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4절: 성전에서 받은 질문

그때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절을 지내고 있었다. 겨울이었다. 예수께서는 성전의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 유대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했다. “언제까지 우리를 애태우실 겁니까?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십시오.” (22-24절, 필자 번역)

성전 봉헌절은 수전절이라고도 부르는 하누카다. 기원전 164년 유다 마카베오가 더럽혀진 성전을 되찾아 하나님께 다시 봉헌한 일을 기념하는 절기였다. 예수께서는 겨울의 성전 경내, 지붕이 있는 솔로몬 주랑에 계신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그리스도인지 묻는다.1

이 질문 앞에는 양과 목자에 관한 긴 이야기가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선한 목자로 소개하셨다(10:11-18). 구약에서 목자는 백성을 다스리는 왕을 가리키기도 했다. 에스겔 34:23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종 다윗을 한 목자로 세워 양들을 돌보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예수의 목자 선언은 그가 어떤 권위로 백성을 돌보는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왕인지를 묻게 한다.2

25-27절: 증언하는 일과 듣는 양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했지만 여러분은 믿지 않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에 관하여 증언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내 양들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믿지 않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릅니다.” (25-27절)

예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밝힐 증거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을 제시하신다. 바로 앞의 이야기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던 사람이 눈을 떴다(9장). 10:21에서도 사람들은 그 일을 기억하며 예수에 관한 의견을 나눈다. 25절의 일들은 청중이 알 수 없는 숨겨진 활동이 아니다. 그들이 이미 보고 논쟁했던 일들이 예수를 증언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한다는 말에는 위임과 대표의 관계가 담겨 있다. 예수의 활동은 아버지에게서 비롯되고 그분의 뜻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아버지와 별개로 권위를 세우는 인물로 소개하지 않으신다. 카슨은 이 일들을 예수의 가르침과 함께 읽는다. 여러 기적의 수가 예수의 정체를 증명한다기보다, 그가 무엇을 가르치고 누구를 어떻게 살리는지가 아버지와의 관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3

26절은 청중의 불신을 양 떼에 속하지 않은 데서 설명한다. 문장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는 믿지 않아서 양이 되지 못했다는 순서와 다르다. 그들은 양들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믿음의 이유를 자신에게 속하는 관계에서 찾으신다. 27절의 양들은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며, 예수께서는 그들을 아신다.3

28-30절: 양들을 지키는 아들과 아버지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이보다 크시며,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28-30절)4

양들이 받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직접 주시는 분으로 말씀하신다. 멸망하지 않는다는 약속에는 강한 부정 표현이 사용된다. 이어 누구도 자신의 손에서 양들을 빼앗지 못한다고 선언하신다. 앞서 삯꾼은 이리가 오면 달아나고,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간다(10:12). 여기서는 예수께서 양들을 끝까지 지키실 수 있는지가 그 대조의 중심이다.

29절은 같은 보호를 아버지의 손에 관해서도 말한다. 양들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사람들이며, 아들과 아버지 어느 분의 손에서도 빼앗길 수 없다. 브라운은 이 표현을 아무도 하나님의 손에서 건져 낼 수 없다는 이사야 43:13과 연결한다. 하나님에게 귀속되던 보호의 권능이 예수의 손에 관해서도 서술된다.5

29절에는 아버지가 모든 것보다 크시다는 읽기와 아버지가 주신 것이 모든 것보다 크다는 읽기가 전해진다. 위 번역은 아버지의 크심을 말하는 읽기를 따른다. 아버지의 손에서 양들을 빼앗을 수 없는 까닭을 그분의 권능에서 찾는 흐름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양들을 주셨다는 관계와 두 분이 그들을 함께 지키신다는 약속이 이어진다.4

30절의 하나는 중성형 헨(ἕν)이다. 동사 에스멘(ἐσμεν)은 우리는 그렇다는 복수형이며, 주어도 나와 아버지로 구별된다. 이 문장은 예수와 아버지가 같은 한 인물이라는 뜻보다 두 분이 하나를 이룬다는 뜻으로 읽힌다. 무엇에서 하나인지는 앞의 두 절이 먼저 설명한다. 예수의 보호와 아버지의 보호는 같은 양들을 향하며, 어느 누구도 그 보호를 무너뜨릴 수 없다.

브라운은 이것을 권능과 활동의 일치로 설명한다. 카슨 역시 활동의 일치에서 출발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주고 양들을 지키는 신적 활동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에서 더 깊은 존재의 연합을 읽는다.5 두 해석의 차이는 하나라는 단어의 뜻보다, 함께 행하는 일이 두 분의 존재 관계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는지에 있다.

31-33절: 신성모독이라는 고발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 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오는 좋은 일들을 많이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일 때문에 나를 돌로 치려 합니까?” 그들이 대답했다. “좋은 일 때문에 당신을 돌로 치는 것이 아닙니다. 신성모독 때문입니다. 당신은 사람이면서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듭니다.” (31-33절)

예수께서는 돌을 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행한 일들을 다시 상기시키신다. 25절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라고 했고, 여기서는 아버지에게서 오는 좋은 일들이라고 하신다. 예수의 정체를 논하는 자리에서 그가 사람들에게 행한 일은 계속 증거로 제시된다.

고발자들이 문제 삼는 것은 좋은 일을 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지 묻던 대화가 이제 하나님과 같은 지위를 주장했는지에 관한 논쟁으로 바뀐다. 그들은 예수의 하나 됨을 종교적 지도자와 하나님 사이의 평범한 뜻의 일치로 듣지 않았다.

요한복음의 서문을 읽은 독자는 이 고발에서 뒤집힌 진술을 듣게 된다. 서문에서는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1:1, 14). 고발자들은 사람인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한다고 말한다. 브라운과 카슨은 모두 이 차이에 주목한다. 요한은 예수의 신적 지위를 서문에서부터 인정하지만, 예수께서 그 지위를 스스로 차지하신 것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분의 활동은 아버지에게서 비롯된다.6

34-36절: 시편의 신들과 아버지가 보내신 아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여러분의 율법에 ‘내가 너희를 신들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이들을 신들이라 불렀고, 성경은 폐기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다고 해서, 여러분은 내게 ‘신성모독을 한다’고 말합니까?” (34-36절)

예수께서는 시편 82:6을 인용하신다. 여기서 율법은 모세오경에 한정되지 않고 시편을 포함하는 성경을 가리킨다. 시편 82편은 신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불의한 재판을 꾸짖고, 그들도 죽음과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고 선언한다. 신들이라는 호칭은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 밖에 두지 않는다.

예수의 논증은 성경이 실제로 사용한 이 호칭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이들을 성경이 신들이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기 진술을 그 호칭 때문에 신성모독으로 처벌할 수 있느냐는 반문이다. 성경은 폐기될 수 없다는 말은 상대가 불편해하는 이 구절에도 성경의 권위가 있음을 상기시킨다.7

35절에서 신들이라 불린 이들이 누구인지를 두고 현대 주석의 설명은 갈린다. 브라운은 불의한 재판관들에게 적용된 호칭을 중심으로 논하고, 카슨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는 해석을 택한다. 천상 존재들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7 예수께서 인용에 덧붙이신 설명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도 신적 호칭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고발에 답하는 근거가 된다.

36절에서는 예수와 그들의 차이가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아버지가 거룩하게 구별하고 세상에 보내신 분으로 말씀하신다. 성경이 말씀을 받은 이들에게 그런 호칭을 허용했다면, 아버지가 구별하여 보내신 이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더욱 근거가 있다는 논증이다. 브라운은 이를 작은 경우에서 더 큰 경우로 나아가는 논증으로 설명한다.8

거룩하게 구별하셨다는 말은 성전 봉헌절의 배경과도 어울린다. 사람들이 성전을 하나님께 다시 봉헌한 일을 기념하는 때에,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구별하여 보내셨다고 말씀하신다. 브라운과 카슨은 이 표현을 예수의 몸을 성전과 연결한 2:19-21과 함께 읽는다. 거룩하게 구별하다는 동사 자체는 선지자나 제사장에게도 사용되지만, 이 복음서에서 아버지가 세상에 보내신 분은 하나님의 현존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아들이다.8

37-39절: 아버지는 내 안에, 나는 아버지 안에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지 않는다면 나를 믿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 일들을 한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다시 예수를 붙잡으려 했으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셨다. (37-39절)

예수께서는 자신의 말만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가 실제로 행하는 일이 아버지의 일인지를 보라고 하신다. 그 일들을 믿음으로 알게 될 내용은 아버지와 예수가 서로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30절의 하나 됨이 38절에서는 서로 안에 있다는 관계로 서술된다.

본문에서 일들은 예수의 주장에 바깥에서 붙는 증명 표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아버지가 예수 안에 계심을 예수의 활동 안에서 알아보게 한다. 생명을 주고 양들을 지키는 일이 그 관계를 나타낸다. 브라운은 위임받은 이가 보낸 이의 권위를 행사한다는 유대교의 대리자 개념을 이 설명에 연결한다. 카슨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신다는 관계를,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근거로 읽는다.9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일을 하고, 그 일을 근거로 믿음을 요청하며,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밝히신다. 그러나 청중은 그를 붙잡으려 한다. 그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신다. 양들이 예수와 아버지의 손 안에서 보호받는다는 약속 뒤에, 예수께서 적대자들의 손에서 벗어나는 장면이 이어진다.

교부들의 해석

테르툴리아누스: 구별되는 두 분의 하나 됨

테르툴리아누스는 『프락세아스 반박』 22장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같은 분으로 이해하는 상대에게 30절의 문법을 제시한다. 나와 아버지라는 두 주어, 복수형 동사, 그리고 하나를 뜻하는 중성형이 그의 근거다. 그는 라틴어 우눔(unum)을 한 인물을 가리키는 우누스(unus)와 대비한다. 하나라는 말 속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이 유지된다는 설명이다.10

그는 이 일치를 본질과 권능의 일치로 읽으며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순종도 함께 언급한다. 이어 32절과 38절을 연결한다. 예수의 일들은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심을 알게 한다는 설명이다. 본질의 일치는 두 분의 구별을 없애지 않으며, 활동의 일치는 그 관계를 드러낸다. 그의 해석에서 복수형은 관계의 두 주체를 뒷받침하고, 예수의 활동과 부자 관계가 하나 됨의 구체적인 의미를 설명한다.

아타나시우스: 같은 뜻과 같은 신성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파 반박』 III.2에서 인용하는 아스테리오스는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말씀과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안에 있다고 설명한다. III.10에는 같은 뜻과 판단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상대편 해석도 나온다. 아타나시우스는 선지자와 천사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능력으로 일한다는 점을 들어, 그 설명만으로는 아들의 고유한 지위를 설명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11

그가 제시하는 근거는 아들이 아버지 자신의 말씀과 지혜이며, 빛에서 나오는 광채처럼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신 분이라는 이해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한 피조물에게 힘을 주시는 관계와 다르다. 아들 안에는 아버지의 신성이 온전히 있으며,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자신의 일을 행하신다. III.3-4와 10-12에서 그는 하나 됨을 이 본질과 활동의 관계로 설명한다.11

아우구스티누스: 아버지가 주신 것을 영원한 나심으로 읽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강해』 48.6에서 29절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모든 것보다 크다는 형태로 읽는다. 그가 설명하는 선물은 아들이 아버지의 독생자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으심으로 자신과 동등한 신성을 주셨고, 이 나심에는 아들이 아직 존재하지 않던 때가 없다고 논한다.12

이 설명에는 아들이 가진 생명과 지혜가 곧 아들 자신이라는 이해가 들어 있다. 사람은 생명이나 지혜를 받아 갖지만, 아들은 생명과 지혜 자체이므로 아버지가 주신다는 말은 아들의 존재 전체와 관계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어 두 분의 손을 하나의 권능으로 풀이하고, 그 권능의 하나 됨을 신성의 하나 됨에서 설명한다(48.7).12

29절 주변에서 예수께 맡겨진 이들은 양들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읽은 주신 것을 이 양들에서 아들의 신성으로 바꾸어 설명하고, 요한복음 서문의 말씀을 그 근거로 가져온다. 영원한 나심은 이렇게 29절의 한 이문을 서문과 아들의 존재에 관한 신학으로 해석한 결과다.

본문에서 내릴 수 있는 판단

이 단락에서 하나 됨은 양들의 생명과 보호를 설명한다. 아들은 영원한 생명을 주고, 아들과 아버지는 누구에게도 양들을 빼앗기지 않으신다. 이 활동은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시고 그에게 양들을 맡기신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보내는 분과 보내심을 받은 분은 구별되며, 그 구별 안에서 생명을 지키는 권능이 함께 서술된다.

하나라는 중성형만으로 동일 본질이 입증되지는 않는다. 요한복음 17:11, 21-23에서는 제자들의 연합에도 같은 단어가 사용된다. 10장의 신적 지위에 관한 근거는 이 단어의 성보다, 예수가 무엇을 하는 분이며 아버지와 어떤 관계에 있는 분으로 서술되는지에 있다. 브라운도 권능과 활동의 일치를 강조하면서 그 진술에 존재론적 함의가 있다고 평가한다. 카슨은 그 함의를 요한복음의 다른 신성 진술들과 함께 더 적극적으로 읽는다.56

제임스 D. G. 던은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요한복음의 표현을,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자신을 알리신다는 의미로 설명한다. 그는 예수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현존과 하나님 자신을 구별하며, 요한복음 10:34-35에서 다른 이들도 신들이라 불린다는 사실을 그 논의에 연결한다.13 던에게 예수의 신성은 하나님이 창조 세계와 백성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활동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동일 본질 해석은 아들이 행하는 이 일이 어떤 종류의 일인지를 따진다. 아들이 아버지의 생명을 주고 어느 세력도 무너뜨릴 수 없는 아버지의 보호를 행한다면, 아들을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피조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서문에서는 만물이 말씀을 통해 생겨났고, 5:19에서는 아들이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그대로 한다. 이 진술들을 연결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신적 생명과 권능을 함께 지니신다고 읽을 근거가 커진다. 아타나시우스는 말씀과 아들이라는 호칭을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신 관계로 해석하여, 공동 활동이 가능한 이유를 설명한다.

이 해석에서 아버지는 아들의 활동의 근원이시다. 양들을 주시고 아들을 보내시는 분은 아버지이며, 아들은 그 일을 받아 행하신다. 본문이 묘사하는 동등한 보호의 권능은 부자 관계의 방향을 없애지 않는다. 동일 본질 해석에 따르면,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같은 신성을 지니시므로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일을 같은 권능으로 행하신다. 이 설명은 아들의 의존과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아들의 권능을 함께 담는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이 단락에는 아들의 나심이나 그 영원성이 직접 서술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29절을 영원한 나심으로 읽을 때에는 다른 본문과 아들의 존재에 관한 전제가 더해진다. 10:22-39가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생명을 주고 지키시는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하며, 아버지는 그 안에 계시고 그는 아버지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양들은 바로 그 관계 안에서 보호받는다.

성경 인용은 SBLGNT를 기준으로 옮긴 필자 번역이다. 29절에서 선택한 다른 읽기는 각주 4에 밝혔다. 요한복음 헬라어 본문. © 2010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and Logos Bible Software, CC BY 4.0.

각주와 자료

  1.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Grand Rapids: Eerdmans, 1991), 391-392; Raymond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I-XII):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AB 29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8; 초판 1966), 402. 성전 재봉헌의 역사적 배경과 솔로몬 주랑에 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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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406;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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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392-393;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406-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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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9절의 번역은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393-394가 따르는 읽기를 택했다.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403은 서로 다른 구문을 만드는 여러 이문을 설명한다. 기준 판본인 SBLGNT는 중성 관계대명사 ὃ와 남성 비교급 μείζων을 함께 인쇄한다. Brown의 번역은 내게 주신 것과 관련하여 아버지가 모든 것보다 크시다는 뜻이다. 위의 29절 번역은 SBLGNT의 이 구문과 다르다. 양들을 가리키는 목적어는 문맥에서 보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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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407-408;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394-395. Brown은 407쪽에서 이사야 43:13 및 지혜서 3:1과의 관련성, 권능과 활동의 일치, 이 진술과 후대 본질 개념의 관계를 설명한다. Carson은 394-395쪽에서 17장의 제자들의 연합과 비교하고, 복음서 전체에서 10:30의 존재론적 함의를 논한다.

    본문 1 본문 2 본문 3

  6.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408;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395-396. 고발의 내용과 서문의 성육신 진술 사이의 관계. Brown은 신성에 관한 진술이 주로 활동을 서술하면서도 존재론적 함의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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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397-399;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403-404, 409-410. Carson은 재판관, 천상 존재, 시내산의 이스라엘이라는 해석을 비교하고 마지막 견해를 택한다. Brown은 재판관 해석을 중심으로 설명하면서 시내산 해석도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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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410-411;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399. 작은 경우에서 더 큰 경우로 나아가는 논증과 예수의 구별 및 파송, 성전 봉헌절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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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411-412;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399-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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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Tertullian, Against Praxeas 22, 공개 영어 본문. 복수형과 중성형에 관한 논증, 아버지와 아들의 권능 및 본질의 일치, 10:32와 10:38의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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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Athanasius, Discourses Against the Arians III.2-4, 10-12, 공개 영어 본문. 아스테리오스의 견해는 III.2에 인용된 형태로 확인했다. 같은 뜻과 판단으로 하나 됨을 설명하는 견해 및 아타나시우스의 반박은 III.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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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48.6-7, 공개 영어 본문. 29절의 주신 것을 아들의 영원한 나심과 신성으로 읽는 설명은 48.6, 두 분의 손과 권능을 연결하는 설명은 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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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James D. G. Dunn, Did the First Christians Worship Jesus? The New Testament Evidence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10), 134-135, 특히 135쪽 각주 93. Dunn은 필론과의 비교에서 요한복음의 신적 호칭에 한정된 의미가 있을 가능성을 논한다. 시편 82:6과 요한복음 10:33-35의 연결은 각주 93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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