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나시우스는 요한복음 17장의 비교 표현에서 말씀과 아버지의 본성적 동일성을 처음으로 도출하지 않는다. III.22 첫 문장에서 말씀이 아버지와 실제로 같은 본성을 가진다고 먼저 서술하고, 우리에게는 그 관계를 모방하는 길이 주어졌다고 설명한다.1 그 뒤 몸과 성령을 통한 신자의 일치를 이 본래 관계와 구별한다.

필요한 앞 문맥인 21절에서 그는 우리 안에라는 표현을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를 배우는 모형으로 읽고, 아버지와 아들의 능력으로 신자들이 하나 될 수 있다는 풀이도 제시한다.2 22절은 여기에서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크고 온전한 것을 요청하신다고 서술한다. 말씀이 우리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우리 안에 계신다는 설명이다.3 모방과 동의를 말한 뒤 성육신과 온전함의 관계를 더한다.

이 대목의 인칭은 서로 다른 층위에 놓여 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요한복음 17:23의 인용에서 나는 예수다. 아타나시우스는 그 인용의 뜻을 풀면서 예수의 목소리로 자신이 아버지의 말씀이므로 아버지 안에 있고, 몸 때문에 신자들 안에 있다고 말하게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몸의 온전함과 한 몸·한 영으로 자라는 설명은 이 풀이 안에 있다.4 이어 저자는 같은 분에게서 받아 한 몸이 된 우리가 우리 안에 한 주님을 지닌다고 말하며 1인칭 복수로 돌아온다. 같은 대상이라는 말은 ἐκ τοῦ αὐτοῦ이며, 뒤의 한 주님을 문맥상 받는다고 읽을 수 있지만 그 어구 자체에 몸이라는 명사가 적혀 있지는 않다.5

22절 후반의 가상 문장들도 성경 인용과 구별된다. 예수께서 그들이 아버지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또는 그들과 나도 아버지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라고 조건 없이 말씀하셨다면 반대자의 주장에 여지가 있었을 것이라고 아타나시우스가 가정한다. 그는 실제 인용의 나와 아버지 관계, 신자의 하나 됨 사이에 καθώς라는 비교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가 서술한 하나님과 피조물의 거리는 자리의 거리가 아닌 본성의 차이다.6 이 본성 차이는 비교어의 일반 문법에서 나온 관찰보다 말씀과 신자의 존재에 관하여 그가 먼저 세운 판단이다.

23절의 요나 사례는 비교의 범위를 좁힌다. 요나가 큰 물고기 안에 있었던 사흘과 인자가 땅에 머무는 사흘이 대응하지만, 요나와 구원자가 같은 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 비교에서 동등한 전체 정체성이 아니라 제한된 유사성을 읽는다.7 실제로 그 사례는 사흘이라는 특정한 속성의 일치까지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교어가 모든 문맥에서 동일성이나 동등성을 배제한다는 문법 규칙으로 그의 논박을 바꿀 수는 없다. 같은 본성인지 다른 본성인지를 정하려면 무엇을 비교하는지와 각 대상의 관계를 따로 설명해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본성에 따른 일치의 모형이고, 신자는 마음과 정신의 합의를 통하여 서로 하나 된다고 서술된다.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신 관계를 본래 가지며, 우리는 그 본래 관계를 가지지 못하므로 모형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8 그러나 신자들이 받는 일치의 내용은 합의에서 끝나지 않는다. 23절에서 아타나시우스는 예수의 기도를 풀어 쓰며 아버지께 그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 안에서 하나 되고 말씀 안에서 온전해지게 하시라고 요청한다. 성육신한 말씀이 그들의 몸을 취하여 구원의 일을 완성하셨고, 죄에서 풀려난 사람들이 더는 죽은 상태에 머물지 않으며 하나님에 참여하는 생명을 얻고 서로 사랑으로 결속된다고 설명한다.9 몸·성령·참여는 신자의 일치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관계다. 같은 기도 풀이에서 아버지가 말씀에게 이 몸을 입는 일을 주셨다는 말도 나온다. 아버지가 말씀에게 주신 것은 이 몸을 입는 일이며, 신자에게 주실 것으로 청하는 대상은 성령이다. 이 두 받음만으로 서로의 본성 관계가 결정되지는 않는다.

이 본문이 직접 제시하는 구별은 말씀이 본래 가지는 아버지와의 관계와 신자가 성육신과 성령의 선물로 받는 관계다. 받은 성령과 구원의 효과를 은혜에 따른 일치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에서 본성에 따른 동일성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말씀이 아버지에게 본래 속한 참된 말씀이며 인간은 그 관계를 본래 가지지 않는다는 전제가 쓰인다. 비교어만으로 그 전제를 증명할 수는 없다. 말씀의 창조주 지위에 관한 기존 C12의 판단은 연결한 요한복음 1:1-3 등의 근거와 함께 평가할 주장으로, III.22-23만의 창조 증명은 아니다.10

강한 반론은 요한복음의 비교가 아버지·아들의 일치와 신자의 일치를 하나의 관계 유형에 놓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 경우 아버지·아들의 본성적 동일성을 미리 전제하면 그 기도의 의미를 설명하기보다 이미 가진 결론으로 비교를 제한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아타나시우스의 답변은 모방, 성육신의 몸, 주님에 대한 참여, 성령의 선물을 서로 연결하여 신자의 일치를 설명한다는 데 있다. 이 읽기는 그의 말씀 이해와 구원 이해 안에서 일관되지만, 요한복음 17의 비교어 자체를 같은 본질의 독립 증명으로 제시하지는 못한다. 성령을 받는 신자의 온전함은 이 두 절에서 직접 설명되고, 아버지와 말씀의 본성적 동일성은 22절 첫 문장에 놓인 해석의 전제로 남는다.

6개 주장 대조표와 가능한 반론 · 판본·실제 판면·지지와 유보

각주와 자료

  1. 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파 반박』 III.22, Patrologiae cursus completus, Series Graeca, 26, J.-P. Migne 편, S. P. N. Athanasii opera omnia, II (Paris: J.-P. Migne, 1857), 그리스어 368열의 22절 첫 문장. 367-368열 판면. τὴν ὄντως καὶ ἀληθῶς ταυτότητα τῆς φύσεως τῷ Πατρὶ ἔχει와 τὸ μιμεῖσθαι πρόσεστιν. 현대 비평판은 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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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같은 글 III.21, 그리스어 365열 21절 표지부터 368열 22절 표지 전까지. 365-366열 판면 · 367-368열 판면. 모형 풀이와 능력 풀이를 제시하는 문맥만 읽었다. 이전 20절은 분석 근거로 사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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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같은 글 III.22, 368열. 367-368열 판면. μεῖζόν τι καὶ τελειότερον … αἰτεῖ 및 τὸ γὰρ ἡμέτερον ἐνεδύσατο σῶμα. ἐνεδύσατο는 몸을 입었다는 부정과거 중간태 3인칭 단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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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같은 글 III.22, 368열 끝에서 369열 앞부분. 367-368열 판면 · 369-370열 판면. 실제 요 17:23 인용과 σοῦ γὰρ εἰμι Λόγος부터 이어지는 기도 풀이를 구별했다. 엡 4:4·13을 잇는 한 몸·한 영·온전한 사람의 표현도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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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같은 글 III.22, 369열. 369-370열 판면. Οἱ γὰρ πάντες, ἐκ τοῦ αὐτοῦ μεταλαμβάνοντες, ἕν γινόμεθα σῶμα, τὸν ἕνα Κύριον ἔχοντες ἐν ἑαυτοῖς. τοῦ αὐτοῦ는 남성·중성 속격 형태가 같으며, 주님이라는 읽기는 바로 뒤의 문맥을 따른 번역이다. 성찬의 구체적 교리를 독립 대조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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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같은 글 III.22, 369열의 εἰ μὲν ἁπλῶς부터 23절 표지 전까지. 369-370열 판면. οὐ τόπῳ, ἀλλὰ τῇ φύσει와 οὐ ταυτότητα, οὐδὲ ἰσότητα … κατὰ τι θεωρούμενον. 그리스어 비교어와 영어의 해당 표현을 대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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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같은 글 III.23, 369열의 23절 표지부터 372열 앞부분. 369-370열 판면 · 371-372열 판면. 이 인쇄판의 마 12:40 인용은 καθώς와 큰 물고기 안의 καρδία 표현을 포함한다. 현재 신약 비평본문의 인용 형태로 고쳐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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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같은 글 III.23, 372열. 371-372열 판면. ἐν τῷ φρονήματι καὶ τῇ τοῦ πνεύματος συμφωνίᾳ, φύσει γὰρ ὑπάρχει τοῦτο αὐτῷ, ἡμεῖς δὲ οὐκ ἔχοντες τὸ κατὰ φύσιν. 정신의 합의라는 번역과 아래 하나님의 성령을 주신다는 관계를 구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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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같은 글 III.23, 372열의 ὅταν δὲ φησί부터 절 끝까지. 371-372열 판면. δὸς αὐτοῖς τὸ Πνεῦμά σου, ἵνα καὶ αὐτοὶ ἐν τούτῳ ἓν γένωνται, καὶ τελειωθῶσιν ἐν ἐμοί 및 θεοποιηθέντες ζῶσιν. θεοποιηθέντες ζῶσιν은 직역하면 신화(神化)되어 살아간다는 표현이다. 본문의 하나님에 참여하는 생명이라는 설명은 성육신·성령·구원으로 받는 변화를 따른 풀이다. 신자의 이 새 상태는 같은 절의 본래 갖지 못하는 관계와 함께 서술되어, 말씀의 본성적 동일성이라는 첫 술어와 구별된다. 이 긴 1인칭 발언은 아타나시우스의 기도 해설이며 모두가 요한복음의 문자적 인용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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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기존 C12와 S18 및 기존 논증문과 주26. 본문에 채택되지 않은 369-372열 주(1)의 긴 삼위일체 문구는 자연적 동일성의 별도 증거로 사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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