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20:17-31: 예수의 하나님, 예수가 주시는 성령과 도마의 고백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다가 예수를 만났다. 처음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예수께서 이름을 부르시자 자기 선생님을 알아보았다. 17절은 그 만남을 제자들에게 전할 소식으로 이끈다. 부활하신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는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그분의 말씀을 따라 설명된다.

## 17절: 나의 아버지와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과 너희의 하나님

> “나를 붙잡고 있지 말아라. 나는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나의 아버지와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과 너희의 하나님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17절, 필자 번역)[^1]

메 무 합투(Μή μου ἅπτου)는 만지는 일이나 붙잡는 일을 금하는 표현이다. 카슨은 마리아가 예수를 놓치지 않으려고 붙잡는 상황으로 읽으며, 예수께서 그를 제자들에게 보내신다고 설명한다.[^2] 현재 명령형 자체가 이미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두 증명하지는 않지만, 붙잡아 두려는 행동을 멈추라는 읽기는 이 문맥에 맞는다.

아직 올라가지 않았다는 말과 올라간다는 말은 아버지께 돌아갈 일을 함께 설명한다. 마리아는 만난 예수를 자기 곁에 붙잡아 두는 대신, 그분의 귀환을 전할 사명을 받는다. 금지와 보내심이 같은 문장 안에 있다.

예수는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카슨은 이 호칭과 아버지의 공유를 제자들이 예수의 아들 됨에 참여하는 관계로 읽는다. 나의 아버지와 너희의 아버지라는 구별은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가 같지 않으면서 같은 아버지께 속한다는 뜻을 표현한다.[^3]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 아버지께 속한 사람들이 된다. 톰프슨은 요한복음이 예수를 아들로, 신자들을 자녀로 부르는 차이도 함께 설명한다고 읽는다.[^4]

예수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도 부르신다. 그분은 기도하고 순종하며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아들이다. 같은 하나님을 제자들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을 그 관계에 포함한다. 우리 하나님이라는 한 호칭 대신 나의 하나님과 너희의 하나님을 나란히 놓아 예수와 제자들을 구별한다.

## 18절: 마리아가 전하는 만남과 말씀

>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주님을 보았다고 알리고 그분이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전했습니다.” (18절)

마리아는 눈앞에서 본 분과 들은 말씀을 함께 증언한다. 카슨은 이때 주님이라는 호칭이 제자들이 알던 선생님이 살아 계심을 확인하는 말로 쓰였다고 읽는다.[^5] 마리아의 증언 뒤에는 예수께서 직접 그들에게 오시는 장면이 이어진다.

## 19-20절: 닫힌 문 안에 오신 예수와 기뻐하는 제자들

> “그날, 곧 주간의 첫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을 닫아 두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시고,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19-20절)

닫힌 문은 제자들의 두려움을 나타낸다. 카슨은 예수를 처형한 권력자들이 추종자들도 해칠 수 있는 상황을 설명한다.[^6] 유대인들이라는 표현은 모든 유대인을 같은 적으로 지칭하기보다 이 두려움이 향하는 사람들과의 갈등을 나타낸다. 예수와 제자들도 유대인이다.

예수는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다. 부활하신 분은 십자가에 달렸던 그 예수다. 카슨은 상처가 부활하신 주님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의 연속성을 확인한다고 읽는다.[^7] 제자들의 기쁨은 두려움 속의 추측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분을 본 만남에서 생겨난다.

평화는 고별담화에서 예수가 약속하신 선물이다. 같은 인사를 다시 하시는 일은 곧 제자들의 사명을 설명하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그들에게 오신 예수는 자신을 확인시킨 뒤 그들을 보내신다.

## 21절: 아버지가 보내신 아들이 제자들을 보내심

>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1절)

아버지의 보내심은 완료형이고 예수의 보내심은 현재형이다. 예수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사명 안에 계시며, 그 사명을 제자들에게 맡기신다. 카슨은 아포스텔로(ἀποστέλλω)와 펨포(πέμπω)라는 두 동사의 차이로 별개의 두 종류의 파송을 만들기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제자들의 사명에 적용하는 문장으로 읽는다.[^8]

브라운은 아버지의 보내심이 아들의 보내심의 본보기이자 근거라고 설명한다. 제자들의 사명은 예수의 사명을 계속한다.[^9] 그러나 보내심을 공유한다고 해서 제자들이 예수와 같은 본질이 되지는 않는다. 제자들의 활동은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과 사명에 근거한다. 이 비교는 아버지와 아들의 공동 활동에서 동일 본질을 논증할 때에도 활동의 종류와 관계를 살필 근거가 된다.

## 22절: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심

> “이 말씀을 하신 뒤 예수께서 숨을 불어 내쉬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22절)

에네퓌세센(ἐνεφύσησεν)은 숨을 불거나 내쉬는 행동을 표현한다. 브라운은 창세기 2:7의 생명 부여와 연결하여 새 창조를 읽는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가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장면이다.[^10] 숨이라는 행위와 성령이라는 선물은 이 서술에서 함께 관계한다.

브라운은 이곳을 고별담화에서 약속한 성령의 실제 수여로 읽는다.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는 사명과 성령의 선물이 이어져 있으므로 개인적인 위안만을 위한 부분적인 선물로 설명하지 않는다.[^11] 요한복음의 서술에서 예수의 죽음과 높임, 귀환과 성령의 수여가 이어진다. 톰프슨은 이 선물이 제자들의 새로운 정체성과 사명을 함께 이루며, 예수의 생명 부여와 성령 수여를 그들의 활동에 연결한다고 읽는다.[^12]

카슨은 이후의 성령 수여를 예고하는 행위로 읽는다. 예수께서 아버지께 돌아가신 뒤 성령을 보내신다는 약속과 17절의 아직 올라가지 않았다는 말을 함께 고려한다.[^13] 이 읽기에서 숨을 내쉬는 행동과 명령은 교회가 뒤에 경험할 선물을 가리킨다.

두 해석 모두 행동의 상징성을 인정할 수 있다. 차이는 그 상징이 지금 주어진 선물을 표현하는지, 앞으로 주어질 선물을 예고하는지에 있다. 로젠은 숨의 행동, 받으라는 명령, 성령 수여의 시점과 기능을 서로 다른 질문으로 나누어 검토한다.[^14]

여기서는 제자들에게 직접 한 명령과 보내심의 문맥을 따라 실제 성령 수여를 우선한다. 앞의 약속이 이 사명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수여를 곧 제자들이 처음 신앙이나 생명을 갖게 된 순간이라고 설명할 필요는 없다. 로젠도 5:24와 6:47의 이미 주어진 생명과 20절의 새 성령 수여를 함께 설명할 쟁점으로 제시한다.[^15] 이미 예수께 속한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로 사명을 수행한다.

## 23절: 죄를 용서하고 붙드는 권한

> “너희가 누구의 죄를 용서하면 그 죄가 용서된 상태에 있고, 누구의 죄를 붙들면 그 죄가 붙들린 상태에 있다.” (23절)

용서되었다는 아페온타이(ἀφέωνται), 붙들려 있다는 케크라텐타이(κεκράτηνται)는 완료 수동형이다. 카슨은 이 수동형 뒤에 하나님이 행위의 주체로 계시며, 제자들의 복음 증언에 대한 응답이 용서와 용서받지 못함으로 드러난다고 읽는다.[^16]

브라운도 수동형이 하나님의 활동을 표현한다고 설명하며, 제자들에게 맡겨진 사명 안에서 이 권한을 읽는다.[^17] 이곳에서 제자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심판의 주인이 되지 않는다. 그들을 보내신 예수와 그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관계 안에서 죄에 관한 사명을 수행한다.

## 24-25절: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못한 도마

>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도마, 곧 쌍둥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주님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그분의 손에서 못 자국을 보고, 그 자국에 손가락을 넣고, 옆구리에 손을 넣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24-25절)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본 장면을 보지 못했다. 그는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직접 확인하겠다고 요구한다. 카슨은 그 요구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부활하신 예수가 같은 분이어야 한다는 문제에 관계한다고 설명한다.[^18] 그러나 도마는 그 확인을 자신이 믿기 위한 조건으로 내세운다.

우 메 피스튜소(οὐ μὴ πιστεύσω)는 강한 부정을 표현한다. 도마는 제자들의 증언만으로는 믿지 않겠다고 말한다. 본문은 그를 막연한 회의주의의 대표로 만들기보다, 다른 사람들이 이미 본 예수를 자신은 아직 보지 못한 상황에 놓는다.

## 26-27절: 도마의 요구에 응답하시는 예수

> “여드레 뒤 제자들은 다시 안에 모여 있었고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문이 닫힌 채로 예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시고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라. 믿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어라.” (26-27절)

예수는 도마가 요구한 손과 옆구리를 그대로 제시한다. 카슨은 그 응답이 예수가 현장에 계시지 않았을 때 도마가 한 말까지 알고 계심을 서술한다고 읽는다.[^19] 예수는 도마를 다른 제자들의 만남에 참여시키면서 믿음을 요구하신다.

도마가 실제로 손을 넣었는지는 기록되지 않는다. 카슨은 이어지는 본문이 봄을 강조한다고 설명한다.[^20] 독자는 예수가 제시한 몸과 도마의 응답을 따라 읽는다.

## 28절: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 “도마가 예수께 응답하여 말했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28절)

그에게 말했다는 아우토(αὐτῷ)의 대상은 예수다. 주님과 하나님이라는 두 호칭이 같은 응답 안에 있다. 카슨은 관사를 가진 주격 명사들을 부르는 말로 읽어, 도마가 예수에게 직접 신앙을 고백한다고 설명한다.[^21] 한 호칭은 예수에게, 다른 호칭은 다른 곳의 하나님에게 돌리는 응답으로 읽을 문맥적 근거가 약하다.

브라운은 이 고백을 요한복음의 가장 높은 그리스도 고백으로 읽는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호칭을 예수께 사용하고, 서문의 말씀은 하나님이었다는 진술과 연결한다.[^22] 주님이라는 말에 놀라움의 감탄만 붙은 것이 아니다. 도마는 자신이 만난 예수가 누구인지 고백한다.

나의라는 말이 두 번 나오므로 그 고백은 도마 자신의 관계를 표현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소식에 응답하지 못했던 자리에서 예수에게 직접 응답한다. 예수의 몸을 보았다는 사실이 그분의 신성에 대한 고백으로 이어진다.

## 29절: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의 복

>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게 되었느냐? 보지 않고도 믿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 (29절)

SBLGNT는 예수의 첫 말씀을 질문으로 표시한다. 카슨은 그 구문을 도마의 실제 믿음을 확인하는 진술로 읽는다.[^23] 두 읽기에서 도마가 믿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뒤의 복은 예수를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도 같은 믿음에 참여할 수 있음을 말한다.

예수를 직접 보지 못한 이들은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믿는다. 카슨은 이후 사람들이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믿는다는 17:20과 연결한다.[^24] 톰프슨은 예수께서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을 더 복된 사람이라고 비교하지는 않으셨다고 설명한다.[^25] 도마와 다른 제자들이 본 일이 기록되어 직접 보지 못한 독자들에게 전해진다. 다음 두 절은 그 기록의 목적을 설명한다.

## 30-31절: 기록된 표적, 하나님의 아들과 생명

>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다른 표적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일들을 기록한 것은 여러분이 예수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믿음으로 그분의 이름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30-31절)

저자는 모든 일을 기록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선택한 표적들을 통해 예수의 정체를 알리고 생명에 이르게 하려 한다. 카슨은 이 결론이 앞의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에 관한 말씀을 기록의 목적에 연결한다고 읽는다.[^26]

믿다의 현재형 피스튜에테(πιστεύητε)와 부정과거형 피스튜세테(πιστεύσητε) 사이에는 이문이 있다. SBLGNT는 현재형을 택한다. 카슨은 현재형을 이미 믿는 사람만을 위한 책, 부정과거형을 처음 믿는 사람만을 위한 책이라는 구분에 일치시키는 데 반대한다.[^27] 두 형태는 믿음의 지속과 새로운 응답을 문맥 안에서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결론은 도마의 하나님 고백을 낮추는 말로 읽히지 않는다. 카슨은 예수의 신성이 그분의 아들 됨을 설명하는 서술과 결합한다고 강조한다.[^28] 예수는 아버지에게서 오시고 돌아가시며, 그분의 이름 안에서 독자들이 생명을 받는다.

## 교부들의 해석

### 크리소스토무스: 형제가 되신 아들, 서로 다른 성령의 은사

크리소스토무스는 『요한복음 강해』 86.2에서 17절을 성육신의 관계로 읽는다. 예수가 제자들의 형제가 되셨으나 아버지와의 관계와 존귀가 제자들과 같지는 않다는 설명이다.[^29]

86.3에서는 22절을 성령을 받을 준비로 읽는 견해를 소개하면서, 죄를 용서할 영적인 권한을 실제 받았다는 읽기도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뒤의 오순절 선물을 기적과 증언의 능력에 연결한다. 그는 은사가 여러 모습으로 주어져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능력이 하나라고 논증한다.[^30]

### 아우구스티누스: 본성의 아들 됨과 은혜의 자녀 됨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강해』 121.3에서 예수에게 아버지는 본성에 따른 아버지이고, 제자들에게는 은혜로 주어진 아버지라고 설명한다. 나의 하나님은 사람이신 예수의 관계에, 너희의 하나님은 예수를 중보자로 가진 신자들의 관계에 적용한다.[^31]

121.4에서는 예수의 호흡이 성령을 아버지의 영이면서 아들의 영으로도 알린다고 읽는다. 죄의 용서는 성령이 주시는 교회의 사랑과 관계한다. 121.5에서는 도마가 보이는 인성을 통해 보이지 않는 신성을 고백했다고 설명한다.[^32] 같은 예수가 실제 사람이시며 하나님이라는 그의 읽기가 두 장면을 연결한다.

## 아버지와 아들, 성령의 관계와 동일 본질

17절에서 예수는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28절에서 도마는 예수를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예수는 그 고백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신다. 요한복음은 예수와 아버지를 구별하면서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관계를 제시한다.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아들과 그 아들이 주시는 성령도 이 관계 안에 있다.

예수가 보내심을 받으셨다는 사실만으로 피조된 대리자인지 같은 신성을 가진 아들인지 결정되지는 않는다. 제자들도 보내심을 받으며, 죄의 용서에 관한 권한을 받는다. 성령을 주시는 행위와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요한복음 전체의 창조와 생명 진술에 연결해야 아들의 고유한 지위가 설명된다.

서문에서 말씀은 하나님이시며 만물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다. 그 말씀은 사람이 되셨다. 이 창조의 진술은 피조세계에 속한 대표자와 만물이 그분을 통해 생겨난 말씀을 구별한다. 5:21-23에서 아들은 생명을 주시고 아버지와 같은 공경을 받으신다.[^33] 20:28의 하나님 고백은 이 말씀과 아들의 정체가 부활의 만남에서 고백된 것이다.

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그 아들이 별개의 신이거나 피조된 존재라고 설명하면 이 창조와 공경의 진술을 함께 설명하기 어렵다. 아버지와 구별되는 아들이 나뉘지 않는 하나의 신성을 가지셨고 사람이 되셨다는 설명은, 아버지를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신 실제 인성과 도마의 하나님 고백을 함께 보존한다. 교부들의 두 본성 해석에는 이 본문 간 연결과 한 하나님에 대한 신론이 사용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보내시는 같은 진리의 영이며, 여기서는 부활하신 아들이 제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14:16-26과 16:13-15에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계시를 신자들에게 알리며, 그들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에 관계한다.[^34] 고린도전서 2:10-11까지 연결하면 그분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영이다. 그 앎과 생명을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신성을 나뉘지 않는 하나로 고백할 때, 성령도 같은 신적 본성에 속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 결론은 선물을 전달하는 역할의 병렬보다 성령 자신과 하나님의 앎 및 현존의 관계에 근거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몸을 직접 보았던 도마의 신앙을 글로 전해 받는다. 그 믿음의 대상은 아버지께 돌아가시며 성령을 주시는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자 주님이다. 기록의 목적은 그분의 이름 안에서 생명을 누리는 데 있다.

## 각주

[^1]: Michael W. Holmes 편, *The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2010), 요 20:17-31을 따른 필자 번역. [고정 커밋 본문](https://github.com/Faithlife/SBLGNT/blob/c4d241a9c1c479a55b989ba35a4976c1d0b8052c/data/sblgnt/text/John.txt).
[^2]: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Grand Rapids: Eerdmans, 1991), 642-645.
[^3]: Carson, *John*, 645.
[^4]: Marianne Meye Thompson, *John: A Commentary*, New Testament Library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416-418. 전자책(Perlego)에 표시된 출판사 인쇄 쪽수.
[^5]: Carson, *John*, 645-646.
[^6]: Carson, *John*, 646-647.
[^7]: Carson, *John*, 647.
[^8]: Carson, *John*, 648-649.
[^9]: Raymond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Anchor Bible 29A (Garden City, NY: Doubleday, 1970), 1036.
[^10]: Brown, *John*, 1037.
[^11]: Brown, *John*, 1037-1039.
[^12]: Thompson, *John*, 419-423, 특히 421.
[^13]: Carson, *John*, 650-655.
[^14]: Adrian P. Rosen, “Interpretive Questions Related to the Gift of the Spirit in John 20:22,”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68, no. 2 (2025): 285-297, 여기서는 287-288. [출판사 공개 PDF](https://etsjets.org/wp-content/uploads/JETS_68.2_285_Rosen.pdf). 이 논문은 특정 해석을 최종적으로 옹호하기보다 해석의 질문들을 분석한다.
[^15]: Rosen, “Interpretive Questions,” 296-297.
[^16]: Carson, *John*, 655.
[^17]: Brown, *John*, 1039.
[^18]: Carson, *John*, 656.
[^19]: Carson, *John*, 657.
[^20]: Carson, *John*, 657.
[^21]: Carson, *John*, 658-659.
[^22]: Brown, *John*, 1047-1048.
[^23]: Carson, *John*, 659-660. SBLGNT는 물음표를 채택했다.
[^24]: Carson, *John*, 660.
[^25]: Thompson, *John*, 427-428.
[^26]: Carson, *John*, 660-661.
[^27]: Carson, *John*, 661-662; Brown, *John*, 1056.
[^28]: Carson, *John*, 663.
[^29]: 크리소스토무스, [『요한복음 강해』 86.2](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186.htm), 공개 NPNF 영어 번역.
[^30]: 같은 글, 86.3. 죄 용서의 권한과 이후 기적의 능력을 구별하는 읽기다.
[^31]: 아우구스티누스, [『요한복음 강해』 121.3](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121.htm), 공개 NPNF 영어 번역.
[^32]: 같은 글, 121.4-5. 도마가 실제로 만졌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는 설명도 있다.
[^33]: SBLGNT, 요 1:1-3, 14; 5:21-23. [요한복음 1:1-18](/readings/05/) 및 [5:17-30](/readings/04/)과 연결한 필자의 판단이다.
[^34]: SBLGNT, 요 14:16-26; 16:13-15; 고전 2:10-11. 관련 주해는 [14:15-31](/readings/08/)과 [16:5-15](/readings/10/)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