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절: 태초에 계셨던 말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분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1-2절, 필자 번역)

요한복음은 창세기의 첫 문장을 떠올리게 하는 말로 시작한다. 그러나 여기서 먼저 소개되는 것은 하늘과 땅이 만들어지는 사건이 아니다. 태초에 이미 계셨던 말씀이다. 서문은 말씀의 출생이나 출현을 서술하지 않고, 그분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한다.

계셨다는 동사 에엔(ἦν)의 형태만으로 영원성을 입증할 수는 없다. 그 의미는 태초라는 시간 표현, 뒤이어 나오는 만물의 생성, 그리고 두 진술 사이의 관계에서 판단해야 한다. 서문이 창조의 시작을 말할 때 말씀은 이미 계신 분으로 소개된다. 이후 생겨난 것들과 말씀 사이의 차이가 이 첫 문장에서 시작된다.1

말씀이라는 호칭에는 당시 독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배경이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를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알리며, 구원과 심판을 실행한다. 창세기 1장의 창조 명령, 시편 33:6의 하늘을 이루는 말씀, 이사야 55:11의 뜻을 이루는 말씀이 그 예다. 유대교의 지혜 전승에도 창조에 참여하고 인간에게 생명과 가르침을 주는 지혜의 모습이 있다. D. A. 카슨은 이 성경적 배경을 로고스(λόγος)라는 호칭을 이해하는 중요한 근거로 삼는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독자에게 이 단어는 이성이나 말이라는 더 넓은 연상도 불러일으킬 수 있었지만, 서문 안에서 이 호칭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따라 읽어야 한다.1

첫 절은 말씀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두 방향에서 서술한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 동시에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함께 계신다는 말은 말씀과 그 상대를 구별하게 하고, 하나님이시라는 말은 말씀에게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돌린다. 두 문장 가운데 하나를 지우면 요한의 진술도 달라진다.

마지막 절구의 헬라어는 테오스 에엔 호 로고스(θεὸς ἦν ὁ λόγος)다. 관사가 있는 말씀이 주어이고, 앞에 놓인 하나님이 말씀에 관하여 서술한다. 여기서 하나님에 관사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하나의 신이나 더 낮은 신을 뜻한다고 정할 수는 없다. 명사의 역할과 어순, 앞뒤 문맥을 함께 보아야 한다. 레이먼드 브라운과 카슨은 모두 말씀은 하나님이셨다는 번역을 지지하면서, 그 말이 말씀과 함께 계신 하나님과의 구별을 없애지 않는다고 설명한다.2

2절은 이 관계를 다시 말한다. 하나님이라고 불린 바로 그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이제 서문은 이 말씀과 만물의 관계를 설명한다.

3-5절: 만물과 생명과 빛

만물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다. 생겨난 것 가운데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나며, 어둠은 그것을 이기지 못했다. (3-5절)3

3절은 같은 주장을 긍정과 부정으로 반복한다. 만물은 말씀을 통해 생겨났고,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에서 말씀의 역할을 어떤 특정한 부분에 제한하기 어렵게 하는 표현이다. 이 문장의 자연스러운 독해는 말씀을 생겨난 것들 가운데 하나로 놓기보다, 그 모든 것이 생겨나는 데 관여하는 분으로 구별한다.

이 때문에 1절의 하나님이라는 서술도 문맥에서 더 구체화된다. 말씀은 단지 높은 지위를 부여받은 존재라고만 소개되지 않는다. 만물의 기원이 말씀과 연결된다. 서문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의 정체를 창조에 관한 진술로 설명한다.

이어 생명과 빛이 등장한다. 생명은 말씀 안에 있으며, 그 생명이 사람들에게 빛이 된다. 관심이 만물의 생성에서 인간과 말씀의 관계로 좁혀진다. 창조를 가능하게 한 말씀이 인간에게 무엇을 주는지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5절의 이기지 못했다는 동사는 붙잡다, 이해하다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다. 여기서는 빛과 어둠의 대립을 따라 이기지 못했다고 옮겼다. 빛은 어둠 속에서 계속 빛난다. 이어지는 단락은 그 빛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3

6-13절: 빛의 증인과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하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에 관하여 증언하여, 모든 사람이 그를 통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빛이 아니었고, 빛에 관하여 증언하러 왔다. (6-8절)

서문에 요한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 역시 하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빛을 증언하는 것이다. 본문은 그가 빛 자체는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사실을 공유해도, 보내심을 받은 이들의 정체와 역할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요한의 증언은 사람들을 자신에게 머물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를 통해 사람들이 빛을 믿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구별은 복음서의 뒤이은 이야기를 읽는 기준이 된다. 증인은 빛을 알리지만, 생명의 근원이 되는 빛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오고 있었다. 그분은 세상에 계셨고 세상은 그분을 통해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지 못했다. 그분은 자기에게 속한 곳에 오셨지만, 자기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인 사람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권한을 주셨다. 그들은 혈통이나 육체의 욕망이나 남자의 뜻으로 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9-13절)

9절은 세상에 오는 참빛을 말한다. 모든 사람을 비춘다는 진술은 모든 사람이 그 빛을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바로 다음 문장은 그 빛을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세상을 서술한다. 세상이 자신을 통해 생겨나게 한 분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데 이 장면의 비극이 있다.

11절에서는 그분에게 속한 곳과 사람들이 강조된다. 자기 사람들로 옮긴 표현은 그분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카슨은 복음서 전체를 고려하여 이 말을 이스라엘의 역사와 연결한다. 그러나 거부가 마지막 말은 아니다. 12절은 실제로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다.4

말씀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권한을 주신다. 13절은 그 자녀 됨을 인간의 혈통이나 출생의 의지로 설명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서 난다는 말로 설명한다. 사람들의 응답과 하나님의 일이 같은 단락 안에 함께 놓인다.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집안이나 육체적 계보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표현은 믿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표현 자체만으로 그 대상이 영원하거나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같은 서문 안에서도 누가 어떤 문맥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지 살펴야 한다. 말씀은 태초에 이미 계셨으며 만물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다고 소개되지만, 사람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14-17절: 육신이 되어 거하신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아버지에게서 오신 유일한 아들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14절)

1절에서 소개된 말씀이 다시 명시적으로 등장한다. 이번에는 육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육신은 인간의 연약하고 구체적인 삶을 가리킨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인간의 삶 안에 오셨다는 선언이다. 서문은 말씀의 높음을 설명한 다음 인간 세계와의 거리를 유지하지 않는다.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말한다.

거하셨다는 동사 에스케노센(ἐσκήνωσεν)은 장막을 치고 머무는 것을 나타낸다. 이 말과 곧이어 나오는 영광의 언어는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거하셨던 구약의 장막을 떠올리게 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했던 출애굽기 33-34장과도 연결하여 읽을 수 있다. 카슨은 거하심, 영광, 은혜와 진리라는 표현들을 함께 고려하여 이 구약 배경을 설명한다.5

이 절에서는 아버지와 유일한 아들의 관계가 드러난다. 유일한으로 옮긴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는 전통적으로 독생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왔다. 이 문맥에서 먼저 강조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독특한 관계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들을 말한 12-13절에 이어, 말씀은 아버지에게서 오신 유일한 아들로 소개된다. 이 호칭을 영원한 나심의 교리와 연결하려면 추가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단어 하나가 그 나심의 시간과 방식을 모두 설명하지는 않는다.5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는 진술도 중요하다. 서문의 말은 이제 목격과 증언의 언어가 된다. 태초에 계셨던 말씀에 대한 진술은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의 영광을 보았다는 고백과 연결된다. 말씀의 정체와 인간 가운데 오신 사건이 하나의 이야기로 제시된다.

요한이 그분에 관하여 증언하며 외쳤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서는 것은 그분이 나보다 먼저 계셨기 때문이다. 내가 말한 분이 바로 이분이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충만함에서 받았으니, 은혜를 대신하는 은혜를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어졌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기 때문이다. (15-17절)

요한의 증언이 다시 등장한다. 자기 뒤에 나타나는 분이 자기보다 먼저 계셨다는 말은 서문 첫머리와 연결된다. 이 분의 정체를 사람들 앞에 나타난 순서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앞에서 빛 자체와 빛의 증인을 구분했던 서문은, 이제 요한의 입을 통해 그분의 우선성을 말한다.

16절의 은혜를 대신하는 은혜는 번역과 해석이 갈리는 표현이다. 은혜 위에 은혜 또는 은혜가 거듭 주어진다는 뜻으로 옮길 수도 있다. 여기서는 안티(ἀντί)의 교체 의미와 뒤따르는 17절의 설명을 고려하여, 앞선 은혜에 이어 새로운 은혜가 주어졌다는 뜻으로 읽는다. 카슨은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도 은혜의 선물이며, 이제 육신이 된 말씀 안에서 새로운 은혜가 왔다고 설명한다. 브라운 역시 이 해석을 주요 선택지로 검토한다.6

1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처음 나온다. 태초에 계셨고, 세상에 오셨으며, 육신이 되어 거하신 말씀의 이야기가 이 이름과 연결된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은혜와 진리가 비교되면서, 하나님을 알리는 계시가 어떻게 주어지는지 설명한다. 뒤따르는 마지막 절이 그 의미를 분명하게 한다.

18절: 아버지를 알려 주신 분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품에 계신, 하나님이신 유일한 아들이 그분을 알려 주셨다. (18절)

18절에는 중요한 본문 이문이 있다. 여기서는 SBLGNT가 채택한 모노게네스 테오스(μονογενὴς θεός)를 하나님이신 유일한 아들로 옮겼다. 유일한 아들은 모노게네스를 앞의 14절과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풀어 옮긴 말이다. 다른 전승에는 테오스 대신 아들이라는 명사 휘오스(υἱός)가 나온다. 브라운과 카슨은 모두 하나님이라는 읽기를 중요하게 평가하며, 아들이라는 익숙한 표현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을 논한다.7

하나님이라는 읽기를 따르면, 서문의 마지막은 첫 문장과 긴밀하게 호응한다. 처음에는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했다. 끝에서는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아버지의 품에 계신 분으로 소개한다. 두 곳 모두 신적 정체와 관계의 구별이 함께 유지된다.

아버지의 품은 가까움과 사랑, 친밀한 앎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분이 하나님을 알려 주실 수 있는 근거는 아버지와의 이 관계에 있다. 알려 주셨다는 동사 엑세게사토(ἐξηγήσατο)는 설명하고 이야기하여 알게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존재와 삶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하시는 분으로 서문에 제시된다.7

제임스 D. G. 던은 요한복음의 이 특징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자신을 만난다는 주장으로 설명한다. 동시에 예수가 아버지와 구별되는 아들이라는 점도 유지한다.8 요한의 서문에서 하나님에 대한 앎은 이 관계를 통해 주어진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나님이신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아버지를 알려 주신다.

교부들이 읽은 서문

이레네우스: 창조와 구원의 주체를 연결하다

이레네우스는 『이단 논박』 III.11.1-3에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예수를 보내신 아버지를 분리하는 해석에 맞서 요한복음 서문을 읽는다. 그는 만물이 말씀을 통해 생겨났다는 진술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진술을 연결한다. 이 세계를 지으신 분과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의 이야기를 서로 다른 신적 존재들의 일로 갈라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9

이레네우스는 요한이 케린투스 등의 가르침을 반박하려고 복음서를 썼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이레네우스가 전하는 저술 목적에 관한 해석이다. 그 설명을 곧바로 복음서의 역사적 집필 상황 전체와 동일시하기보다, 그가 서문을 어떤 논쟁에서 사용했는지를 먼저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논증에서 중요한 점은 창조의 말씀과 육신이 된 말씀의 동일성을 보존한다는 데 있다.

테르툴리아누스: 13절을 그리스도의 탄생에 적용하다

『그리스도의 육신에 관하여』 19장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13절을 단수형으로 읽어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 혈통이나 육체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난 분이 그리스도이며, 이것이 인간 아버지의 생식에 의하지 않은 탄생을 말한다고 논증한다. 그는 상대가 믿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복수형으로 읽는 데 반대한다.10

SBLGNT가 채택한 복수형의 주어는 12절에서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이 본문은 신자의 자녀 됨을 설명하며, 테르툴리아누스가 읽은 단수형 본문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설명한다.

오리게네스: 관사의 차이를 신성의 근원과 연결하다

오리게네스는 『요한복음 주석』 II.1-3에서 말씀은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고 설명하면서, 1절의 하나님이라는 명사에 관사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를 구분한다. 그는 성부를 스스로 하나님이신 분으로, 말씀을 아버지와 함께 계심으로써 언제나 하나님이신 분으로 읽는다. 말씀은 다른 존재들이 하나님을 알고 신적 생명에 참여하도록 매개하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11

오리게네스는 말씀의 신성을 인정하면서 말씀과 아버지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는 관사의 유무를 해석할 때 신성의 근원과 참여에 관한 이해를 사용한다. 이 존재론적 설명에는 관사의 차이 외에도 근원과 참여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크리소스토무스: 관사로 신성의 높낮이를 정할 수 없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요한복음 강해』 4.3에서 아들을 가리키는 하나님에 관사가 없다는 이유로 그 신성을 낮추는 해석에 반박한다. 다른 성경 구절에서도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에 관사가 생략될 수 있음을 들고, 서문이 말씀에게 창조의 활동과 태초의 존재를 돌린다는 점을 함께 읽는다.12

그의 논증은 하나님이라는 명사의 형태 하나보다 그 명사가 놓인 문장과 말씀에게 귀속된 활동을 함께 살핀다는 데 강점이 있다.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부른 직후 만물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다고 말하는 흐름은, 그 호칭을 낮은 등급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로 읽는 해석에 어려움을 준다. 현대 주석가들이 관사의 유무만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고 구문과 문맥을 함께 고려하는 이유도 이와 연결된다.

서문 전체에서 내릴 수 있는 판단

이 서문은 말씀의 정체를 인간을 향한 활동과 함께 설명한다.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나님이시다. 만물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고, 그분 안의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 된다. 요한은 그 빛을 증언하며,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고 아버지를 알려 주셨다는 고백으로 서문이 마무리된다.

따라서 1절의 말씀은 하나님이셨다는 진술을 서문 전체에서 떼어 읽기 어렵다. 말씀의 신성은 창조, 생명, 육신이 되심, 아버지에 대한 계시와 연결된다. 특히 창조된 만물이 말씀을 통해 생겨났다는 서술은 말씀을 피조물 가운데 한 존재로 분류하는 해석에 강한 제약을 준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말과 아버지의 품에 계신다는 말은 그분을 관계의 상대와 구별한다.

6-13절도 이 판단에 기여한다. 요한 역시 하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았지만 빛 자체는 아니다.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에게서 나지만, 말씀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보내심이나 나심이라는 표현만으로 신적 지위를 결정할 수 없다. 서문이 각각의 인물을 어떻게 소개하고, 어떤 활동과 관계를 귀속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이 본문은 말씀의 신성을 명확히 서술하면서도 하나님과 말씀,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을 유지한다. 이것은 동일 본질과 위격의 구별을 논증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서문은 본질과 위격이라는 개념을 정의하거나 영원한 나심의 방식을 설명하지 않는다. 교부들은 본문이 서술하는 관계를 해명하면서 자신의 신학적 개념과 논증을 사용했다. 오리게네스와 크리소스토무스의 관사 해석에서 보듯, 그 과정의 판단들이 모두 일치한 것도 아니다.

서문 자체가 마지막에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분의 정체다. 아버지를 알려 주신 분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말씀이며, 우리 가운데 육신으로 거하신 예수 그리스도다. 말씀의 신성과 아버지와의 관계는 바로 이 계시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설명한다.

성경 인용은 SBLGNT의 어휘를 기준으로 옮긴 필자 번역이며, 3-4절의 구두점 선택은 각주 3에 밝혔다. 요한복음 헬라어 본문. © 2010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and Logos Bible Software, CC BY 4.0.

각주와 자료

  1.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Grand Rapids: Eerdmans, 1991), 113-116. 말씀의 존재와 만물의 생성은 114, 118쪽, 구약의 말씀과 지혜 배경은 115-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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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Raymond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I-XII):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AB 29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8; 초판 1966), 5;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116-117,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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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3-4절의 번역은 ὃ γέγονεν을 앞 문장의 끝에 연결하는 구두점을 따른다. SBLGNT의 구두점과 Brown은 이 어구를 뒤 문장에 연결한다. 여기서는 4절을 말씀 안의 생명에 관한 독립문장으로 읽으며, Carson이 제시한 구문과 반복 표현에 관한 설명을 따른다.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6-7;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118-120, 137-138. 5절의 이기다와 이해하다라는 의미에 대해서는 Carson,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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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124-126;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10-12. 13절의 복수형 본문에 대해서는 Brown, 11-12; Carson, 13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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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13-14;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126-130. 14절의 오신은 문맥에서 보충한 말이다. μονογενής의 문맥적 의미와 나심의 교리적 설명은 구별하여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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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130-134;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15-16. 은혜를 대신하는 은혜는 이 글이 선택한 해석이며, 중첩이나 상응으로 읽는 선택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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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17;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134-135, 139. 18절의 하나님과 아들이라는 이문, 아버지의 품과 계시의 관계를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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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James D. G. Dunn, Did the First Christians Worship Jesus? The New Testament Evidence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10),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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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Irenaeus, Against Heresies III.11.1-3, 공개 영어 본문. 케린투스 등에 대한 설명은 이레네우스가 전하는 형태로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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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Tertullian, On the Flesh of Christ 19, 공개 영어 본문. 그가 상대의 읽기를 비판하는 진술과 실제 본문 전승의 역사적 판정은 구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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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Origen, Commentary on John II.1-3, 특히 공개 영어판의 II.2, 공개 영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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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John Chrysostom, Homilies on John 4.3, 공개 영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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