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브리서 3:1-6: 하나님의 집을 맡으신 신실한 아들

앞의 2:17-18은 예수가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서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셨으며, 시험받는 이들을 도우실 수 있다고 설명했다. 3장은 그 신실하심을 다시 생각하라고 독자들에게 권고하며 모세와 예수의 관계를 비교한다.

## 히 3:1-2

>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자매들,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동반자들아,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여라. 그분은 자신을 세우신 분께 신실하셨다. 모세도 그분의 집에서 그러했다.[^1]

독자들은 같은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깊이 생각할 대상은 예수다. 애트리지는 사도라는 드문 호칭을 하나님의 이름을 전하는 사자의 역할에, 대제사장을 앞에서 설명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사역에 연결한다.[^2] 엘링워스도 사도를 하나님의 권한을 지닌 보냄받은 분이라는 뜻으로 읽는다.[^3] 두 호칭은 독자들이 고백하는 예수의 사역을 규정한다.

πιστός는 예수와 모세 모두에게 사용된다. 먼저 두 사람의 신실함이 비교되고, 뒤에서 그들의 지위가 대조된다. τῷ ποιήσαντι αὐτόν은 그분을 만들거나 세웠다는 동사를 포함한다. 엘링워스는 이 문맥에서 각 사람을 직무에 세우는 뜻으로 읽는다.[^4] 애트리지도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세우신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으로 풀이한다.[^5] 이 동사는 그들의 직무와 신실함이라는 비교 안에 놓인다.

2절의 그분의 집은 엘링워스의 해석에서 하나님의 집이다. 그는 민수기 12:7의 하나님이 말하는 내 집과, 여기의 예수를 세우신 분을 그 지시의 근거로 제시한다.[^6] 기준 본문은 2절에서 집 전체라는 수식을 적지 않고, 그 수식은 5절에서 모세의 집 안의 섬김에 붙는다.

## 히 3:3-4

> 이분은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되셨다. 집을 지은 사람이 그 집보다 더 큰 존귀를 받는 것과 같다. 집마다 누군가가 지었으며,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더 큰 영광이라는 비교는 예수의 신실함을 모세의 실패에 맞세우지 않는다. 엘링워스는 모세도 자신의 직무에 신실했고 예수는 더 높은 직무에 신실하셨다고 읽는다.[^7] 비교의 차이는 신실함의 유무보다 집을 세우고 맡는 관계다.

집을 지은 분이라는 비유의 대응은 두 주석에서 다르다. 엘링워스는 3절의 지은 분을 그리스도로 읽을 가능성을 선호하지만, 하나님 아래에서 그 백성을 세우시는 관계라고 설명한다.[^8] 애트리지는 집을 지은 분과 예수를 같은 항으로 일대일 대응시키기보다, 집을 지은 분과 집의 존귀 차이가 예수와 모세의 차이를 설명하는 비례적 비유라고 읽는다.[^9]

4절은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을 말한다. 엘링워스는 하나님을 주어로 읽는 편이 문장 구조에 맞으며, 이 구절을 즉시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선언으로 읽는 견해와 구별한다.[^10] 애트리지도 그 비교가 예수를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 지시 대상으로 만들 필요 없이 아들의 영광을 설명한다고 읽는다.[^9] 그들의 해석에서 하나님은 집과 만물의 궁극적인 근원이고 아들의 높은 지위는 다음 절의 집을 맡은 관계에서 설명된다.

## 히 3:5-6

> 모세는 나중에 말해질 것들을 증언하는 시종으로서 그분의 집 전체에서 신실했다.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그분의 집을 맡으신다. 우리가 담대함과 소망의 자랑을 굳게 붙잡는다면 우리는 그 집이다.

모세의 지위는 θεράπων, 아들의 지위는 υἱός다. 모세는 집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집을 맡으신다. 엘링워스는 같은 하나님의 집 안에서 두 직무가 비교된다고 읽는다.[^11] 애트리지는 아들의 지위가 그 집을 맡는 관계를 설명하며, 그 집은 이 마지막 구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확인된다고 풀이한다.[^12]

모세의 증언은 앞으로 말해질 것에 관계된다. 엘링워스는 민수기의 바로 뒤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실 말씀과, 그 말씀들이 나중에 성취되는 더 넓은 범위를 검토한다.[^13] 애트리지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마지막 결정적인 말씀을 증언하는 관계에 무게를 둔다.[^12] 두 읽기는 모세의 섬김이 이후의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된다는 공통점을 지니며, 직접적인 시간 범위를 다르게 강조한다.

우리는 그 집이라는 진술에는 담대함과 소망의 자랑을 붙잡는 조건이 붙는다. 엘링워스는 현재 하나님 백성으로 받은 지위와 장차 바라는 성취를 그 붙잡음이 연결한다고 읽는다.[^14] 애트리지도 이 조건을 뒤의 신실하게 머물라는 권고의 도입으로 설명한다.[^12] 아들이 맡으시는 집의 신자들은 자신들이 고백하는 분에 대한 신뢰를 지켜야 한다.

## 크리소스토무스의 세우심과 아들의 집

크리소스토무스는 자신을 만드신 분께 신실하다는 말에 무엇으로 만드셨는지를 묻고, 사도와 대제사장으로 세우셨다는 답을 제시한다. 그는 그 말을 예수의 본질을 창조했다는 진술보다 맡은 직무의 진술로 읽는다.[^15]

집의 비유에서는 모세가 하나님 백성의 한 구성원인 반면, 그리스도는 지으신 분과 아들의 지위를 지닌다고 설명한다. 그는 아들이 아버지의 소유에 주인으로 들어가고 모세는 종으로 들어간다는 비교로 풀어낸다.[^15] 같은 집을 공유하는 두 사람의 신실함이 직무의 동일한 등급을 뜻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그 영어 인용에는 1절의 그리스도 예수, 2절의 집 전체, 6절의 끝까지 견고하게라는 긴 형태들이 있다.[^15] 기준 본문은 1절에 예수를, 2절에는 전체가 없는 집을, 6절에는 담대함과 소망의 자랑을 붙잡는 짧은 형태를 적는다. 엘링워스는 6절의 긴 표현이 3:14의 말에 동화되었을 가능성을 설명한다.[^14] 교부는 그 끝까지라는 인용을 시련 속의 지속적인 소망에 연결한다.[^16]

본문은 모세와 예수를 먼저 신실함에서 비교한 뒤, 집 안의 시종과 집을 맡은 아들로 대조했다. 현대 두 주석은 지은 분의 비유가 예수를 직접 지시하는지에서 갈리고, 크리소스토무스는 그 비유를 아버지의 소유를 맡는 아들의 고유한 지위에 연결했다. 독자들이 고백하는 아들은 그 집의 신자들을 위한 사도와 대제사장이다. 그 신자들이 지켜야 할 담대함과 소망이 마지막에 그 고백과 이어진다.

[핵심주장과 원자료 대조](/documents/8669cde7681d/) · [자료와 판본 확인](/documents/73c4475bdb8d/)

[^1]: Michael W. Holmes 편, *The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2010), [고정 Heb 전문](https://raw.githubusercontent.com/Faithlife/SBLGNT/c4d241a9c1c479a55b989ba35a4976c1d0b8052c/data/sblgnt/text/Heb.txt), CC BY 4.0. 필자 번역, 독립 주해 3:1-6, 필요한 앞 문맥 2:17-18. 3:1의 예수, 3:2의 전체 없는 집과 3:6의 짧은 조건절을 보존.
[^2]: Harold W. Attridge, *The Epistle to the Hebrews: A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Hebrews*, Helmut Koester 편,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1989), 107-108쪽.
[^3]: Paul Ellingworth, *The Epistle to the Hebrew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and Rapids and Cambridge: Eerdmans; Carlisle: Paternoster, 1993), 200쪽.
[^4]: Paul Ellingworth, *The Epistle to the Hebrew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and Rapids and Cambridge: Eerdmans; Carlisle: Paternoster, 1993), 202쪽.
[^5]: Harold W. Attridge, *The Epistle to the Hebrews: A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Hebrews*, Helmut Koester 편,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1989), 108쪽.
[^6]: Paul Ellingworth, *The Epistle to the Hebrew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and Rapids and Cambridge: Eerdmans; Carlisle: Paternoster, 1993), 201-202쪽.
[^7]: Paul Ellingworth, *The Epistle to the Hebrew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and Rapids and Cambridge: Eerdmans; Carlisle: Paternoster, 1993), 203-204쪽.
[^8]: Paul Ellingworth, *The Epistle to the Hebrew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and Rapids and Cambridge: Eerdmans; Carlisle: Paternoster, 1993), 203-206쪽.
[^9]: Harold W. Attridge, *The Epistle to the Hebrews: A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Hebrews*, Helmut Koester 편,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1989), 109-110쪽.
[^10]: Paul Ellingworth, *The Epistle to the Hebrew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and Rapids and Cambridge: Eerdmans; Carlisle: Paternoster, 1993), 205-206쪽.
[^11]: Paul Ellingworth, *The Epistle to the Hebrew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and Rapids and Cambridge: Eerdmans; Carlisle: Paternoster, 1993), 206-207쪽.
[^12]: Harold W. Attridge, *The Epistle to the Hebrews: A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Hebrews*, Helmut Koester 편,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1989), 111-112쪽.
[^13]: Paul Ellingworth, *The Epistle to the Hebrew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and Rapids and Cambridge: Eerdmans; Carlisle: Paternoster, 1993), 207-208쪽.
[^14]: Paul Ellingworth, *The Epistle to the Hebrew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and Rapids and Cambridge: Eerdmans; Carlisle: Paternoster, 1993), 210-212쪽.
[^15]: [크리소스토무스, 『히브리서 강해』 5](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205.htm), Frederic Gardiner 번역, NPNF 1/14 (1889), Philip Schaff 편, New Advent 제공 영어, 4문단, 3:1-6 해설.
[^16]: [크리소스토무스, 『히브리서 강해』 5](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205.htm), Frederic Gardiner 번역, NPNF 1/14 (1889), Philip Schaff 편, New Advent 제공 영어, 4-5문단의 소망과 끝까지 해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