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가복음 13:32: 그날을 모르는 아들과 알고 계신 아버지

마가복음 13:32는 아들이 그날과 그때를 모른다는 말로 아들과 아버지의 앎을 구별한다. 이 진술은 앞의 무화과나무 비유와 세대에 관한 말, 뒤의 깨어 있으라는 명령 사이에 놓여 있다. 정확한 때의 앎과 제자들의 태도를 연결하는 대목이다.

## 앞 문맥: 막 13:28-31 {#필요한-앞-문맥-막-1328-31}

> 무화과나무에서 비유를 배워라.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나오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안다. 이처럼 너희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문 앞에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까지 이 세대는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 하늘과 땅은 지나가도 내 말은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1]

무화과나무의 변화와 가까워진 여름은 어떤 일을 보고 다음 일을 예상하는 관계다. 이런 일이라는 표현과 이 세대의 시간 범위 뒤에, 예수는 자기 말의 지속성을 선언한다. 이어 나오는 날과 때의 무지는 이 확신과 같은 단락 안에서 읽힌다.

아델라 야브로 콜린스는 28-31절과 32절이 같은 인자의 오심을 다루되, 임박한 기대와 정확한 날짜의 계산을 구별한다고 읽는다.[^2] R. T. 프랜스는 32절의 περὶ δέ를 주제 전환으로 읽고, 앞의 성전 심판과 그 뒤의 알 수 없는 재림을 구별한다.[^3] 두 해석은 30절의 이 세대와 32절의 그날을 어떻게 연결하는지에서 갈린다. 마가는 이 대목에서 재림이라는 전문 용어를 따로 쓰지 않고 그날과 그때라고 말한다.

## 막 13:32

> 그러나 그날이나 그때에 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른다.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οὐδεὶς οἶδεν 뒤에 οὐδέ가 천사들과 아들을 차례로 덧붙인다. εἰ μὴ ὁ πατήρ는 아버지를 예외로 적는다. 문장에는 아들의 알지 못함을 인성으로서 또는 공개하는 일에 한정하는 별도 표현이 없다. 대상은 모든 지식이 아니라 그날과 그때다.

프랜스는 이 배열이 사람들, 천사들, 아들, 아버지로 상승하며 아들을 천사들 위의 독특한 지위에 놓는다고 읽는다.[^4] 동시에 그는 아들이 그때를 모른다는 진술을 그대로 인정한다. 마가가 후대의 전지성과 성육신 논쟁에 직접 답하는 방식으로 이 문장을 썼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한다.[^5] 아들의 독특한 지위와 그날에 관한 지식의 차이가 같은 문장에 적혀 있다.

콜린스는 이 말을 날짜를 계산하려는 시도를 막는 진술로 읽는다. 정확한 때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서 30절의 임박한 기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33절은 그 무지를 제자들의 행동과 연결한다.[^6] 본문의 부정은 아들까지 포함한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때를 밝히지 않는 장면을 넘어, 아들도 모른다고 직접 서술한다.

## 평행 본문: 마 24:36 {#필요한-평행-본문-마-2436}

>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른다.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고정 SBLGNT의 마태복음 본문에도 οὐδὲ ὁ υἱός가 있으며, 마지막에는 πατὴρ μόνος가 적혀 있다.[^7] 아들 문구가 없는 마태복음 번역은 이 고정 본문과 다른 본문 형태를 따른다. 두 복음서의 고정 본문은 아들까지 포함하는 부정과 아버지의 예외를 공유한다.

마태복음 평행은 마가의 아들 언급을 지우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프랜스는 마태복음의 앞선 질문에 성전 파괴와 재림이 모두 포함되는 점을 자신의 주제 전환 해석에 사용한다.[^3] 마가의 앞 문맥을 두 사건으로 나누는 것은 그가 평행과 종말 표현을 연결해 내리는 문학적 판단이다.

## 이어지는 문맥: 막 13:33-37 {#필요한-다음-문맥-막-1333-37}

> 주의하고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집을 떠나 종들에게 권한을 주고, 각자에게 일을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령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저녁에 올지, 한밤에 올지, 닭이 울 때 올지, 이른 아침에 올지 너희는 모른다. 그가 갑자기 와서 너희가 자는 모습을 발견하지 않게 하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모두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32절의 아무도 모른다는 선언 뒤에서 33절과 35절은 너희가 모른다고 반복한다. 집주인이 종들에게 일을 맡겼다는 비유는 그 무지를 맡겨진 일에 대한 태도로 잇는다. 돌아오는 때를 알지 못하는 종들은 각자의 일을 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

프랜스는 저녁, 한밤, 닭이 울 때, 아침의 네 구분을 로마식 밤 시간의 네 경계와 연결한다.[^8] 콜린스는 문지기의 비유가 앞의 거짓 메시아와 예언자에 대한 경계까지 이어받고, 마지막 모두라는 말이 네 제자를 넘어 복음서의 독자들에게 권고를 넓힌다고 읽는다.[^9] 32절의 초점은 제자들이 정확한 시간을 얻는 데 있지 않고, 알 수 없는 때를 기다리는 행동에 있다.

## 아타나시우스: 창조하는 말씀과 인간으로서의 무지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파 반박』 III.42-46에서 아들이 때를 모른다는 반론에 답한다. 그는 말씀을 시간과 만물을 만든 분으로 먼저 규정하고, 창조한 분이 자기 작품의 마지막을 안다고 논한다. 이어 알지 못한다는 말은 육신을 취한 아들의 인성에 속한다고 설명한다.[^10] 그의 해석은 창조하는 말씀의 앎과 인간의 무지를 한 아들에게 귀속한다.

예수가 마지막에 앞서는 일을 알았다는 아타나시우스의 논거는, 사건의 순서를 아는 일에서 정확한 때의 앎까지 결론을 넓힌다. 마가의 28-32절은 일어나는 일로 가까움을 알아보는 관계와 정확한 날을 모르는 관계를 나란히 적는다. 창조하는 말씀의 전지성은 그가 다른 성경의 창조·계시 진술을 연결해 세우는 근거다.

##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 인성과 아버지에게서 오는 앎

그레고리오스는 『신학 강론』 30.15에서 지혜이며 세계를 만든 아들이 하나님으로서는 알고 인간으로서는 모른다고 설명한다. 30.16에서는 아버지를 원인으로 하는 관계를 덧붙여, 아들의 앎도 아버지에게서 온다고 읽는다.[^11] 두 설명은 같은 답을 다른 방식으로 전개한다. 하나는 신성과 인성을, 다른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기원 관계를 사용한다.

이 교부들은 아들의 창조와 신적 앎을 다른 성경의 진술로 확정한 뒤 32절의 무지를 해석한다. 마가복음의 이 문장은 아들을 독특한 지위로 부르면서 그날의 앎은 아버지에게 한정한다. 인성에 관한 교부의 해설은 이 진술을 성육신한 말씀의 더 넓은 관계 안에 배치한 수용이다. 예수는 정확한 때를 모르는 이들에게 일을 맡기고 깨어 있으라고 명령한다.

[해석 대조표](/documents/ec7b68242060/) · [문헌과 판본](/documents/c7ac762a3436/)

[^1]: Michael W. Holmes 편, *The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2010), [고정 Mark 전문](https://raw.githubusercontent.com/Faithlife/SBLGNT/c4d241a9c1c479a55b989ba35a4976c1d0b8052c/data/sblgnt/text/Mark.txt), CC BY 4.0. 필자 번역. 주해의 중심은 13:32이며, 13:28-31·33-37은 앞뒤 문맥이다.
[^2]: Adela Yarbro Collins, *Mark: A Commentary*, Hermeneia, Harold W. Attridge 편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7), 616-617쪽.
[^3]: R. T. France, *The Gospel of Mark: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and Rapids and Cambridge: Eerdmans; Carlisle: Paternoster, 2002), 541-543쪽.
[^4]: R. T. France, *The Gospel of Mark: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and Rapids and Cambridge: Eerdmans; Carlisle: Paternoster, 2002), 543쪽.
[^5]: R. T. France, *The Gospel of Mark: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and Rapids and Cambridge: Eerdmans; Carlisle: Paternoster, 2002), 544쪽.
[^6]: Adela Yarbro Collins, *Mark: A Commentary*, Hermeneia, Harold W. Attridge 편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7), 617쪽.
[^7]: 같은 판본의 [고정 Matt 전문](https://raw.githubusercontent.com/Faithlife/SBLGNT/c4d241a9c1c479a55b989ba35a4976c1d0b8052c/data/sblgnt/text/Matt.txt), 24:36. 아들 문구를 포함한 고정 본문의 번역이다.
[^8]: R. T. France, *The Gospel of Mark: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and Rapids and Cambridge: Eerdmans; Carlisle: Paternoster, 2002), 545-546쪽.
[^9]: Adela Yarbro Collins, *Mark: A Commentary*, Hermeneia, Harold W. Attridge 편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7), 618-619쪽.
[^10]: 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파 반박』 III.42-46](https://www.newadvent.org/fathers/28163.htm), John Henry Newman·Archibald Robertson 번역, NPNF Second Series 4 (1892), Philip Schaff·Henry Wace 편, New Advent 제공 영어. 아타나시우스는 마가의 문구와 마태의 깨어 있으라는 문맥을 연결한다. 그의 인용은 마가 사본의 직접 증거가 아니다.
[^11]: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 [『신학 강론』 30.15-16](https://www.newadvent.org/fathers/310230.htm), Charles Gordon Browne·James Edward Swallow 번역, NPNF Second Series 7 (1894), Philip Schaff·Henry Wace 편, New Advent 제공 영어. 15절의 신성·인성 설명과 16절의 원인·앎 설명. 번역이 보고하는 다른 읽기는 이 번역의 보고를 따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