름 위에라는 말을 함께 읽어, 선재 상태보다도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간다는 해석을 지지한다. 그에게서는 천사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그리스도 자신이 높임받는 주체이므로, 인간성을 얻은 뒤 원래의 지위로 돌아가는 것보다 높은 승진을 뜻한다.15
이 동사는 무엇이 변화했는지를 그 자체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과 동등함을 6절에서 이미 누리던 온전한 관계로 읽으면, 새롭게 받은 것은 신성이 처음 생기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죽음을 거친 그리스도의 보편적 통치 지위가 된다. 동등함을 제한된 천상 지위로 읽으면, 9절은 그 지위 자체를 더 높이는 일이 된다. 두 해석의 차이는 접두사의 강도와 함께 6절의 동등함을 어떻게 읽는지에서 나온다.
은혜로 주셨다는 에카리사토(ἐχαρίσατο)는 하나님이 주시는 주체이고 그리스도가 받는 주체임을 밝힌다. 아버지는 순종과 죽음을 거친 아들을 높이고 이름을 주신다. 이 수여는 두 분이 역사를 통해 맺는 관계에 속한다.
10-11절: 예수의 이름과 모든 피조물의 고백
“예수의 이름에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무릎이 꿇고,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10-11절, 필자 번역)
모든 이름 위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다음 두 절에서 설명된다. 예수의 이름에라는 엔 토 오노마티 이에수(ἐν τῷ ὀνόματι Ἰησοῦ)는 예수께 속한 이름과 권위를 가리킨다. 홀러웨이는 이 표현을 예수라는 이름의 발음을 듣는 순간이라는 뜻보다, 특정한 분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관용구로 읽는다. 9절의 가장 높은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이고, 11절의 주라는 고백이 이를 구체화한다는 설명이다.16
여기서 주라는 퀴리오스(κύριος)는 홀로 떨어진 호칭이 아니다. 모든 무릎과 모든 혀에 관한 이사야 45:22-23의 말이 함께 나온다. 그 이사야 본문에서 하나님은 자신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고 선언하시며 땅끝까지 구원으로 부르신다. 모든 무릎이 자기에게 꿇고 모든 혀가 맹세할 것이라는 진술이 그 고유한 신성과 연결된다. 보컴은 빌립보서가 그 보편적 인정을 예수에게 적용하므로, 예수를 한 하나님의 고유한 정체성 안에 포함시킨다고 읽는다.17
하늘과 땅과 땅 아래는 고백의 범위를 우주 전체로 넓힌다. 보컴의 해석에서 예수는 몇 사람의 존경을 받는 종교 지도자나, 다른 권세들과 함께 존재하는 하나의 주가 아니다. 그에게 돌아오는 인정은 이사야에서 한 하나님이 온 세상에 요구하신 인정과 관계된다.
그 고백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에 이른다. 바울은 예수를 향한 고백을 아버지의 영광과 경쟁시키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자기 낮춤과 하나님의 높임, 예수를 주로 인정하는 모든 피조물의 행동이 아버지의 영광으로 연결된다.
이름을 받은 대리자라는 해석
매그래스도 여기서 받은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대리자를 다루는 유대교 자료와 비교하여, 그 이름의 수여를 하나님의 정체성 안으로의 포함보다 하나님이 자신의 권한을 맡기시는 일로 설명한다.18
그는 무릎을 꿇는 행위와 하나님께만 드리는 희생 제사를 구별한다. 왕이나 하나님의 대표 앞에서 몸을 굽히는 행위가 그 대상을 하나님 자신으로 인정하는 제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빌립보서 2장의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과 통치권을 받고 그를 대신하여 다스리는 분으로 해석된다.19
매그래스는 특히 하나님이 예수를 그 지위로 높이셨으며, 그 이전에는 그 지위와 이름을 가지지 않았다고 읽는다. 하나님이 주시고 예수가 받는 관계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우위와 조화된다는 설명이다. 그는 신적 기능을 맡았다는 사실에서 곧 그 존재의 신적 본성을 결론으로 내리는 논증에 반대한다.20
홀러웨이의 해석도 이름을 가진 대리자와 연결된다. 그는 6절에서 천상의 모습을 가진 그리스도가 9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지닌 높은 천사의 지위로 올라가고, 10-11절에서 종말의 보편적 통치를 맡게 된다고 읽는다.21 그리스도의 선재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과 동일한 신적 본성을 결론으로 삼지 않는 해석이다. 던의 아담 해석, 홀러웨이의 천사적 선재 해석, 보컴의 신적 동등성 해석은 그리스도가 낮아지기 이전에 어떤 분이었는지에 서로 다른 답을 준다.
교부들의 해석
크리소스토무스: 두 형체와 자발적인 낮아지심
크리소스토무스는 『빌립보서 강해』 6에서 하나님의 형체와 종의 형체의 병렬을 중심으로 논증한다. 종의 형체가 참 인간의 본성을 뜻한다면 하나님의 형체도 참 신적 본성을 뜻한다고 읽는다.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말은 동등한 두 대상의 관계이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한 인격의 다른 이름이라는 해석에도 반대한다.22
그는 그리스도의 본보기와 2:3의 권면을 연결한다. 낮은 존재가 더 높은 존재에게 복종하는 것만으로는 동등한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라는 권면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논증이다. 그리스도는 동등한 지위를 가지신 분으로서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겸손의 본보기가 된다고 본다.23
그의 모르페 해석에는 신적 본성에 관한 전제도 들어 있다. 복합적인 인간에게서는 형체가 몸에 관계되지만, 단순하고 복합되지 않은 하나님에게서는 본성에 관계된다고 설명한다.24 하나님의 형체와 신적 본성의 관계는 두 형체의 병렬과 함께 이러한 신적 단순성의 이해를 통해 설명된다. 모르페라는 단어의 일반적인 사전 의미만으로 이루어진 논증은 아니다.
『강해』 7에서는 빼앗은 왕권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찬탈자와, 본래 왕이어서 왕복을 안전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왕을 비교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함을 빼앗아 얻지 않았으므로, 낮아져도 그 본성과 권리를 잃을까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그는 비움을 종의 형체를 취하는 일로 풀이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어도 하나님으로 계신다고 읽는다.25
9절의 높임은 성육신과 연결된다. 크리소스토무스는 그 높임이 말씀의 신성을 더 완전하게 만드는 일이면, 말씀은 그 전에 결핍된 존재였다는 문제가 생긴다고 반박한다. 그는 높임을 그리스도의 육신에 관한 구속의 경륜으로 읽고, 아들이 온전하고 아버지보다 낮지 않다는 고백이 그런 아들을 낳으신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고 설명한다.26
아타나시우스: 은혜를 주는 말씀과 인간으로서 받는 그리스도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 논박』 1.37에서 상대의 해석을 소개한다. 순종했기 때문에 이름과 높임을 받았다면, 그 지위는 본래의 본성보다 선택과 공로에 따라 얻은 보상이라는 주장이다. 그에게 이 해석은 아들이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27
그는 1.38-40에서 그리스도가 성육신 이전에도 말씀과 하나님이셨다는 성경의 다른 진술을 연결한다. 만물이 그를 통하여 창조되었다는 말과 요한복음 17:5의 세상 이전 영광을 근거로, 예수가 죽음 뒤 처음 하나님이나 아들이 되었다는 설명에 반대한다. 하나님의 형체로 계신 분이 종의 형체를 취했다는 빌립보서의 순서도 같은 논증에 포함된다.28
1.41-43에서는 높임을 인성에 적용한다. 말씀은 본래 하나님과 동등하며, 인간이 되어 죽음과 낮은 처지를 겪으신다. 높임은 그 인간성을 죽음에서 일으키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인간들이 그분 안에서 함께 높임을 받는 일로 설명된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러므로라는 연결을 말씀의 신성이 공로로 승진한 이유보다,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이루신 구원이 인간들의 높임을 가져오는 이유로 읽는다.29
그는 부활에 집중하는 설명도 제시한다. 죽음까지 낮아지신 그리스도가 높임받았다는 말은 그 몸이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뜻을 포함한다. 1.45에서는 그 몸이 말씀 자신의 몸이므로 인간성의 죽음과 부활을 같은 그리스도에게 귀속한다. 말씀으로서는 아버지에게서 오는 은혜를 주시고, 인간으로서는 그 은혜를 받으신다는 설명이다. 아버지가 육신이 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이 인간이 되어 아버지에게 받으신다는 인격적 구별도 유지된다.30
동등함, 높임, 동일 본질
6-8절을 선재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자기 낮춤으로 읽는 해석이 본문의 전개에 더 잘 맞는다. 하나님과 동등함에 관한 판단의 주체가 이어서 종의 형체를 취하고 인간의 모습이 된다. 그 뒤 사람으로 드러난 그리스도가 죽음까지 순종한다. 던의 아담 해석은 이 순종이 인간의 불순종을 어떻게 되돌리는지 설명하지만, 처음의 형체와 동등함을 타락한 인간의 운명에 관한 유형적 언어로 다시 설명해야 한다.
이 선재 판단만으로 같은 신적 본성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홀러웨이는 선재와 형체의 변화를 인정하면서도 그 주체를 천사적 존재로 읽는다. 그 해석의 중요한 선택은 하나님과 동등함을 실제의 온전한 동등성보다 높은 천상 지위를 강조하는 과장으로 제한하는 데 있다. 본문에는 그 제한을 명시하는 표현이 없다. 6절의 동등함과 10-11절의 하나님 자신의 보편적 인정에 관한 언어를 함께 읽으면, 그리스도의 지위를 높은 천사에게 부여된 권한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보컴의 신적 동등성 해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7절의 비움도 그 동등함을 잃는 사건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본문은 자신을 비우는 일을 종의 형체와 인간의 삶을 받아들이는 행동으로 구체화한다. 크리소스토무스의 해석은 그 구조를 유지하며, 본래의 신성이 인간성의 수용 때문에 없어졌다는 설명에 답한다. 그가 하나님에게 적용한 단순성의 전제는 모르페와 본성을 연결하는 추가 근거다.
9절에서는 하나님이 실제로 그리스도를 높이고 이름을 주신다. 보컴은 이 변화를, 이미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 순종의 인간 생애를 거친 뒤 하나님의 종말적 통치를 실행하는 지위를 받는 일로 설명한다.31 이 설명에서는 높임의 역사적 새로움과 처음의 동등함이 함께 유지된다. 아타나시우스는 같은 문제를 신성과 인성의 관계로 설명하고, 높임의 주체가 성육신한 말씀 한 분이라는 점을 통해 인성의 부활을 그리스도 자신의 사건으로 말한다.
매그래스의 대리자 해석은 이름을 받고 권한을 맡는 관계가 그 자체로 신적 본성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점을 적절히 지적한다. 이 본문에서는 그 수여에 앞서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았다는 진술이 있고, 수여 뒤에는 이사야의 한 하나님에게 돌린 우주적인 고백이 예수에게 적용된다. 이름의 수여만을 떼어 평가하는 설명보다 처음의 동등함과 마지막의 고백을 함께 유지하는 설명이 단락의 범위를 더 충실히 반영한다.
동일 본질의 논증은 그 두 진술을 한 하나님에 관한 고백 안에 놓는다. 하나님과 동등함을 온전한 신적 지위로 읽고, 이사야의 보편적 인정이 한 하나님 자신의 신성을 드러낸다는 뜻을 유지하면, 예수는 그 하나님과 무관한 두 번째 신으로 배치될 수 없다.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구별을 유지하면서 한 분의 분할되지 않는 신적 본성을 설명하는 동일 본질의 고백이 이 관계를 표현한다. 그 결론에는 동등함의 범위, 이사야의 고유한 하나님 진술, 유일신 고백이라는 세 근거가 함께 작용한다.
빌립보서에는 그 신적 본성을 본질이라는 말로 정의하거나 영원한 나심을 설명하는 문장이 없다. 크리소스토무스는 형체의 병렬과 신적 단순성을 통해, 아타나시우스는 요한복음의 창조와 세상 이전 영광을 함께 읽어 본성의 동등성을 논증한다. 고린도전서 8:6의 만물의 창조 매개를 연결하면, 선재한 그리스도를 창조된 권세 중 하나로 설명하는 해석은 더 어려워진다. 그리스도의 신적 지위와 동일 본질에 관한 설명은 이 본문에서 출발하여 다른 창조 및 선재 본문의 근거를 함께 갖는다.
성령은 2:6-11에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 앞의 2:1에는 성령의 교제가 나오지만, 이 단락의 이야기와 고백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서술한다. 이 글에서 논한 동일 본질의 근거는 그 두 분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그 관계를 교인들의 삶에 돌려준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가진 지위를 자기 이익에 사용하지 않고 종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2:3-4에서 교인들에게 요청한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는 마음은 이 구체적인 행동과 연결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인들에게 그분이 행하신 자기 낮춤을 따라 서로를 대하라고 말한다.
각주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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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A. Holloway, Philippians: A Commentary, ed. Adela Yarbro Collins, Hermeneia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17), 115-117. 앞선 예배 자료를 재사용했다는 견해와 달리, 홀러웨이는 바울이 현재의 권면에 맞추어 작성한 찬양적 산문으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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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loway, Philippians,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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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D. G. 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 A New Testament Inquiry into the Origins of the Doctrine of the Incarnation, 2nd ed. (London: SCM Press, 1989; reprinted 1992), 114, 310-311, 주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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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loway, Philippians, 117-119. 그는 형체를 외적 모습으로 읽는 자신의 판단과 고린도후서 8:9의 양보 표현을 함께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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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loway, Philippians, 117-119. 필론과 유대 묵시 자료의 비교는 홀러웨이의 논증을 통하여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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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Bauckham, Jesus and the God of Israel: God Crucified and Other Studies on the New Testament’s Christology of Divine Identity (Grand Rapids: Eerdmans, 2009), 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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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loway, Philippians, 119-120. 그는 두 형체의 병렬을 근거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이미 누리던 상태로 읽으면서, 그 동등함을 제한된 의미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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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uckham, Jesus and the God of Israel, 41-42. 자기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지 않았다는 읽기는 보컴이 채택한 어휘·문맥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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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 114-118. 아담의 유혹과 동등함의 표현에 관한 논의는 311쪽, 주 73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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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 119-121. 던은 유형적 이야기의 선택과 의미를 중심으로 읽으며, 선재 여부를 이 찬가가 결정하는 문제로 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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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loway, Philippians, 121-124, 특히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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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uckham, Jesus and the God of Israel, 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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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loway, Philippians,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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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loway, Philippians, 12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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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loway, Philippians, 12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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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loway, Philippians, 127-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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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uckham, Jesus and the God of Israel, 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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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F. McGrath, The Only True God: Early Christian Monotheism in Its Jewish Context (Urbana and Chicago: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2009), 48-49. Perlego EPUB의 원래 인쇄 쪽수 표지를 따랐다. 유대교 대리자 자료는 매그래스가 직접 채택한 비교 논증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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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Grath, Only True God, 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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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Grath, Only True God, 50-52. 새롭게 받은 지위와 이름은 51쪽, 신적 기능에서 본성으로의 추론에 대한 비판은 51-52쪽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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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loway, Philippians, 12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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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소스토무스, 『빌립보서 강해』 6, 빌립보서 2:6의 형체와 동등함 해설. NPNF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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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소스토무스, 『빌립보서 강해』 6, 2:3의 권면과 2:6의 본보기를 연결하는 해설. NPNF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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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소스토무스, 『빌립보서 강해』 6, 모르페와 단순한 신적 본성에 관한 해설. NPNF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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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소스토무스, 『빌립보서 강해』 7, 빌립보서 2:6-7 해설. NPNF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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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소스토무스, 『빌립보서 강해』 7, 빌립보서 2:9-11 해설. NPNF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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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 논박』 1.37. 상대의 보상과 변화 가능성 논증은 아타나시우스의 소개를 통하여 확인했다. NPNF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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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 논박』 1.38-40. NPNF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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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 논박』 1.41-43. NPNF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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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 논박』 1.44-45. NPNF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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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uckham, Jesus and the God of Israel,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