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장은 예수의 떠남과 그 뒤 제자들에게 주어질 돌봄을 연결한다. 예수는 아버지께 다른 보혜사를 구하겠다고 말씀하고, 아버지는 그 보혜사를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신다. 보혜사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예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 이 관계들은 성령을 예수와 아버지에 관계하는 행위주체로 읽는 근거다. 그 근거의 강도는 대명사의 성보다 요청, 보내심과 가르침의 연결에서 확인된다.1

이 글에서 인격적 구별은 우선 본문에서 다른 이들과 관계하고 일을 행하는 주체의 구별을 뜻한다. 후대의 위격 정의에는 그 구별이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영구적으로 성립하며 같은 신적 본성을 공유한다는 판단이 더해진다. 두 판단은 서로 연결되지만 같은 문법적 관찰은 아니다.

16-17절: 다른 보혜사와 제자들

“나는 아버지께 청하겠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여러분에게 주셔서 영원히 여러분과 함께 있게 하실 것입니다. 곧 진리의 영입니다. 세상은 그 영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영을 압니다. 그 영이 여러분 곁에 머무시며 여러분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6-17절, 필자 번역)

15절의 사랑과 계명 준수 뒤에 이 약속이 나온다. 에로테소(ἐρωτήσω)는 예수가 아버지께 청할 일을 나타내는 미래형 1인칭 단수다. 도세이(δώσει)는 미래형 3인칭 단수이며, 줄 주체는 앞에서 청원의 대상이 된 아버지로 이해된다. 다른 보혜사는 그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줄 대상이다. 요청하는 예수와 주는 아버지, 주어지는 보혜사의 역할이 한 문장에 구별된다.

다른 보혜사라는 알론 파라클레톤(ἄλλον παράκλητον)은 떠나는 예수가 해온 돌봄을 이어받을 이를 가리킨다. 카슨은 다른이라는 단어만으로 같은 종류라는 의미를 지나치게 확정하는 해석을 비판하면서, 문맥에서는 예수가 먼저 보혜사의 일을 해왔다는 뜻을 읽는다.2 요한일서 2:1은 예수를 아버지 앞의 파라클레토스로 부른다. 같은 직무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본질을 정의하는 것은 다른 진술이다.

17절은 그 보혜사를 진리의 영이라고 설명한다. 그 영은 세상이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아는 대상이다. 세상이 보지 못한다는 부정은 그 영의 부재나 비인격성을 뜻하는 문장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세상과 제자들이 예수가 약속한 현존에 어떻게 관계하는지가 대조된다.

머무신다는 메네이(μένει)는 SBLGNT에서 현재형이고, 계실 것이라는 에스타이(ἔσται)는 미래형이다. 카슨은 예수께 성령이 주어져 있으므로 현재 제자들과 함께하며, 예수의 영광 이후에는 제자들 안에 거하게 되는 관계로 읽는다.3 브라운은 현재형들을 앞으로의 경험을 미리 서술하는 표현으로 읽을 가능성을 우선하며, 마지막 동사는 현재형 전승을 택한다.4 위 번역은 SBLGNT의 미래형을 따른다. 이 시제의 차이는 함께 계심과 내주의 때를 설명하며 성령이 언제 존재하기 시작했는지를 정의하지 않는다.

18-24절: 예수의 돌아옴과 아버지의 현존

“나는 여러분을 고아로 남겨 두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옵니다.” (18절)

오겠다는 약속의 주어는 예수다. 에르코마이(ἔρχομαι)는 형태상 현재형 1인칭 단수지만, 고아로 남겨 두지 않겠다는 미래 약속과 함께 가까운 오심을 예고한다. 19절은 세상이 곧 예수를 보지 못하고 제자들은 보게 되며, 예수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들도 살게 된다고 설명한다.

카슨은 이 연결을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을 다시 만나는 일로 읽는다. 죽음으로 떠나고 살아서 돌아오는 사건이 성령의 약속과 새로운 생명의 조건이 된다는 설명이다.5 브라운은 그 부활의 만남을 배경으로 인정하면서, 최종 문맥의 오심에는 보혜사를 통한 예수의 지속적인 현존이 함께 있다고 읽는다.6 두 해석은 부활과 성령의 현존 중 무엇이 18절의 직접 지시인지에 무게를 달리 둔다.

브라운은 보혜사가 예수의 현존을 이루는 또 다른 예수라고 설명하면서도, 성령과 예수의 구별이 잘못된 생각이어서 복음서가 이를 바로잡는다는 이론은 따르지 않는다. 예수는 아버지와 함께 있고 보혜사는 제자들 안에 있으며, 두 분은 다른 역할을 가진다는 설명이다.7 같은 현존의 연속이 두 주체의 수적 동일성을 곧바로 뜻하지는 않는다.

던의 논의에도 지상의 보혜사와 천상의 보혜사가 비교된다. 그의 본문은 주로 바울의 그리스도와 성령이 매개하는 같은 신적 현존을 다루며, 요한 문헌의 역할 차이는 비교 사례로 제시된다.8 이 비교는 현존의 겹침과 역할의 차이를 함께 생각하게 하지만 요한복음 14장의 모든 절에 대한 독립 주해는 아니다.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거처를 마련할 것입니다.” (23절 하반)

가겠다는 엘레우소메타(ἐλευσόμεθα)와 거처를 마련하겠다는 포이에소메타(ποιησόμεθα)는 미래형 1인칭 복수다. 앞에서 말씀하는 예수와 그의 아버지가 이 우리에 포함된다. 성령은 이 복수형의 직접적인 선행사로 명시되지 않는다.

카슨은 아버지와 아들의 현존이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읽기를 가능하게 보면서, 23절 자체에 그 매개가 명시되지는 않는다고 설명한다.9 브라운은 진리의 영, 예수, 아버지와 예수의 내주를 모두 보혜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같은 현존으로 종합한다.10 이 연결은 성령이 아버지 및 아들의 현존을 이루는 관계를 설명한다. 그 현존을 매개하는 주체와 현존하시는 분들을 어떤 존재 방식으로 구별할지는 추가적인 판단이다.

24절의 예수는 제자들이 듣는 말이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것이라고 말한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말에는 아버지의 계시가 들어 있다. 다음의 가르침 약속도 이 말의 출처와 연결된다.

25-26절: 보내심과 가르침의 서로 다른 주체

“나는 여러분 곁에 머물면서 이런 것들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실 것입니다.” (25-26절)

25절의 렐랄레카(λελάληκα)는 완료형 1인칭 단수다. 곁에 머물면서라는 메논(μένων)의 주체도 말씀하는 예수다. 26절은 아버지께서 보낼 보혜사의 미래 활동을 잇는다. 펨프세이(πέμψει)의 명시적 주어는 아버지이고, 디닥세이(διδάξει)와 휘포므네세이(ὑπομνήσει)의 주어는 앞에 놓인 보혜사다. 말해온 예수, 보내실 아버지, 가르칠 보혜사의 관계가 구별된다.

보혜사와 성령은 이 문장에서 다른 두 대상으로 나뉘지 않는다. 토 프뉴마 토 하기온(τὸ πνεῦμα τὸ ἅγιον)은 호 파라클레토스(ὁ παράκλητος)를 다시 설명하는 동격이다. 아버지가 보낼 대상인 관계대명사 호(ὃ)는 중성이고, 뒤에서 주어를 재개하는 에케이노스(ἐκεῖνος)는 남성이다. 중성 명사 프뉴마와 남성 명사 파라클레토스가 같은 대상을 가리키므로, 서로 다른 성의 대명사가 나오는 것을 단독으로 비정상적인 성 일치의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

브라운은 4세기의 인격과 본성 논의를 대명사에 소급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남성 대명사가 성령을 경향이나 영향 이상으로 나타낸다는 Bernard의 판단을 수용한다.11 카슨도 개인적인 예수의 대행이라는 문맥과 남성 대명사 사용을 함께 인격 판단의 근거로 든다.12 두 학자가 남성형의 논거 자체를 부정했다고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26절에서 에케이노스는 이미 남성형인 파라클레토스를 재개할 수 있으므로, 인격적 역할을 판단하는 근거는 그 성 일치를 제외한 관계와 활동에서도 확보되어야 한다.

내 이름으로라는 엔 토 오노마티 무(ἐν τῷ ὀνόματί μου)는 보내심을 예수에게 연결한다. 카슨은 성령이 예수의 이름으로 오는 사절이라는 의미를 강조한다.13 브라운은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 및 예수의 사명을 보혜사가 완성하는 관계에 무게를 둔다.14 사절과 대행이라는 설명은 서로 다른 강조지만 모두 성령의 계시가 예수의 계시를 잇는다고 읽는다. 그 이름은 독립적인 새 계시의 출처를 따로 세우는 표현으로 쓰이지 않는다.

가르침과 기억나게 함에는 각각 모든 것이라는 판타(πάντα)가 붙는다. 내가 말한 것들이라는 관계절 하 에이폰 휘민(ἃ εἶπον ὑμῖν)은 바로 앞의 기억나게 할 모든 것을 지정한다. 두 번째 동사의 내용은 예수의 말이며, 첫 번째 동사의 모든 것은 문장 형태만으로 같은 관계절에 직접 한정되지 않는다. 브라운은 두 동사를 같은 이해의 과정에 속한 평행 표현으로 읽는다.15 카슨은 최초의 제자들이 부활 이후 예수의 계시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는 약속으로 읽는다.16

사이먼은 성령이 기억할 사실을 되살리는 일과 그 의미를 이해시키는 일을 함께 한다고 강조한다. 제자들의 뒤늦은 이해는 예수 사건 이후라는 시간적 상황과 함께 성령의 실제 가르침에 관계한다는 설명이다.17 Franck와 Cullmann의 견해는 사이먼의 소개를 따른다. 여기서 성령은 제자들이 소유한 기억 능력으로만 이름 붙여지지 않고, 예수의 말씀을 그들에게 알리는 주체로 서술된다.

27-31절에서도 말씀하는 이는 예수다. 그는 자신의 평화를 주고, 아버지께 가며, 아버지를 사랑하여 그 명령을 행한다고 말한다. 이 문맥의 이동은 예수의 지상 대화가 끝나가며 앞으로 다른 방식의 돌봄과 가르침이 주어질 상황을 설명한다.

가장 강한 두 읽기의 비교

구별되는 인격적 행위주체로 읽는 해석의 강점은 한 가지 동사에 있지 않다. 예수는 아버지께 청하며, 아버지는 다른 보혜사를 주고 보내며, 그 보혜사는 예수가 말한 것을 가르친다. 주체와 대상이 여러 절에 걸쳐 일관되게 연결된다. 보혜사는 앞의 개인적인 스승 예수의 일을 이어받는 존재이고, 제자들의 기억과 이해는 그 존재가 행하는 일의 결과로 설명된다. 본문이 그리는 돌봄의 관계를 실제로 읽을 때, 성령을 예수나 제자들의 기능 이름으로만 풀이하는 설명보다 이 주체 해석이 더 자연스럽다.

현존 및 문학적 인격화의 읽기에도 근거가 있다. 예수는 보혜사가 올 것이라고 말한 직후 자신이 온다고 약속하고, 제자들 안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와 아들도 제자에게 함께 거한다. 브라운이 제시한 배경에는 하나님에게서 와서 사람들 안에 거하고 가르치는 인격화된 지혜가 있다.18 따라서 가르치고 함께 있다는 동사들만으로 실제 구별된 위격을 바로 정의할 수는 없다. 이 읽기에서는 보혜사의 역할이 보이지 않는 예수의 현존과 제자들의 계시 이해를 인격적으로 서술하는 방식으로 설명된다.

두 읽기는 현존의 연속을 설명하는 데서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다. 구별되는 성령이 예수의 현존을 이루실 수 있으며, 성령을 통한 예수의 현존이라는 말이 성령의 주체성을 지울 필요도 없다. 브라운 자신도 보혜사를 기독교인 안의 개인적인 예수의 현존으로 읽으면서 예수와 보혜사의 다른 역할을 유지한다.19 다투는 핵심은 현존이 같다는 사실보다, 그 현존을 이루는 서술된 주체의 구별을 하나님의 실제 존재 안의 구별로 어떻게 옮기는가에 있다.

문학적 인격화가 모든 관계를 설명하려면 예수의 요청, 아버지의 보내심, 다른 보혜사의 지속적인 가르침을 하나님의 현존을 서술하는 비유적 구도로 함께 읽어야 한다. 인격적 주체 해석은 그 구도를 실제 관계로 읽는다. 본문은 후자의 읽기에 충분한 관계 근거를 주며, 단순한 인간 기억이나 감정으로 성령의 일을 한정하는 해석에는 맞지 않는다. 그 관계가 후대의 위격이라는 말로 어느 정도 정의될 수 있는가는 본문의 주체 구별과 별도로 검토되는 단계다.

위격 정의로 이어지는 전제

바실리우스는 성령이 독생자와 같이 보혜사로 불린다는 사실을, 본래의 거룩함과 선함 및 생명을 주는 활동과 함께 읽는다. 그 공통 호칭을 자연적인 신적 관계에 연결하는 논증이다.20 같은 직무의 이름이 있다는 관찰에 성령의 거룩함이 피조물에게 주어진 것과 달리 본성에 속한다는 판단이 더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74.1에서 성령의 동일 본질과 동영원성이라는 교회의 신앙을 먼저 밝힌 뒤 다른 보혜사의 약속을 해설한다.21 77.1-2에서는 보이는 예수의 지상 현존과 내적인 신적 현존을 구별하고, 아들과 성령의 말씀 및 가르침을 삼위의 나뉘지 않는 활동으로 읽는다.22 이 해석은 각 주체를 따로 소개한 문장을 하나님의 실제 인격 구별에 연결하며, 그 본성은 나뉘지 않는다는 전제를 사용한다. 위격의 구별과 본성의 일치는 대명사의 성에서 도출된 동일한 결론이 아니다.

이번 본문이 보태는 가장 분명한 근거는 구별되는 관계 속에서 예수의 사명을 이어가는 보혜사의 주체성이다. 요청하는 예수와 보내시는 아버지, 가르치는 보혜사의 차이는 고린도전서 2장의 사람 자신의 영 비유보다 인격 구별을 더 구체적으로 논증한다. 그 주체가 예수의 현존을 이루는 관계도 본문의 같은 돌봄 안에서 설명된다.

이 근거로 성령을 실제 인격적 행위주체로 읽는 해석이 유력해진다. 다만 서술된 주체의 구별에서 영원한 위격의 구별까지에는 그 관계가 하나님의 실제 존재에 속한다는 판단이, 같은 본질까지에는 그 주체의 본성적 신성과 불가분성에 관한 판단이 더해진다. 여러 관계 진술은 대명사의 성이나 앎의 비유 하나보다 인격적 구별에 더 구체적인 근거를 준다. 성령의 본성과 기원에 관한 전제는 이 보내심과 가르침의 약속만으로 모두 정해지지 않는다.

각주와 자료

  1. Michael W. Holmes 편, The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2010), 고정 커밋 c4d241a9c1c479a55b989ba35a4976c1d0b8052c. 요 14:15-31을 기준으로 옮긴 필자 번역. 17절은 ἔσται, 26절 말미에는 독립 대명사 ἐγώ가 없는 본문을 따른다. 비교 본문은 요일 2:1이다. 핵심 주장 대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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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Grand Rapids: Eerdmans, 1991), 499-500. 실제 설치 Logos에서 다시 추출하여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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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09-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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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Raymond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AB 29A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8; original Doubleday edition 1970), 639-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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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0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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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43, 645-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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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1141. 그가 소개한 E. F. Scott 및 Ian Simpson의 원저를 직접 읽은 인용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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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James D. G. Dunn, Did the First Christians Worship Jesus? The New Testament Evidence (London: SPCK;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0), 128-129 및 129쪽 주 83. 직접 재독한 주된 논의와 요한 문헌의 비교 사례를 구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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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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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42-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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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50, 참조 639. 그의 남성 대명사에 관한 실제 채택 판단과 그 판정에 대한 필자의 문법적 평가를 구별했다. Bernard 원저는 직접 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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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10. 카슨은 예수의 개인적인 대행과 남성 대명사를 함께 근거로 든다. 그가 남성 대명사 논거를 부정한 것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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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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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53. 카슨이 이를 대행에 관한 해석과 구별하는 논의를 505쪽에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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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65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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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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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William Bradley Simon, The Role of the Spirit-Paraclete in the Disciples’ Mission in the Fourth Gospel (PhD diss.,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2002; UMI Microform 3074030, ProQuest reproduction copyright 2003), 156-157, 160-161. 기존 Zotero 원본의 표제 및 판권과 인쇄 쪽수를 읽었다. 그의 카슨 비판을 카슨이 성령의 가르침을 부정했다는 뜻으로 확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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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1139. 지혜의 인격화는 그의 배경 비교 자료다. 본문을 인격화만으로 읽는 대안의 검토는 필자의 논증이며, 브라운이 성령의 인격성을 부정한다는 견해로 제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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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1139-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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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바실리우스, 『성령론』 XIX.48-49, Blomfield Jackson 번역, NPNF Second Series 8 (1895), New Advent 제공 영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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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아우구스티누스, 『요한복음 강해』 74.1, John Gibb 번역, NPNF First Series 7 (1888), New Advent 제공 영어 번역. 동일 본질과 동영원성을 먼저 밝히는 도입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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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아우구스티누스, 『요한복음 강해』 77.1-2, 같은 공개 영어 번역. 라틴어 비평판의 용어를 독립 대조한 작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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