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의 마지막 명령에서 예수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한다. 삼위일체 교리를 논할 때 자주 읽는 구절이다. 세 분의 호칭이 함께 나올 뿐 아니라, 예수의 제자가 되는 일이 이 세 분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교부들도 이 구절을 읽었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세례에서 고백하는 세 분의 구별, 그리고 그 고백이 교회의 신앙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부활한 예수의 명령과 세례

예수께서 다가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이 내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보아라, 나는 세상 끝까지 모든 날에 너희와 함께 있다.” (마 28:18-20, 필자 번역)

이 명령은 예수에게 주어진 권한에 근거한다. 19절의 그러므로는 앞의 선언과 뒤의 명령을 연결한다. 제자들이 모든 민족에게 나아갈 수 있는 근거는 부활한 예수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이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마태복음의 관심은 예수의 지상 사역이 끝난 뒤에도 그의 가르침과 통치가 제자들을 통해 계속되는 데 있다.

명령의 중심 동사는 제자로 삼으라는 말이다. 세례를 베풀고 가르치는 행위가 그 명령에 연결된다. 세례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삶에 들어가는 행위이며, 가르침은 예수가 명령한 것을 지키도록 이끈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은 제자 됨과 떨어진 부가 설명으로 보기 어렵다. 새롭게 제자가 되는 사람은 이 세 분과 관계를 맺으며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살게 된다.1

이름으로라는 표현은 에이스 토 오노마(εἰς τὸ ὄνομα)다. 존 놀런드는 마태복음 18:20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표현과 비교하여 소속과 충성의 관계를 강조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은 예수를 중심으로 모이며 그에게 속한다. 이 의미를 28:19에 적용하면 세례받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게 속하여 살도록 받아들여진다.2

이름이라는 명사가 단수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 뒤에는 아버지, 아들, 성령을 가리키는 세 소유격 표현이 각각 관사와 함께 이어진다. 세 분이 구별되어 있으면서 하나의 이름 구문 아래 놓인다. 여기서 곧바로 세 분이 하나의 본질을 공유한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는지는 더 따져야 한다.

단수 명사에 여러 소유격 표현이 연결되는 문법 자체가 동일 본질을 뜻하지는 않는다. 놀런드는 이 문장을 아버지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이름의 단수형은 삼위일체적 독해와 잘 어울린다. 그러나 그 독해를 입증하려면 이 구절에서 이름이 어떤 관계를 나타내는지, 세 분이 마태복음에서 누구로 서술되는지를 함께 설명해야 한다.

이 구절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세례 명령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어느 한 분에게만 속한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이 명령의 내용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사람의 소속이 세 분 모두와 관련된다. 바로 이 점이 이 구절을 삼위일체 논의의 주요 본문으로 만든다.

마태복음이 이미 서술한 관계

복음서 앞부분에서 예수의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를 한 장면 안에 제시한다. 예수는 물에서 올라오고, 하나님의 영은 내려오며, 하늘의 음성은 예수를 사랑하는 아들로 선언한다(3:16-17). 28:19의 호칭들을 읽는 독자는 이미 이 장면을 알고 있다.

예수는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받았다고 말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아는 독특한 관계를 밝힌다(11:27). 제자들이 박해받을 때에는 아버지의 영이 그들 안에서 말씀하신다(10:20).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각각 고립된 존재로 등장하지 않는다. 마태는 아버지께서 예수를 통해 행하시는 일과 성령의 활동을 함께 서술해 왔다.

세례 명령 뒤에 오는 현존의 약속도 이 관계를 해석하는 데 중요하다. 예수는 제자들이 세상 끝까지 자신의 가르침을 지키도록 이끌면서, 자신도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약속한다. 이 약속은 복음서 첫머리의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설명을 떠올리게 한다(1:23). 놀런드는 이런 연결 속에서 마지막 세례 명령을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 성령으로 행하신 일을 압축한 표현으로 읽는다.3

이것은 복음서 전체를 종합한 해석이다. 28:19 한 문장에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통해, 성령으로라는 행위의 구분이 모두 적혀 있는 것은 아니다. 마태가 앞서 서술한 관계들을 마지막 명령과 연결할 때 그 의미가 구체화된다. 이 해석의 설득력은 단수인 이름 하나보다 복음서의 여러 장면이 실제로 연결된다는 데 있다.

초기 교회와 교부들이 읽은 세례 명령

『디다케』 7장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지시한다. 흐르는 물을 우선하되 상황에 따라 다른 물을 사용할 수 있고, 필요한 경우에는 머리에 물을 세 번 부으라고 한다. 세 분의 이름은 실제 세례를 시행하는 지침 속에 들어 있다. 9:5에서는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을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사람이라고 부른다.4

『디다케』는 익명의 초기 교회 문헌이며, 이 대목에서 마태복음의 문법을 해설하지는 않는다. 그 가치는 같은 세례 문구가 공동체의 실천을 규정하는 데 쓰였다는 데 있다. 세 분의 이름을 사용하는 세례와 주님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라는 짧은 표현이 한 문헌 안에서 함께 나온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표현의 길이가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서로 다른 두 세례나 상충하는 두 신앙을 가정할 필요는 없다. 마태복음과 『디다케』 사이의 직접적인 문헌 의존 관계는 이 유사성만으로 결정할 수 없다.

테르툴리아누스는 『프락세아스 반박』 26장에서 이 명령을 세 분의 구별을 설명하는 근거로 사용한다. 그는 복음서에 나타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따라가며, 예수가 아버지께 기도하고 아버지에게서 권한을 받는다는 사실을 모은다. 그 논증의 끝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게 세례를 베풀라는 명령을 놓는다. 세 분을 하나의 인격으로 합치는 독해가 이런 관계들을 충분히 설명하는지 묻는 것이다. 이어 당시의 세 번 잠기는 세례 관행도 언급한다.5

테르툴리아누스가 이 대목에서 강조하는 것은 이름의 단수형보다 호명되는 세 분의 구별이다. 그는 마태복음의 문장, 복음서의 관계 서술, 교회의 세례 실천을 함께 읽는다. 다만 세 번 잠기는 관행은 그가 알고 있던 교회의 실천이다. 마태복음 28:19 자체가 세례 때 물에 잠기는 횟수를 명령하지는 않는다.

카이사레아의 유세비우스가 니케아 공의회에 관하여 자기 교회에 보낸 편지에도 이 구절이 나온다. 편지에 실은 신앙고백은 아버지는 참으로 아버지이고, 아들은 참으로 아들이며, 성령은 참으로 성령이라고 밝힌 뒤 마태복음의 세례 명령을 인용한다. 세 분이 실제로 계시며 구별된다는 고백을 예수의 명령과 연결한 것이다.6

이 대목에서도 본문을 사용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세 분의 실재와 구별을 밝히는 데 있다. 유세비우스가 이 구절을 인용했다는 사실과, 세 분의 본질적 관계를 어떤 개념으로 설명했는가는 나누어 살펴야 한다. 동일한 세례 본문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 관계의 설명에서도 모든 점에 동의했다고 볼 수는 없다.

『디다케』에서는 세례의 시행이, 테르툴리아누스와 유세비우스에게서는 세례에서 고백하는 세 분의 구별이 두드러진다. 이 자료들은 마태복음 28:19가 교회의 실천과 신앙 설명에 어떻게 쓰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모두 같은 구절과 연결되지만, 각 문헌이 그 구절에 기대어 수행하는 논증은 서로 다르다.

본문과 교부 해석을 함께 읽은 판단

마태복음 28:19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구별하면서, 제자가 되는 사람을 세 분 모두와 관계 맺게 한다. 마태복음 전체에서는 아버지에게서 권한을 받은 아들이 제자들을 보내고 함께하겠다고 약속하며, 성령이 예수의 사역 및 제자들의 증언과 연결된다. 이 관계들을 보존하는 삼위일체적 독해는 본문에 근거가 있다.

교부들이 세 분의 구별을 강조한 해석은 이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호칭으로 읽으면 복음서가 서술하는 관계가 흐려진다. 세례 명령을 복음서의 다른 관계 서술과 함께 읽는 테르툴리아누스의 방식은 그 구별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그의 세례 관행 설명까지 모두 마태의 명령에 포함시키면 본문과 후대 실천 사이의 차이를 놓친다.

동일 본질이라는 판단에는 한 단계 더 논증이 필요하다. 세 분에게 함께 속한다는 사실은 강한 신학적 의미를 갖지만, 문법적 병렬만으로 세 분의 존재 방식과 동등성을 모두 확정할 수는 없다. 그 판단을 위해서는 아들의 권한과 현존이 하나님의 권한 및 현존과 어떤 관계인지, 성령이 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세례의 고백에 포함되는지를 더 설명해야 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삼위일체 교리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소속을 세 분과 함께 연결한다는 점, 세 분의 구별을 유지한다는 점이 분명하다. 한 본질과 세 위격이라는 교리적 설명은 이 사실들을 해명하려는 해석이며, 그 타당성은 마태복음과 다른 성경 본문을 얼마나 충실하게 함께 설명하는지에 달려 있다.

마태복음이 이 자리에서 독자에게 요구하는 응답은 구체적이다. 부활한 예수의 제자가 되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받고, 예수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현존을 의지하여 산다. 삼위일체에 관한 신학적 판단은 바로 이 관계를 설명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성경 번역은 Michael W. Holmes, ed., The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2010)을 기준으로 했다. SBLGNT, CC BY 4.0.

각주와 자료

  1. John Nolland, The Gospel of Matthew: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and Rapids: Eerdmans, 2005), 1264-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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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Nolland, Gospel of Matthew, 1268-1269. 이름의 단수형에 관한 논의도 같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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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Nolland, Gospel of Matthew, 1269-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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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디다케』 7.1-3; 9.5. Kirsopp Lake 편집 본문. 한국어 교부 문헌: 7.1,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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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Tertullian, Against Praxeas 26. 라틴어 본문과 영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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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카이사레아의 유세비우스, 『니케아 공의회에 관하여 자기 교회에 보낸 편지』, 자신이 제시한 신앙고백 부분. 한국어 교부 문헌. 링크의 4는 자료실의 읽기 구획 번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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