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8:1-17: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생명을 주시는 성령과 자녀의 기도

로마서 7장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의 무력함을 서술했다. 8장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새로운 상태를 선언한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셨고, 성령이 사람들을 죄와 죽음에서 자유롭게 하신다. 그 생명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을 기다리는 관계로 이어진다.[^1]

## 1-2절: 그리스도 안의 사람들과 성령의 해방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의 생명을 주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자유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1-2절, 필자 번역)[^2]

정죄가 없다는 선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바이른은 이를 이전의 죄에 지배된 삶과 다른 구원의 영역에 들어온 상태로 읽는다.[^3] 성령의 해방은 그리스도와 무관한 별도의 구원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생명이다.

성령의 법과 죄 및 죽음의 법에서 법은 사람을 지배하는 힘과 질서를 뜻할 수 있다. 바이른은 성령이 새 삶의 규범과 가능성을 이루신다는 뜻으로 읽으며, 죄와 죽음의 법을 모세의 율법 자체와 구별한다.[^4] 바울은 모세의 율법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이미 말했다(7:12). 죄가 그것을 이용하여 사람을 붙들었고 성령이 그 지배를 끊으신다.

## 3-4절: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 죄를 정죄하심

> “육신 때문에 약해진 율법이 할 수 없던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과 같은 모습으로, 죄를 다루기 위하여 보내시고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이는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3-4절)

율법이 할 수 없던 일을 하시는 주어는 하나님이다. 그분이 보내신 대상은 자기 아들이다. 바이른은 보내심의 표현이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의 죄 지배 안으로 들어오는 사건을 설명한다고 읽는다.[^5] 그 아들은 사람들의 실제 조건에 참여하신다.

죄 있는 육신과 같은 모습이라는 표현은 예수가 육신인 것처럼 보였다는 뜻보다, 죄가 지배하는 인간의 조건을 실제로 취하셨다는 뜻으로 읽힌다. 바이른은 그분이 인간의 약함과 유혹에 참여하셨으나 친히 죄를 지으신 분으로 서술되지는 않는다고 설명한다.[^6] 본문의 같은 모습은 실제 인성과 죄의 차이를 함께 표현한다.

페리 하마르티아스(περὶ ἁμαρτίας)는 죄를 위하여라는 일반적인 뜻과 속죄 제물을 가리키는 뜻으로 읽힌다. 바이른은 칠십인역의 제사 용례를 근거로 속죄 제물의 함의를 우선한다.[^7] 위 번역은 죄를 다루는 목적을 옮겼다. 그 목적은 바로 뒤의 죄를 정죄하셨다는 동사에서 설명된다. 이 문장의 직접 목적어는 죄다.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는 목적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관계한다. 바이른은 이 수동형이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강조하면서 그 의가 신자들의 실제 삶에서 이루어진다고 읽는다.[^8] 주엣은 그 삶을 공동체 가운데 이루어지는 사랑과 율법의 성취로 설명한다.[^9] 아들의 보내심과 성령의 해방은 같은 구원이 신자들의 삶에 이루어지는 관계다.

## 5-8절: 육신과 성령에 따른 삶의 방향

>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성령의 일을 생각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죽음이고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적대하며,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고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신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5-8절)

육신과 성령은 몸과 영혼이라는 두 구성 요소를 나누는 말로 읽히지 않는다. 바이른은 이를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과 하나님께 열려 있는 삶이라는 두 방향으로 설명한다.[^10]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이유가 아니다. 하나님께 적대하는 생각과 행위가 문제다.

생각이라는 프로네마(φρόνημα)는 사소한 생각 하나보다 삶을 이끄는 판단과 그 결과를 가리킨다. 성령의 활동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생명과 평화를 향하도록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그들의 내면과 관계, 삶의 방향에 미친다.

## 9절: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

>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면, 여러분은 육신 안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9절)

바울은 수신자들의 실제 상태로 돌아와 말한다. 주엣은 여러분이라는 복수형과 내주를 공동체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의 관계로 강조한다.[^11] 바이른도 그 내주가 신자들에게 이전과 다른 삶의 가능성을 준다고 읽는다.[^12] 개인과 공동체가 같은 성령의 활동을 누린다.

하나님의 영이라는 호칭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바뀐다. 바울은 두 종류의 성령을 받은 집단을 나누지 않는다. 같은 내주와 같은 그리스도 소속을 두 호칭으로 설명한다. 바이른은 이를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의 현재 활동이 깊이 연결되는 관계로 읽는다.[^13]

무는 성령을 받는 일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의 공통된 조건이라고 읽는다. 그는 두 분의 긴밀한 관계가 성령과 그리스도를 같은 인격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1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그분의 영을 받는다. 이 구문은 성령을 가진다는 말과 그리스도가 그 사람을 자기 것으로 가지신다는 말을 연결한다. 주엣은 이를 상호적인 소속의 관계로 읽는다.[^15]

## 10절: 그리스도의 내주와 생명인 성령

>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죄 때문에 죽음에 놓여 있으나 성령은 의로 말미암아 생명입니다.” (10절)

성령이 거하신다는 말에 이어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말이 나온다. 주엣은 그리스도와 성령이 신자들의 경험 안에서 하나로 느껴지는 구원의 관계를 강조한다.[^16] 바이른도 그리스도의 현재 활동과 성령의 영향이 같은 신자의 삶을 설명한다고 읽는다.[^17]

몸이 죽었다는 말은 다르게 읽힌다. 바이른은 다음 절의 죽을 몸을 고려하여, 여전히 죽음을 맞을 몸으로 읽는다.[^18] 주엣은 세례에서 죄의 몸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6장의 문맥을 더 강조한다.[^19] 여기서는 다음 절의 부활 약속과 연결하여 몸의 죽을 운명을 우선한다.

프뉴마(πνεῦμα)는 인간의 영 또는 성령으로 읽힐 수 있다. 바이른은 생명이라는 명사가 인간의 영이 살아났다는 뜻보다 성령이 생명을 주시는 관계를 설명한다고 읽는다.[^20] 그 성령은 9절의 하나님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다. 의로 말미암은 생명을 설명할 때, 바이른은 성령이 신자들의 삶에 이루시는 의를 강조한다.[^21] 무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에게 주신 의롭다는 판결을 우선한다.[^22] 앞의 성령을 따르는 삶과 1절의 정죄 면제 가운데 무엇을 더 직접적인 근거로 삼는지가 다르다. 두 해석에서 생명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구원의 결과다.

## 11절: 예수를 살리신 분이 우리의 몸에도 생명을 주심

>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일으키신 분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자기 영 때문에 여러분의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11절)

예수를 일으키신 분은 하나님이다. 성령은 그 하나님에게 속한 영으로 신자들에게 거하신다. 바이른은 신자들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돌아보면서 자기 몸의 부활을 바라보는 관계로 읽는다.[^23] 생명의 약속은 몸을 버리는 미래가 아니라 죽을 몸이 살아나는 미래다.

마지막 구문의 이문은 전치사 디아(διά) 뒤에 속격을 두는지 대격을 두는지에 있다. 속격은 성령을 통하여라는 매개를 강조하고, 대격은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에라는 근거를 강조한다. SBLGNT는 대격을 택한다.[^24] 위 번역은 그 읽기를 옮겼다. 두 형태 모두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고 성령이 그 약속에 관계한다.

## 12-13절: 성령을 힘입어 몸의 악한 행위를 끝냄

>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도록 육신에게 빚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지만, 성령을 힘입어 몸의 행위를 죽이면 살 것입니다.” (12-13절)

해방을 받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책임이 있다. 바이른은 이 결론이 6장에서 시작한 성령 안의 실제 삶을 모은다고 읽는다.[^25] 몸의 행위를 죽인다는 말은 죄가 몸을 통해 실행되는 방식을 끝낸다는 뜻이다. 몸 자체를 없어져야 할 악으로 평가하는 문장과는 다르다.

신자들은 성령을 힘입어 몸으로 행하던 죄를 끊는다. 생명을 받을 몸에 어떤 삶을 살게 할 것인지가 성령을 따르는 책임에 속한다.

## 14절: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

> “하나님의 영에게 인도받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14절)

인도받는다는 수동형은 성령의 활동을 말한다. 앞의 죄에 맞서는 삶이 그 인도의 가까운 내용이다. 바이른은 이 관계가 신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라는 구원의 지위에 연결한다고 설명한다.[^26] 바울은 같은 특권을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에게 함께 적용한다.

자녀라는 호칭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아들이라고 부르신 전통과 관계한다. 바이른은 그 전통이 하나님의 미래 구원을 누릴 백성의 소망으로 발전했다고 읽는다.[^27]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그 약속을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누린다.

## 15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는 성령

> “여러분은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성령 안에서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고 외칩니다.” (15절)

휘오테시아(υἱοθεσία)는 입양과 자녀의 지위를 표현한다. 주엣은 로마 및 헬라 세계의 입양과 그 가정에 주어진 현재 지위 및 미래 유업을 설명한다.[^28] 바이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성경 전통을 더 중요한 배경으로 읽는다.[^29] 두 배경은 하나님의 가정에 속해 유업을 받는 관계를 설명한다.

아바는 아람어로 아버지를 부르는 말이고, 뒤의 호 파테르(ὁ πατήρ)는 같은 뜻의 헬라어다. 신자들의 기도에 그 부름이 남아 있다. 바이른은 이 기도가 성령을 통해 예수의 아버지와의 관계에 참여하는 공동체를 표현한다고 읽는다.[^30] 신자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 16절: 우리의 영과 함께 증언하시는 성령

>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16절)

아우토 토 프뉴마(αὐτὸ τὸ πνεῦμα)는 성령 자신을 강조한다. 쉬마르튀레이(συμμαρτυρεῖ)는 함께 증언하거나 다른 증언을 확인하는 뜻을 가진다. 바이른은 성령과 신자의 영이 함께 자녀의 지위를 확인하는 관계로 읽는다.[^31] 무도 우리의 영을 인간의 영으로 읽으며, 성령이 그 영과 함께 증언하신다고 설명한다.[^32]

주엣은 신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영과 성령 자신이 같은 자녀의 지위를 증언한다는 읽기를 택한다.[^33] 인간의 영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알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여기서는 우리의 영을 인간의 영으로 우선한다. 그 인간의 믿음은 이미 받은 복음과 성령의 선물에서 생겨났으므로 하나님과 독립된 자녀 지식이라는 전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 17절: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유업을 누림

> “자녀라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면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17절)

자녀의 지위는 미래의 유업으로 이어진다. 바이른은 이를 아브라함의 약속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연결한다.[^34]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누리시는 유업에 함께 참여한다.

함께 고난을 받고 함께 영광을 받는 두 동사가 같은 관계를 설명한다. 바이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및 영광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삶으로 읽는다.[^35] 자녀 됨은 고난을 모두 피하게 된 상태가 아니다. 성령의 증언은 고난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받을 생명을 바라보게 한다.

## 교부들의 해석

크리소스토무스는 『로마서 강해』 13의 9-11절 해설에서 성령이 계시는 곳에 그리스도도 계시며, 삼위가 나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성령과 그리스도를 같은 인격으로 일치시키기보다, 구별되면서 함께 현존하는 하나의 삼위일체라는 읽기다.[^36]

『로마서 강해』 14에서는 몸의 행위를 죽인다는 말을 몸에 필요한 음식과 돌봄, 삶의 활동을 없애는 뜻과 구별한다. 16절의 증언은 보혜사 자신과 그분이 주신 선물이 자녀의 부름을 함께 확인하는 관계로 읽는다.[^37] 그는 신자의 자녀 됨을 확인하는 성령을 그 선물보다 높은 신적 주체로 설명한다.

암브로시우스는 『성령론』 I.4.56에서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을 같은 성령으로 읽는다. 고린도전서와 요한복음의 같은 성령 호칭들을 연결하여 구원 역사를 가로질러 하나의 성령이 활동하신다고 논증한다.[^38] 이 판단은 성령의 호칭을 서로 다른 영들의 목록으로 만드는 해석에 답한다.

## 공동 현존에서 동일 본질로 이어지는 논증

바울은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고 죄를 정죄하셨다고 말한다. 같은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셨고 신자들의 몸도 살리실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영으로 신자들에게 거하시며, 아버지를 부르고 유업을 기다리게 하신다.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한 구원의 시작과 실행과 현재 경험에 함께 관계한다.

페이는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두 호칭, 그리스도의 활동을 현실로 만드는 성령의 활동이 세 분의 신적 지위를 설명한다고 논증한다. 그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기능이 겹쳐도 두 분을 같은 인격으로 놓지는 않는다.[^39] 이 읽기는 9-11절의 공동 현존을 설명한다.

보내심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아들의 선재와 동일 본질이 모두 성립하지는 않는다. 사람도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보내질 수 있다. 바이른은 이곳의 보내심을 빌립보서 2장과 다른 아들 보내심 본문에 연결하여 선재를 읽는다.[^40] 그 연결과 아들의 창조 참여에 관한 앞선 본문들은, 같은 신성을 가지신 분이 인간의 조건을 취하여 구원을 이루셨다는 판단에 근거가 된다.

성령에게는 죄의 지배를 끊고 생명을 주며 하나님의 현존을 이루는 활동이 귀속된다. 고린도전서 2:10-11의 하나님의 자기 앎을 함께 읽으면 성령은 다른 피조물에게 맡긴 힘보다 하나님 자신의 앎과 생명에 관계하시는 분으로 설명된다. 그분이 아버지와 아들의 같은 영이며 공동 현존을 이루신다는 이 단락은 그 관계를 더 구체화한다.

신자들도 하나님의 자녀이며 유업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을 받고 인도받는 사람들이다. 아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기 아들이고, 성령은 자녀의 관계를 이루며 확인하시는 분이다. 같은 자녀 호칭과 같은 현존을 단순한 본질의 일치로 만들면 이 주는 분과 받는 사람의 구별이 사라진다.

동일 본질은 세 분에게 귀속된 이 신적 활동과 관계를 한 하나님 안에서 설명한다. 아들의 창조주 지위와 성령의 하나님의 자기 앎, 여기서 드러난 하나의 생명과 현존을 세 개의 독립된 신성으로 나누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구별되면서 나뉘지 않는 하나의 신성을 지니신다는 판단이다. 공동 현존은 그 결론의 근거이며, 나뉘지 않는 하나의 신성이라는 설명에는 여러 본문의 신적 지위와 활동을 함께 읽은 신론이 사용된다.

바울이 전하는 구원은 그 관계를 신자들의 삶에 이루는 일이다. 아들은 그들의 죄와 죽음의 조건에 들어오셨고, 성령은 그들을 아버지의 자녀로 살게 하신다. 죽을 몸과 현재의 고난 가운데서도 그들은 아버지를 부르며 그리스도와 함께 받을 생명을 기다린다.

## 각주

[^1]: Brendan Byrne, *Romans*, Sacra Pagina 6 (Collegeville, MN: Liturgical Press, 1996; consulted version with bibliography updated 2007), 235, 248.
[^2]: Michael W. Holmes 편, *The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2010), 롬 8:1-17을 따른 필자 번역. [고정 커밋 본문](https://github.com/Faithlife/SBLGNT/blob/c4d241a9c1c479a55b989ba35a4976c1d0b8052c/data/sblgnt/text/Rom.txt). 1절은 짧은 본문, 2절은 σε, 11절은 διά와 대격을 따른다.
[^3]: Byrne, *Romans*, 235-236.
[^4]: Byrne, *Romans*, 235-236, 242.
[^5]: Byrne, *Romans*, 236-237.
[^6]: Byrne, *Romans*, 236, 243.
[^7]: Byrne, *Romans*, 236-237, 243.
[^8]: Byrne, *Romans*, 237-238, 244.
[^9]: Robert Jewett, *Romans: A Commentary*, Hermeneia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7; PDF 판권 표시 2006), 485.
[^10]: Byrne, *Romans*, 238-239, 244-245.
[^11]: Jewett, *Romans*, 489-490.
[^12]: Byrne, *Romans*, 239-240, 245.
[^13]: Byrne, *Romans*, 240.
[^14]: Douglas J. Moo, *The Letter to the Romans*, 2nd ed. (Grand Rapids: Eerdmans, 2018), Perlego 전자책, “D. Assurance of Eternal Life in the Spirit (8:1-30),” “1. The Spirit of Life (8:1-13),” 9절 해설. [실제 리더](https://ereader.perlego.com/1/book/2015314/22?element_originalid=chs62).
[^15]: Jewett, *Romans*, 490.
[^16]: Jewett, *Romans*, 491. 그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경험적 연결을 강조한다.
[^17]: Byrne, *Romans*, 240.
[^18]: Byrne, *Romans*, 240-241, 245.
[^19]: Jewett, *Romans*, 491-492.
[^20]: Byrne, *Romans*, 245.
[^21]: Byrne, *Romans*, 245.
[^22]: Moo, *The Letter to the Romans*, “1. The Spirit of Life (8:1-13),” 10절 해설, 표시 각주 969-977.
[^23]: Byrne, *Romans*, 241, 246.
[^24]: SBLGNT, 롬 8:11; Jewett, *Romans*, 475의 본문 주석. διά와 속격 및 대격의 두 형태를 구별했다.
[^25]: Byrne, *Romans*, 241, 246.
[^26]: Byrne, *Romans*, 248-249, 252.
[^27]: Byrne, *Romans*, 249-250.
[^28]: Jewett, *Romans*, 497-499.
[^29]: Byrne, *Romans*, 249-250, 252.
[^30]: Byrne, *Romans*, 250-251, 252-253.
[^31]: Byrne, *Romans*, 251, 253.
[^32]: Moo, *The Letter to the Romans*, “2. The Spirit of Adoption (8:14-17),” 16절 해설, 표시 각주 1033-1036.
[^33]: Jewett, *Romans*, 500.
[^34]: Byrne, *Romans*, 251, 253.
[^35]: Byrne, *Romans*, 251, 253.
[^36]: 크리소스토무스, [『로마서 강해』 13](https://www.newadvent.org/fathers/210213.htm), 롬 8:9-11 해설, 공개 NPNF 영어 번역.
[^37]: 크리소스토무스, [『로마서 강해』 14](https://www.newadvent.org/fathers/210214.htm), 롬 8:12-13 및 16 해설, 공개 NPNF 영어 번역.
[^38]: 암브로시우스, [『성령론』 I.4.56-60](https://www.newadvent.org/fathers/34021.htm), 공개 NPNF 영어 번역.
[^39]: Ronald C. Fay, “Was Paul a Trinitarian? A Look at Romans 8,” post-referee preprint (2006), 저자 쪽수 12-15, PDF 순서 13-16, §§4-6. [실제 열람한 기관 저장소 판본](https://digitalcommons.liberty.edu/lts_fac_pubs/368/). 이 저장소 판본은 심사 후 출판 전 원고이며 저자 쪽수 1-15를 가진다.
[^40]: Byrne, *Romans*, 243. 페이는 보내심에서 선재를 더 직접적으로 추론한다. Fay, “Was Paul,” 저자 쪽수 10, PDF 순서 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