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16:5-15: 세상을 책망하고 아들을 알리시는 성령

## 5-7절: 예수께서 떠나시는 것이 유익한 까닭

> “그러나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갑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했기 때문에 슬픔이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합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여러분에게 유익합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혜사가 여러분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여러분에게 보내겠습니다.” (5-7절, 필자 번역)

제자들은 예수가 없는 세상을 두려워한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회당에서 내쫓고, 죽이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리라는 말을 들었다(16:1-4). 이제 예수마저 떠나신다. 그분이 어디로 가시는지보다 자신들에게 닥칠 상실이 마음을 채운다.

베드로는 이미 어디로 가시느냐고 물었고, 도마도 그 목적지를 모른다고 말했다(13:36; 14:5). 5절의 아무도 묻지 않는다는 말은 앞선 대화를 부정하는 말처럼 들린다. 카슨은 앞선 질문들이 예수의 떠나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반응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1] 지금 제자들은 아버지께로 가심이 가져올 결과를 묻지 못하고 있다. 6절은 그 침묵의 이유를 슬픔에서 찾고, 7절은 그들이 보지 못하는 유익을 설명한다.

예수께서 가시면 보혜사가 오신다. 이 순서는 요한복음 7:39에서 예수가 아직 영광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는 설명과 이어진다. 카슨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높아지심이 성령을 주시는 새 시대를 연다고 읽는다.[^2] 떠나심은 사역을 중단하고 자리를 비우는 일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실 구원 사건이다. 그 유익은 이어지는 두 약속에 담긴다. 성령께서는 세상의 죄와 잘못을 드러내고, 제자들을 모든 진리 안에서 이끄신다.

## 8-11절: 죄와 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잘못

> “그분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관하여 세상의 잘못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죄에 관해서는 그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며, 의에 관해서는 내가 아버지께 가고 여러분이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심판에 관해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8-11절)

잘못을 드러내다는 엘렝크세이(ἐλέγξει)를 옮긴 말이다. 이 동사는 책망하거나 죄책을 입증하고 깨닫게 하는 행위를 가리킬 수 있다. 메리앤 메이 톰프슨은 요한복음 3:20과 8:46의 용례를 연결하여, 여기서 성령이 세상의 죄를 드러내고 빛 가운데 가져오신다고 풀이한다.[^3] 성령의 증언 앞에서 세상이 예수에 관하여 내린 판단이 심문받는다.

9-11절은 각각 호티(ὅτι)로 시작하는 절구를 붙인다. 위 번역은 이를 이유를 나타내는 말로 옮겼다. 이때 각 절구는 성령이 왜 세상을 책망하시는지 설명한다. 이를 설명적 용법으로 읽으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이고 아버지께 가심이 의를 드러낸다는 식으로 세 명사의 내용을 풀이하게 된다. 카슨은 세 절구를 모두 이유로 읽고, 베네마는 설명으로 읽으면서 그 안에 책망의 근거도 포함된다고 본다.[^4] 어떤 연결을 택하느냐에 따라 특히 의에 관한 해석이 달라진다.

9절에서 죄는 예수를 믿지 않는 일과 연결된다. 앞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일을 본 사람들이 그와 아버지를 미워했다(15:22-24).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며 제자들을 박해할 수 있지만, 자신들이 거부하는 예수에게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셨다. 성령의 책망은 이 거부가 죄임을 드러낸다. 카슨은 불신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에게 생명과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며, 성령의 책망은 그 필요를 알게 하여 예수께 돌아오도록 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5]

10절의 의는 더 어렵다. 누구의 의가 문제인지 명시하는 소유격이 없고, 예수가 아버지께 가신다는 이유가 붙어 있다. 톰프슨과 레이먼드 브라운은 세상이 정죄한 예수를 아버지께서 옳다고 인정하시는 것으로 읽는다.[^6] 예수가 아버지께 돌아가신다는 사실이 그를 죄인으로 규정한 판단을 뒤집는다. 이 해석에서 성령은 예수의 의로우심을 밝힘으로써 세상의 잘못을 드러내신다.

카슨은 의를 세상이 스스로 내세우는 그릇된 의로 읽는다. 세상의 죄, 세상의 의, 세상의 판단을 하나씩 책망한다는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는 예수의 생애와 활동이 세상의 의를 폭로했으며, 예수가 떠나신 뒤에는 성령이 그 일을 계속하신다고 설명한다.[^7] 트리샤 게이츠 브라운도 이 해석을 받아들인다. 예수께서 더 이상 제자들 앞에서 세상의 거짓된 의를 드러내지 않으시므로 보혜사가 그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다.[^8]

카슨의 해석은 세 항목의 대칭을 잘 설명한다. 다만 10절에서 의롭다는 주장이 거짓이라는 반어적 뜻을 보충해야 하고, 아버지께 가심을 주로 예수의 부재와 역할 계승의 이유로 읽게 된다. 예수의 정당함을 입증한다는 해석은 아버지께 가심 자체가 왜 의의 근거인지를 더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세상은 예수가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았다고 판단했으나, 그가 돌아가시는 분은 바로 아버지다. 이 문맥에서는 예수의 의로우심과 정당함이 입증된다는 읽기가 더 설득력 있다.

여러분이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한다는 말은 그 귀환을 제자들의 경험에서 설명한다. 예수는 이전처럼 눈앞에 계시지 않을 것이다. 그 부재를 실패로 해석할 때 제자들은 슬픔에 빠지지만, 예수가 아버지께 가셨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에는 세상의 정죄가 마지막 판결이 아님을 알게 된다. 성령은 보이지 않는 예수에 관하여 증언하신다.

11절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말한다. 케크리타이(κέκριται)는 심판받은 결과가 지속됨을 나타내는 완료형이다. 예수의 죽음을 앞둔 시점에 그 결과를 확정된 일로 말한다. 12:31에서도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세상의 심판과 그 통치자의 축출을 선언했다. 십자가에서 정죄받는 예수의 모습과 세상 통치자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 겹친다. 세상이 예수에게 내린 판결로 승리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건에서, 세상을 지배하던 자가 심판받는다.

## 세상을 책망하시는 일과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시는 일

성령은 이 잘못을 누구에게 깨닫게 하시는가. 레이먼드 브라운은 성령을 받아들일 수 없는 세상을 직접 설득하기보다, 제자들 안에서 세상의 잘못과 예수의 정당함을 입증하신다고 해석한다.[^9] 트리샤 브라운도 제자들이 성령의 설명을 듣는다고 본다. 박해 때문에 예수를 따르는 것이 잘못된 선택처럼 보일 때, 보혜사는 그들이 예수를 신뢰하도록 돕는다.[^10]

트리샤 브라운이 의를 풀이할 때 카슨을 따르면서도 책망을 듣는 대상에 관해서는 레이먼드 브라운을 따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이 어떤 점에서 잘못했는지와 그 잘못을 누가 깨닫는지는 별개의 질문이다. 그에게 세상의 거짓된 의가 드러나는 곳은 우선 제자 공동체다.

코르넬리스 베네마는 8절에서 세상이 책망의 목적어라는 점에 주목한다. 예수의 사역을 잇는 성령과 제자들의 증언도 함께 고려한다. 그는 성령이 제자들의 증언으로 세상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고, 그들이 예수를 믿어 생명을 얻도록 하신다고 해석한다.[^11]

앞 단락의 성령과 제자들의 증언(15:26-27), 이 단락의 세상이라는 목적어를 함께 읽으면 베네마의 설명이 더 자연스럽다. 제자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바르게 이해하고 증언할 때 그 증언은 세상 사람들을 향한다. 성령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상이라는 규정이 그 안에 사는 누구도 믿게 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제자들 자신도 예수가 세상에서 택하신 사람들이었다(15:19). 같은 증언이 박해받는 제자들을 확신하게 하고, 그 증언을 듣는 사람들의 불신을 드러낸다.

## 12-13절: 지금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알리시는 영

> “내가 아직 여러분에게 할 말이 많지만, 여러분은 지금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여러분을 모든 진리 안에서 이끄실 것입니다. 그분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듣는 것을 모두 말씀하실 것이며, 앞으로 올 일들을 여러분에게 알리실 것입니다.” (12-13절)

12절은 제자들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 까닭은 예수에게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이 지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스타제인(βαστάζειν)은 짐을 지거나 견디는 일에 쓰이는 말이다. 이 문맥에서 제자들의 어려움은 정보를 이해하는 능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떠나심에 관한 말씀조차 그들을 슬픔에 빠뜨렸다.

성령은 그들을 모든 진리 안에서 이끄실 것이다. 여기서 사용한 SBLGNT는 엔 테 알레테이아 파세(ἐν τῇ ἀληθείᾳ πάσῃ)를 읽는다. 카슨은 이 표현을 예수를 통해 주어진 진리 전체를 이해하도록 이끄시는 약속으로 풀이한다.[^12] 진리의 범위는 뒤따르는 말씀에서 구체화된다. 성령은 예수의 것을 받아 알리며, 예수가 가진 것은 아버지의 것이다.

베네마는 성령의 가르침을 예수의 계시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설명한다. 성령이 예수와 별개의 진리를 더하는 것보다, 이미 주어진 예수의 계시를 제자들이 이해하고 그 의미를 깨닫게 하는 데 무게를 둔다.[^13] 요한복음은 제자들이 부활 후에야 예수의 말씀과 행동을 이해했다고 반복해서 말한다(2:22; 12:16). 성령의 가르침은 이 뒤늦은 이해와 잘 맞는다.

트리샤 브라운은 12절의 아직 할 말이 많다는 진술과 앞으로 알리실 것이라는 표현을 더 강조한다. 영광받으신 예수는 성령을 통해 제자들에게 새로 알릴 내용을 가지고 계시며, 성령의 활동은 지상 사역 중의 말씀을 반복하고 풀이하는 데 한정되지 않는다고 본다.[^14]

12절은 아직 하지 않은 말이 있음을 인정한다. 따라서 성령의 가르침 전체를 이전 말씀의 반복으로 좁히기는 어렵다. 동시에 14-15절은 그 가르침의 출처와 중심을 예수에게 묶는다. 성령은 제자들이 이미 들은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아직 감당하지 못한 것도 알리신다. 이전에 듣지 못한 내용도 예수와 아버지에게 속한다.

앞으로 올 일들이 무엇인지는 이 절에서 목록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제자들이 당면할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 이후 증언의 삶을 포함하여 읽을 수 있다. 성령의 역할은 미래에 관한 호기심을 채우는 데 있지 않다. 예수를 증언할 사람들이 그분의 떠나심 이후를 이해하도록 돕는 데 있다.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성령의 말씀이 어디서 오는지를 밝힌다. 예수도 자신에게서 말하지 않고 아버지가 주신 말씀을 전한다고 하셨다(12:49; 14:10). 카슨은 성령과 예수 사이의 관계가 이 아버지와 예수의 관계에 대응한다고 설명한다.[^15] 이 서술에는 방향이 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성령에게, 성령이 제자들에게 알리신다. 그 방향을 따라 같은 계시가 전해진다.

## 14-15절: 아버지께서 가지신 모든 것이 아들의 것

> “그분은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내 것을 받아 여러분에게 알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가지신 모든 것이 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내 것을 받아 여러분에게 알리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14-15절)

성령이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일과 예수의 것을 받아 알리시는 일이 연결된다.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이루셨는지 제자들이 알게 될 때 그분의 영광이 드러난다. 세상의 판단을 뒤집는 8-11절의 활동과 제자들을 가르치는 12-15절의 활동은 같은 예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내 것이라는 에크 투 에무(ἐκ τοῦ ἐμοῦ)는 성령이 받아 알리시는 것의 출처를 가리킨다. 본문은 성령이 아들의 본질 일부를 받아 가지신다고 말하지 않는다. 받음의 결과가 제자들에게 알림으로 이어지므로, 직접적인 관심은 계시의 내용과 권위다. 레이먼드 브라운도 15절을 먼저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계시의 문맥에서 읽는다.[^16]

예수는 여기서 자신의 것을 아버지의 것과 분리하지 않으신다. 아버지가 가지신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므로 성령이 자신의 것을 받는다고 설명한다. 모든 것이라는 표현은 예수를 아버지의 계시 가운데 작은 부분만 전달하는 사람으로 묘사하기 어렵게 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성령의 가르침이 다른 출처를 찾아야 할 공백이 없다.

제자들도 예수에게서 듣고 받은 것을 전한다. 그러므로 받거나 전달한다는 동사만으로 성령의 지위가 확정되지는 않는다. 이 단락에서 성령의 고유한 자리는 예수가 떠나신 뒤 오셔서 그분을 증언하고, 제자들 전체를 진리 안에서 이끄시며, 아버지와 아들이 가지신 것을 알리시는 데 있다.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다.

## 교부들의 해석

### 크리소스토무스: 같은 것을 아시고 같은 영광을 가지시는 분

크리소스토무스는 『요한복음 강해』 78에서 7절의 유익하다는 말로 성령의 존귀를 논한다. 주인이 떠나고 종이 오는 것을 더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반문이다. 이어 12-15절에서는 성령이 나중에 더 많이 가르치신다는 사실로 성령을 아들보다 높은 분으로 이해하는 해석도 배척한다. 예수가 지금 다 말씀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제자들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17]

그에게 스스로 말하지 않음은 아들과 반대되는 말을 하지 않으심을 뜻하고, 내 것을 받으심은 아들과 성령이 같은 것을 아심을 뜻한다. 그는 고린도전서 2:11을 연결한다. 사람의 영이 자기 안의 일을 알듯 성령은 하나님의 일을 아시므로, 성령의 들음은 무지한 분이 외부에서 배워 지식을 얻는 일이 될 수 없다는 논증이다.[^18]

이 해석은 계시를 주고받는 순서를 지식의 많고 적음으로 읽지 않는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일치에 바울의 성령 이해를 더하여, 성령의 앎을 하나님의 앎에 속한 것으로 설명한다. 동등한 지위의 근거는 듣는다는 동사 자체보다 성령이 하나님의 일을 아시는 방식에 있다.

### 아우구스티누스: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의 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강해』 95.2-3에서 10절의 의를 믿는 사람들의 의로 해석한다. 9절에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했는데, 10절에서는 여러분이 나를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는 변화에 주목한다. 예수가 떠나신 뒤에도 그를 믿는 제자들의 믿음이 세상의 불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의 복(20:29)과 연결한다.[^19]

같은 강해의 앞부분에서는 성령이 제자들에게 사랑을 부어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고, 그들을 통해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설명한다. 이 활동에서 그리스도도 함께 일하신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세 분의 활동은 분리되지 않으며, 성령의 활동을 따로 말하는 것은 세 분을 혼동하지 않게 한다.[^20]

그의 의 해석은 여러분이라는 인칭과 예수의 부재를 충실히 설명한다. 반면 아버지께 가심이 예수 자신에 관하여 무엇을 입증하는지는 덜 설명한다. 이 점에서는 예수의 정당함을 읽는 해석이 더 직접적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불신과 믿음의 대조를 통해 이 말씀을 부활 이후 교회의 삶과 연결했다.

### 아우구스티누스: 성령의 들음과 영원한 존재 관계

『요한복음 강해』 99.4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스스로 말하지 않고 들은 것을 말하신다는 표현을 성령의 존재 관계로 해석한다. 그가 제시하는 근거는 하나님의 단순성이다. 사람은 존재하면서도 어떤 것을 모를 수 있고 나중에 배울 수 있지만, 하나님에게 앎은 존재에 덧붙는 속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앎과 존재는 하나다.[^21]

이 전제에서 성령의 들음은 곧 아심이고, 아심은 존재하심이다. 따라서 다른 분에게서 들으심은 그분에게서 존재하심을 가리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성령의 관계와 연결한다.[^21] 이어 99.5에서는 들으실 것이라는 미래형을 다룬다. 영원한 앎을 말할 때 인간 언어의 미래형이 사용되어도, 성령이 지금은 모르다가 나중에 알게 된다는 뜻은 아니라고 설명한다.[^22]

여기서는 본문의 계시 관계를 존재 관계로 설명하는 논증이 선명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의 신성과 하나님의 불변성, 앎과 존재의 동일성을 전제로 들음을 해석한다. 이 전제를 받아들이면 관계의 의존과 신성의 동등함이 함께 성립한다. 성령은 다른 분에게서 존재하시되, 그 관계 때문에 지식이나 신성이 부족해지지는 않는다.

## 본문에서 내릴 수 있는 판단

이 단락에서 예수는 자신이 떠난 뒤 제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증언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보혜사는 세상이 예수에 관하여 내린 잘못된 판단을 드러내고, 제자들이 아직 감당하지 못하는 진리를 알리신다. 그 가르침은 아들의 것이며, 아들이 가진 것은 아버지의 것이다. 세 분의 관계는 제자들에게 전해지는 계시의 출처와 일치를 설명한다.

15절에서 아들은 아버지가 가지신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의 다른 본문에서도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생명을 가지며 같은 공경을 받으신다(5:23, 26). 서문은 말씀이 하나님이시며 만물이 그를 통해 생겨났다고 서술한다(1:1-3). 이 진술들을 함께 읽으면, 아버지가 피조된 대리자에게 계시의 권한을 임시로 맡기셨다는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아들이 아버지의 신적 생명과 활동을 공유하신다는 해석이 이 진술들을 더 잘 연결한다.

성령에 관해서도 듣고 받는다는 말만으로 낮은 본질을 결론 낼 수 없다. 예수 자신도 아버지에게서 듣고 받은 것을 전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복음서에서 다른 분에게서 받는다는 사실과 높은 신적 지위는 함께 서술된다. 반대로 아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계시하신다는 사실만으로 성령의 동일 본질이 모두 논증되는 것도 아니다. 16:5-15에는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거나, 아버지와 성령의 본질이 하나라고 명시하는 문장이 없다.

동일 본질을 설명하는 교부들의 논증에는 이 지점을 잇는 근거가 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일을 아신다는 고린도전서 2:11을 가져와, 성령의 앎을 피조물이 밖에서 배우는 앎과 다르게 설명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에 하나님의 앎과 존재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전제를 결합한다. 이때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받으심은 부족한 신성이 보충되는 사건이 아니라, 같은 신성을 가지신 분의 고유한 관계로 해석된다.

요한복음 16:5-15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를 계시의 신뢰성과 연결한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지신 아들이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은 아들의 것을 받아 제자들에게 알리신다. 교부들은 그 일치와 의존을 영원한 신적 존재의 관계로 설명했다. 동일 본질에 관한 이들의 결론은 요한복음의 관계 언어에 근거하면서, 다른 성경 본문과 하나님의 앎과 존재에 관한 판단을 함께 사용한 결과다.

## 각주

[^1]: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Grand Rapids: Eerdmans, 1991), 532-533.

[^2]: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33-534.

[^3]: Marianne Meye Thompson, *John: A Commentary*, NTL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15), 338. [Perlego 판본](https://www.perlego.com/book/2100818/john-a-commentary-pdf).

[^4]: D. A. Carson, “The Function of the Paraclete in John 16:7-11,”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98, no. 4 (1979): 547-566, 특히 561-562, [DOI](https://doi.org/10.2307/3265668); Cornelis Bennema, *The Power of Saving Wisdom: An Investigation of Spirit and Wisdom in Relation to the Soteriology of the Fourth Gospel*, WUNT II/148 (Tübingen: Mohr Siebeck, 2002), 240-241.

[^5]: Carson, “Function of the Paraclete,” 561.

[^6]: Thompson, *John*, 338; Raymond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AB 29A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8), 706, 712-713.

[^7]: Carson, “Function of the Paraclete,” 558-562, 특히 559-560, 562.

[^8]: Tricia Gates Brown, *Spirit in the Writings of John: Johannine Pneumatology in Social-scientific Perspective*, JSNTSup 253 (London and New York: T&T Clark International, 2003), 229-230. [Perlego 판본](https://www.perlego.com/book/803041/spirit-in-the-writings-of-john-johannine-pneumatology-in-socialscientific-perspective).

[^9]: 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11-712.

[^10]: T. G. Brown, *Spirit in the Writings of John*, 222-223, 227-228.

[^11]: Bennema, *Power of Saving Wisdom*, 237-239.

[^12]: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39-540. 13절의 다른 본문 형태에는 에이스(εἰς)를 사용하여 모든 진리로 이끄신다고 표현한 읽기도 있다.

[^13]: Bennema, *Power of Saving Wisdom*, 231-232.

[^14]: T. G. Brown, *Spirit in the Writings of John*, 231-232.

[^15]: Carson, *Gospel According to John*, 540-541.

[^16]: R. E. Brown,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XXI)*, 709, 716-717.

[^17]: John Chrysostom, *Homilies on the Gospel of John* 78, 요한복음 16:7, 12-15 해설, [공개 영어 본문](https://www.newadvent.org/fathers/240178.htm).

[^18]: Chrysostom, *Homilies on John* 78, 요한복음 16:13-15 해설.

[^19]: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95.2-3, [공개 영어 본문](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95.htm).

[^20]: Augustine, *Tractates on John* 95.1.

[^21]: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99.4, [공개 영어 본문](https://www.newadvent.org/fathers/1701099.htm).

[^22]: Augustine, *Tractates on John* 99.5.

성경 인용은 SBLGNT를 기준으로 옮긴 필자 번역이다. [요한복음 헬라어 본문](https://github.com/Faithlife/SBLGNT/blob/c4d241a9c1c479a55b989ba35a4976c1d0b8052c/data/sblgnt/text/John.txt). © 2010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and Logos Bible Software, CC BY 4.0.
